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천년 세월 반야용선은 '경상도 사내'였다

한국작가회의/오마이뉴스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0. 23. 09:18

본문

728x90

천년 세월 반야용선은 '경상도 사내'였다
[창녕의 문화재를 찾아서⑬] 용선대 석조 석가여래좌상
08.09.23 09:15 ㅣ최종 업데이트 08.09.23 09:15 박종국 (jongkuk600)

  
▲ 용선대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 관룡사 용선대 속조 석가여래좌상은 높이 1.8m, 좌대 1.17m,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이다.
ⓒ 박종국
용선대

 

창녕 관룡사 대웅전을 비켜나 명부전을 지나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체를 돌아가니 좁다란 오솔길이 나왔다. 대숲, 솔숲으로 우거진 길은 한적하다. 그러나 이내 가팔라진다. 팍팍한 걸음으로 한참을 오르다 목덜미에 땀이 날 즈음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석조 석가여래좌상이 보인다. 몇 번이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600여m의 산길을 따라 15분 가량 올라 거대한 바위를 만났다. ‘용선대’다. 

 

  
▲ 용선대를 오르는 마지막 '깔딱고개' 관룡사 명부전을 출발한 지 십여 분, 600m 가파른 오솔길을 오른지 용선대를 오르기 위한 마지막 '깔딱고개'
ⓒ 박종국
오솔길

 

용선대는 화왕산 제2등산로 갈림길에서 왼편에 있다. 20여m의 높다란 암벽을 만났다. ‘깔딱 고개’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겨우 한 사람 정도 오를까말까 좁은 바위 틈, 숨을 할딱이며 마지막 고비를 오르고 나니 첫눈에 육중하고 푸근한 인상을 한 부처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숨이 가쁘다. 관룡사에서 담아온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나니 평온해진다.

 

연화좌대 위에서 동쪽을 향해 결가부좌를 한 석조 석가여래좌상의 뒷모습은 참으로 평화롭다. 자비가 흐르는 부드러운 선들이 좌상(坐像)의 세월을 짐작케 한다. 한 바퀴 돌아본다. 옥구슬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라 하여 옥천계곡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천년 세월 동안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축복하며 온 고을을 부처의 마음으로 굽어보는 관음상이 신비롭다. 

 

용선대의 석가여래좌상은 근엄하고, 인자하며, 신비롭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 295호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이다. 토함산 석굴암의 본존불이 유리문으로 닫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사방을 휘돌아보니 기암절벽들이 좌상을 에두르고 있다. 먼발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 또한 옥천계곡물에 씻은 듯 시원하다. 긴 세월을 꿈쩍도 하지 않고 이렇게 앉아 있었다니 그 모습에서 느긋함이 느껴진다.

 

  
▲ 용선대 용선대는 깊숙한 바위에서 불쑥 튀어나온 천연의 거대한 암벽바위다
ⓒ 박종국
암벽

 

용선대는 깊숙한 바위에서 불쑥 튀어나온 천연의 거대한 암벽바위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큰 바다를 가르는 배처럼 생겼다하여 ‘용선대’(龍船臺)라 하였다고 한다. 또 용선대를 ‘반야용선’(般若龍船)에 비유하기도 한다.

 

본래 ‘용선’(龍船)이란 고금의 괴담기문을 엮은 <전등신화>에 나오는 어휘로 천자(天子)가 배를 타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용을 그리거나 조각한 대선(大船)을 이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 공무중(孔武仲)의 <궁사>(宮詞)에 의하면 단오절에 물 위에서 행하는 용형선(龍形船)을 의미한다.

 

또,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또는 고통의 연속인 중생을 고통이 없는 극락으로 건너가게 해 주는 배로 비유하는데, 이것이 바로 반야용선이고, 용선대가 바로 이 반야용선에 해당된다. 때문에 이 용선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극락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에 승선한 것이니, 30분 땀 훔쳐낸 것으로 극락을 맛본 셈이다.  

