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1강 철학 그것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제01강 철학 그것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1. 난파한 우주선의 우주비행사
여러분이 우주비행사인데, 우주선이 고장나서 이름도 모르는 혹성에 추락했다고 가정해보자. 의식을 되찾은 후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첫 의문은 아마 다음 세 가지일 것이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나?
여러분은 우주선 밖의 낯선 식물을 보게 될 것이고 숨쉴 공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태양 빛은 여러분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창백하고 차가운 듯이 보인다. 하늘을 쳐다보려고 고개를 돌리다 여러분은 갑자기 멈추고 만다. 어떤 갑작스런 느낌이 여러분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즉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어쩌면 여러분은 자신이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고 다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굳이 깨닫지 않게 될 것이라는 느낌 말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믿으며 안개처럼 뿌옇고 상쾌한, 그러나 얼마간 죄책감이 깃든 희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우주선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파손되었겠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얼마나 심하게 파손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갑자기 어떤 두려움을 느끼며 멈춰 선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 기계를 믿을 것인가? 그 기계가 여러분을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그 기계가 다른 세계에서도 여전히 작동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러분은 그 기계를 외면하게 된다.
이제 여러분은 왜 뭔가를 하고 싶은 의욕이 전혀 일지 않는가 하고 의아해 하기 시작한다.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할 듯이 보인다.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말한다. "우주선을 타지 않는 게 더 낫겠어." 갑자기 멀리서 어떤 생물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인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발로 걷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들이 여러분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그 이후 아무도 여러분에 대해 얘기를 들은 사람은 없다.
2. 지상적 삶
쓸데없는 망상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결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고 우주비행사치고 그렇게 행동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여러분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방식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자신들이 의식적으로 깨닫고 있건 그렇지 않건, 인간의 모든 사고와 느낌, 행동의 저변에 놓여 있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들, 그에 대한 답을 피하기 위해 애쓰면서 나날을 보낸다. '여기가 어디인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가 어디지? 거창에 있다고 치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그야 자명한 일 아닌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여기에 이르면 그들도 그다지 자신이 없어지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단 한 가지 문제는 그렇게 대답하는 그들이 그다지 적극적이 아니고, 자신에 차 있지도 않으며, 별로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거하기도 어려운 뭐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들은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 그 세 가지 질문에서 문제가 비롯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학문, 즉 철학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3. 철학의 성격과 영역
철학은 존재, 인간, 그리고 존재에 대한 인간관계의 근본적 성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어떤 특정한 분야를 다루는 다른 특수한 과학과는 달리, 철학은 존재하는 그 모든 것에 해당되는 우주의 면모를 다룬다. 인식영역으로 보자면, 특정과학이 나무라면 철학은 토양에 해당된다. 그러나 철학은 숲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토양이다.
철학은 예를 들어 여러분이 서울에 있는지 광주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지는 (물론 여러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수단을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않는다.
1)형이상학(形而上學) 영역
그러나 철학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얘기해줄 것이다. : ◦여러분들은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즉 안정되고, 탄탄하며, 절대적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알 수 있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가? ◦혹은 여러분은 이해 불가능한 혼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의 영역, 앞을 예견할 수 없는, 여러분의 정신으로는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없는 뭔지 알 수 없는 흐름에 속해 있는가? ◦여러분 주위의 것들은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환상에 불과한가? ◦그것들은 보는 관찰자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일까, 혹은 관찰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일까? ◦그것들은 인간의식의 대상인가, 아니면 주체인가?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인가, 아니면 단순히 여러분들의 의식에 따라, 이를테면 여러분들의 소망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어떤 유의 대답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여러분들 행동이나 야심의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그 대답들은 철학의 근본가지인 형이상학(존재 그 자체에 관한 연구,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자면 존재로서의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2)인식론(認識論) 영역
어떤 결론에 도달하건, 여러분들은 또다시 당연히 그에 뒤따르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어떻게 내가 그것을 아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도, 또 완벽하지도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자신이 지식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서 자신이 내린 결론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인간은 이성적 과정에 의해서 지식을 얻는 것일까, 아니면 초현실적인 힘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계시로 인해서 지식을 얻는 것일까? ◦이성은 인간의 감각에 의해 제공된 것들을 확인하고 통합하는 것일까, 아니면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의 정신 속에 심어진 타고난 사상으로 채워져 있는 것일까? ◦이성은 실재를 인식하기에 충분한 능력인가, 아니면 인간은 이성보다 우월한 다른 어떤 인식능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끊임없는 의심 속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여러분들이 과연 어떤 대답을 수용하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자신감과 성공의 정도가 달라진다. 그러한 답들은 인간의 인식수단을 연구하는 지식의 영역인 인식론에 속한다. 이 두 가지, 즉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철학의 이론적 근간이다.
