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국에세이

행복한 그림 하나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8. 9. 1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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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 하나

 

어제 그 동안 미뤘던 조상묘소 벌초를 했다.

집안 두루 벌초해야할 봉분은 많다. 그러나 바쁜 시류에 편승하여 피붙이들 각자 떼어서 도맡으니 우리 몫은 네 솔이다. 사촌 동생들과 의논한 끝에 일요일을 택해서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삼촌 묘소를 사렸다.

지난 불볕 탓인지 올해는 그다지 잡초가 무성하지 않았다.


먼저, 잡풀더미를 헤집고 벌떼를 가렸다. 몇 군데 꾹꾹 인기척을 내었는데도 잠잠했다. 해마다 땅속에다 드잡이했던 땅벌도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살벌하게 진을 쳤던 말벌도 빈집 똬리만 남겨 둔 채 떠나 다행스러웠다

 

예초기 두 대를 둘러맨 사촌동생들이 허우적허우적 잘라놓은 무더기를 깔꾸리(갈퀴)로 걷어내는 게 내 할 일이였다. 워낙 바깥일에는 젬병이고, 왼손잡이인 탓에 예초기 건사가 쉽지 않다. 하여 일꾼들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또 한 번 왼손잡이의 비애를 실감했다.


본격적으로 예초 작업이 시작되었다. 예초기를 짊어진 사람들이야 곧장 나아가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갈퀴를 집어든 나로선 돌아서면 잡풀무더기로 치였다. 아무리 손 빠르게 치워도 예초기 성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전체 벌초를 두고 보면, 공치사는 늘 예초기를 짊어진 동생들 차지였다. 그나저나 비지땀을 쏟은 덕분에 터벅머리였던 봉분이 깔끔하게 단장되었다. 한식이나 추석 무렵에야 찾아뵙는 묘지, 옛 기억을 조상하며 준비해 간 소주잔을 올렸다. 그새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어느새 우리도 지천명 나잇살을 훌쩍 넘겼다.

귀밑머리 희끗한 동생들만큼이나 나 역시도 앞머리 하얗게 눈 내렸다.

 

생각보다 벌초가 일찍 끝나 손 마무리 짓고 동생들과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남지읍 내 아침을 여는 식당이 드물어 양평해장국 한 그릇 비웠다. 밥을 나누는 내내 그간 세상살이를 얘기했다. 다들 열심히 사는 요량으로 말이 많았다. 철부지적 얘기도 안주삼아 늘어놓았다. 변함없는 일상에 감사하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싶었지만, 추석 때 반갑게 얼굴 보자며 헤어졌다. 이번 벌초에 함께하지 못한 충남홍성의 동생과 막내 동생도 꼭 함께 하리라 다짐했다. 한데, 혼자 차를 몰로 돌아오면서 동갑내기 동생인 한 말이 뇌리에 남았다.

형님, 이렇게 사촌형제가 모여 벌초를 하는 일도 우리 세 개가 끝일 겁니다.”

다들 그 말에 동감했다.


고향 둔덕에 옹기종기 모여 벌초를 하는 군상들을 보면 거의가 중늙은이 뿐이다. 삼사십 대 젊은이들은 별반 이런 집안 행사에 관심 없다.

우리네만 하여도 도회지에 나가 사는 젊은 애들은 아예 부르지도 않는다.

여느 집안이나 비슷한 상황일 거다.

더군다나 장묘문화도 화장이 80%이상에 이르는 이 시점에서 더 이상 벌초 운운할 게재가 아니다.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나니 피곤마련 하였던지 앉은 자리에서 잠들었나보다. 잠을 자고 났더니 아내가 사우나를 권했다. 서둘러 챙겨서 부곡온천으로 향했다. 장모님을 모신 자리였다. 아직은 연만하신 장모님께 별달리 효도할 방편을 찾지 못한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꼭꼭 뫼시고 목욕찜질에 동행한다. 장모님께서도 꽤 반기시고, 즐겨하신다.


한때 성황을 이뤘던 부곡온천, 이태 전 부곡하와이가 문을 닫은 이래 다소 경기가 주춤하였으나, 물이 좋아 여전이 온천욕객으로 붐볐다.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연중무휴로 사우나마다 호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도 그랬다한창 온탕에 들어가 피로를 피는 중인데, 갑자기 탕 속이 요란해졌다. 스르르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칠순의 할아버지와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실랑이를 했다. 할아버지는 물이 뜨겁지 않으니 탕 속으로 들어오라고 강권하고, 손자를 뜨겁다며 길길이 발을 뺐다. 그 요량을 재밌게 지켜봤다. 대뜸 할아버지도 지지 않겠다는 듯 손잡아 끌었고, 손자 녀석도 잡힌 손을 뿌리치고 줄행랑을 칠 기세였다.


그때였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팔순의 할아버지께서 조용히 손주를 불러 세웠다.

그래, 니 나이가 몇이냐?”

일곱 살이에요.”

일곱 살? 그러면 할아버지가 몇 살인지 알겠구나?”

, 알아요. 77살이에요.”

할아버지 연세가 맞아요?”

할아버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도 스스로 기특한지 우쭐한 기분이었다.

, 그래. 착하구나. 할아버지 나이를 정확하게 아는구나. 그렇다면 할아버지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도 잘 알겠네? 안 그런?”

 

녀석은 아무 말도 못하고 탕 속으로 스르륵 들어왔다.

42° 온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참아내느라 생고생을 하는 어린 녀석이 참 안 되어 보였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할아버지들이 탕 밖으로 나가고, 나 역시도 녀석을 데리고 나왔다.

자리를 이웃해서 몸을 부시는데, 아가와는 달리 녀석의 주문이 바빴다.

두 손 가득 때밀이 수건을 끼고는 할아버지 몸을 밀었다.

참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할아버지도 익숙하다는 듯 손주에게 몸을 맡기고는 눈을 지그시 감으셨다.

일곱 살 어린아이답지 않게 손매가 야물었다.

힘에 부칠 텐데도 마다하지 않고 오랫동안 할아버지 몸을 다 밀어드렸다. 그리고도 연신 환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위했다.

 

이만하면 벌초 걱정할 까닭이 없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밀착된 사랑만 한 게 또 없으니까.

오늘 이 그림 하나만으로 내내 즐겁고, 흐뭇하고, 행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