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편이 같은 인간
반편이 같은 인간
간만에 친구를 만났다. 근데 몹시 찌든 얼굴이었다. 친구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요즘 하루하루가 칼끝에 서서 산다고. 직장에서 명퇴 당하고, 개업한 가게마저 빚잔치를 한 뒤로 마땅한 일자리 없이 지내기 너무 허망하다고. 그렇게 애살맞게 조근하던 아내도 돈줄 떨어지자 그냥 냉담하더란다. 아이들도 마찬가지. 하릴없이 빈둥대는 아버지를 데면데면하게 대한단다. 그래서 눈 뜨면 새벽바람처럼 나왔다가 지는 해 보면 집에 들어가는데, 영락없이 아내 바가지 긁는 소리 다다닥 발끝에 채인 단다.
요즘 세상 다 그렇다고 위안삼지만, 내 속도 그리 편하지 않다고. 그렇게 곱던 아내도 오십 줄에 들어서니 목소리 굵어지고, 남편 쉽게 대한단다. 숫제 가장 체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단다. 친구의 처진 어깨를 추스르며 소주잔 건넸다. 그러나 애써 마다하며 속울음을 삼켰다. 마른 담배를 뻑뻑 태우는 그, 지금 영판 나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체 어떻게 남편보기를 그렇게 몰착하게 대할까?
빈속에 거푸 술 마신 탓에 친구는 거나하게 만취했다. 두어 시간 술잔 기울였는데도 그는 안주 한 점 집지 않았다. 새까맣게 탄 속에 안주집어본들 무엇하랴. 덩달아 찬물만 들이키던 나도 젓가락을 놓았다. 우리의 이야기는 멈춘 지 오래, 다만 냄비안주만 바짝 졸았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달고 단내만 쭉 다 빨아먹고 껍데기만 데데하게 남았으니 더 이상 소용없는 거다.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질척한 어둠 속으로 두 중늙은이가 비척거렸다. 채 걸음이 떼이지 않는 친구를 부축하랴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봤다. 까만 하늘 먹장구름만 잔뜩 끼었다. 꼭 갑갑하게 응어리진 내 맘 같았다. 친구는 연신 코를 골며 단잠에 빠졌다. 집까지 데려다주려면 아직도 삼십여 분 실랑이를 남겨둔 거리. 늦은 시간이라 지나는 택시도, 대리운전도 캄캄 무소식된 지 오래다. 친구를 들쑤셔 깨워도 기척 없었다.
딴은 치열하게 살았는데도 막상 헤아려보니 속빈 강정이다. 돈도, 명예도, 사회적 지위도 부나비 춤처럼 부질없는 인생. 내가 봐도 친구는 세상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다. 도덕교과서로, 정말이지 법 없어도 살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많이 뒤미치게 살았다. 그런데 지금 형편은 말이 아니다.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 기울기 시작하자 끝 간 데 없었다. 명퇴금으로 시작한 가게가 쪽박 나고, 친인척에게 손 내민 게 화근이었다.
얘기하다말고 가슴을 턱턱 치는 친구를 도와주고픈 마음은 간절했다. 그러나 벽면서생으로 딱히 모아둔 게 없는 나는 그저 씁쓰레한 침만 삼켰다. 친구란 게 무색하다는 자괴감이 컸다. 나이 들면 건강만큼이나 돈줄이 든든해야 한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와는 참 멀찍이 떨어져 살았다. 단지 친구 좋다는 그 의기투합 하나로 젊음을 일갈하였을 뿐. 세상의 대업은 칠십대 노익장이 이룩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와는 별단 인간이다.
겨우겨우 친구를 부축해서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사위가 적막했다. 살아서 밤기운을 지키는 건 오직 가로등 하나였다. 그렇게 먹먹하게 돌아서는데 날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바로 나를 향해 쏟아 붓는 질타 같았다.
“어느 반편이 같은 인간이 이 시간까지 술 사 주더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