3)윤리학(倫理學) 영역
세번째 가지라 할 수 있는 윤리학은 아마 철학의 테크놀로지라고 간주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리학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즉 인간의 성격, 행동, 가치, 다른 모든 존재들에 대한 관계에 적용된다. 윤리학, 혹은 도덕성이라 불리는 이것은 인간 삶의 진로를 결정짓는 인간의 선택과 행동을 이끄는 가치규범을 정의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방금 말한 우주비행사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알아낼 것인지 알기를 거부함으로써 그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몰랐던 것처럼, 여러분들 또한 여러분들이 다루어야 할 이 세계의 본성, 여러분들 인식수단의 본성,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 수 없다.
앞에서 말한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대답하는 중에 윤리학에 다가가게 된다. : ◦인간은 실재를 다룰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흐름에 시달리는 한 조각의 나무토막인가, 아니면 절망적으로 눈이 먼 부적합자인가? ◦이 지상의 인간은 성취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가, 아니면 실패와 재난을 받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일정하게 대답함으로써, 뒤이어 윤리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숙고해볼 수 있다. : ◦인간에 이로운 것은 무엇이며 해로운 것은 무엇인가, 또 어떤 것이 이롭거나 해롭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최우선적 관심사는 기쁨의 추구가 되어야 할 것인가, 혹은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인간은 삶의 목표로 자아성취를 주장해야 할까, 혹은 자기파괴를 주장해야 할까?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자신의 것보다 우선시해야 할까?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 아니면 자기희생을 추구해야 할까?
내가 여기서 이 두 가지 다른 질문들에 따른 다른 결과들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안팎 어디에서건 그 결과들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4)정치학(政治學) 영역
윤리학이 준 그러한 대답들은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를 결정짓게 되고, 이는 또 철학의 네번째 가지인 정치학을 결정짓게 된다. 철학적 기능의 예를 들자면, 정치철학은 어느 날 얼마만큼의 가스를 여러분들이 배급받아야 하는지를 얘기해줄 수는 없지만, 정부가 어떤 물질에 대해 배급제를 실시할 권한이 있는지는 얘기해줄 것이다.
5)미학(美學) 영역
다섯번째이자 철학의 마지막 가지는 예술에 대한 연구인 미학인데, 이는 형이상학,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술은 인간의식의 욕구와 이를 충족시키는 일을 다루고 있다.
4. 철학의 필요성과 철학의 영향
여러분들 중 몇몇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다음과 같이 얘기할 것이다. "어, 전 그렇게 추상적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요. 전 뭔가 더 구체적이고 특별하고 실제 삶에 연결된 문제들을 다루고 싶거든요. 저한테 왜 철학이 필요하죠?"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구체적이고 특별하고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즉 이 지상에 살기 위해서 철학은 필요하다."이다.
1)철학의 영향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여러분 자신들은 아무런 철학적 영향도 받은 바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주장을 다시 한 번 재고해보기를 권한다.
◦여러분들은 혹시 "그렇게 너무 자신하지 마세요. 사람은 무엇이건 그렇게 확신할 수 없는 거예요"라는 생각이나 얘기를 해본 적이 있는가? 이 경우, 여러분은 비록 데이비드 흄(그 외에도 물론 그와 같은 철학적 입장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다)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을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혹은 여러분이 "이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기 어려워요"라고 말할 경우, 이는 플라톤의 사상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혹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썩어빠진 짓이었어.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야. 이 세상 그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라고 얘기할 경우 여러분 뒤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혹은 "그것이 당신에게는 진실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요"라고 할 경우, 여러분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인간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라고 얘기할 경우, 여러분은 헤겔의 사상을 물려받은 것이다.
◦혹은 "딱히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게 진실이라고 느껴요"라고 얘기할 경우에는 칸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혹은 "그것은 논리적이군요, 하지만 논리란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라고 할 때도 역시 그 뒤에는 칸트가 있다. 혹은 "그것은 악이에요, 이기적이니까요"라고 얘기할 때도 역시 칸트에서 얻어온 것이다.