 

용선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극락세계가 보인다

 

잠시 땀을 식히고 석조여래좌상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본다. 어찌 이 높은 곳까지 올라 세상사를 굽어보듯 묵묵히 정동향을 하고 앉았을까. 돌부처의 그 모습이 퍽이나 인자하다. 절집을 향하고 있으면서 병풍바위를 바라보고 있으니 면벽수행의 길에 든 것 같기도 하다. 또 어찌 보면 아침마다 화왕산을 넘어오는 해를 반기며 세상사 밝은 빛을 만드는 재주를 지닌 부처의 모습이다.

 

  
▲ 용선대 석가여래좌상 정면 좌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단아한 인상이며,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몸에 밀착되었으며, 옷 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인 모습이다.
ⓒ 박종국
석가여래좌상

 

  
▲ 용선대 석가여래좌상 측면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형(半球形) 상대에는 연꽃을 새겼고, 하대에는 4각의 받침 위에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 박종국
연꽃

              

  
▲ 정동향을 하고 있는 용선대 좌상 동향을 하고 있는 모습은 절집을 향하고 있으면서 병풍바위를 바라보고 있으니 면벽수행의 길에 든 것 같기도 하다.
ⓒ 박종국
병풍바위

 

전반적으로 볼 때, 좌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단아한 인상이며,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몸에 밀착되었으며 옷 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인 모습이다.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향해 있는 부처는 산 너머 사바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석조여래좌상은 조각 솜씨가 균형미의 조화를 이뤄

 

신체의 양감이 줄어든 편으로 약간 위축된 모습이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앉은 자세에서는 다소 둔중함이 느껴진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형(半球形) 상대에는 연꽃을 새겼고, 하대에는 4각의 받침 위에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영감이 줄어든 신체의 표현, 도식적인 옷 주름선, 8각의 연꽃무늬 대좌의 형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 용선대 좌상의 온화한 미소 천년의 세월, 모진 풍파를 견뎌낸 좌상의 온화한 미소가 퍽이나 인자하다
ⓒ 박종국
풍파

 

산 속 평평한 바위 위에 앉은 부처, 그 몸체와 얼굴에 흰 이끼가 덕지덕지 붙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의 풍상을 한 몸에 다 받았기 때문이리라. 수백 수천 년을 제자리에 머물며 무엇을 관조(觀照)하였었을까. 늘 한 곳만 응시하며 영겁(永劫)의 풍파에도 거침없는 존엄함에 숙연해진다. 좌상은 작지만 강대하고, 존엄하지만 단아하며, 변한 것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는 부처의 얼굴이다.

 

천년 세월 반야용선(般若龍船)의 기다림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좌상을 배알하고 나니 경외감이 돈독해진다. 천년을 기다린 이유는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천년동안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은 이루지 못한 해탈 때문이었을까. 천년을 머물러 온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려는 결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 천년 후 나 같은 길손이 있다면 그는 좌상을 통해 무엇을 볼 것인가를 반문해 본다.

 

  
▲ 천년 세월 반야용선(般若龍船) 좌상은 작지만 강대하고, 존엄하지만 단아하며, 변한 것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는 부처의 얼굴이다.
ⓒ 박종국
반야용선

 

그런데 동글동글한 얼굴, 조금은 뜬 듯한 기다란 눈, 짧고 넓적한 코, 입가의 온화한 미소를 지닌 좌상은 영락없는 경상도 사내였다. 함께 동행 했던 이 지역 토박이의 말에 따르면 이 석조여래좌상은 팔공산 갓바위처럼 영험이 있다고 ‘팥죽부처’라고 부른단다. 그래서 동짓달이면 소원을 빌기 위해 줄을 잇는다고 한다.       

 

  
▲ 용선대 '팥죽부처' 이 석조여래좌상이 팔공산 갓바위처럼 영험이 있다고 ‘팥죽부처’라고 부른다.
ⓒ 박종국
팥죽부처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미디어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