◦여러분들은 현대의 행동주의자들이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하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그것을 존 듀이로부터 얻어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러한 말들을 때때로 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내용을 언제나 믿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어제는 그 말이 진실이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이 경우는 헤겔로부터 얻어온 생각이다.
◦"일관성이라는 것은 소심한 사람들의 요술도깨비 같은 거죠"라고 말할 경우, 그들은 아주 소심한 사람, 에머슨의 생각을 따르고 있다.
◦사람들이 "하지만 사람들은 그때 그때의 편의에 따라 각기 다른 철학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오고 타협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할 경우 그는 리처드 닉슨(그는 윌리엄 제임스의 영향을 받았다)의 생각을 빌어온 것이다.
2)추상적 사상(철학)의 필요성
자, 이제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라. 만일 추상적 사상에 흥미가 없다면, 왜 여러분들은(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굳이 그러한 사상를 사용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실인즉 추상적 사상이란 수많은 구체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적 총체로서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구체적이고 특별한 실제 삶의 문제들을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마치 갓난아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어, 모든 대상이 특별하고 전례 없는 것이라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과 여러분들의 정신상태의 차이는 여러분의 정신이 행한 개념적 통합의 숫자에 놓여 있다.
여러분은 자신이 관찰한 것들, 경험, 지식을 추상적 생각, 즉 원칙으로 통합시킬 도리밖에 없다. 여러분들의 유일한 선택은 이러한 원칙들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것들이 여러분의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확신을 대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거나, 혹은 마구잡이로 끌어다 붙인 잡다한 사고(思考)주머니라고 받아드리는 것 이 양자택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원칙이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을 일으킬 경우, 그것들 또한 통합되어야 한다. 그때 그것들을 통합시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철학이다.
여러분들은 의식적이고 이성적이며 훈련된 사고과정과 꼼꼼한 논리적 숙고에 의해 자신의 철학을 정의할 것인가, 혹은 여러분들의 무의식이 검증되지 않은 결론, 그릇된 일반론, 정의되지 않은 모순들,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슬로건들, 정의되지 않은 소망들, 회의와 두려움들을 쌓아가도록 버려 둘 것인가를 택할 수 있을 뿐이다.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추상적 원칙들에 의거해 행동하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라고 얘기할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그러나 추상적 원칙들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고서 그에 의거해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가?
5.철학 = 인간 잠재의식의 궁극적 프로그래머
여러분들의 잠재의식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어떤 컴퓨터보다도 복잡하고, 그 주요 기능은 여러분의 생각을 통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것은 누구인가? 바로 여러분들의 의식적 정신이다. 여러분들이 확신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잠재의식은 우연에 의해 프로그램되고, 여러분들이 태만하게 군다면 받아들이지도 않은 생각의 힘 속으로 자신을 건네주게 된다. 하지만 이런저런 식으로 여러분의 컴퓨터는 시시각각 감정이라는 형태로 프린트를 뽑아준다.
이때 감정이란 여러분들 자신의 가치에 따라 계산해 여러분 주위에 있는 것들을 섬광같이 평가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의식적 사고에 의해서 자신의 컴퓨터를 프로그램한다면 자신의 가치와 감정을 알고 있는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가치나 감정을 모르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논리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즉 그의 성격 중에는 고려해야 할 감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또 자신들은 감정에 의지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방금 얘기한 우주비행사 또한 그러했다. 남에 대한 농담이 그 자신에게로, 또 그들에게로 되돌아온다. 인간의 가치와 감정은 인생에 대한 그의 근본적 시각에 의해 결정된다. 감정주의자들은 철학이 그들 감정의 음울한 신비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꿰뚫기에는 무기력한 과학이라고 간주하고 있지만, 인간 잠재의식의 긍극적인 프로그래머는 단연 철학이다.
컴퓨터에서 얻는 결과의 질은 컴퓨터에 투여한 것의 질에 달려 있다.
만일 여러분들의 잠재의식이 우연적으로 프로그램되고 있다면, 그 결과 또한 마찬가지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여러분들도 분명히 컴퓨터 작동가들이 '지고(gigo)'(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뜻이다)라고 이름 붙인 용어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 사이에도 마찬가지의 공식이 적용된다.
감정 위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프린트 아웃을 내는 컴퓨터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 프로그래밍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며, 그것이 자신을 성공으로 이끌고 갈지, 혹은 파괴로 이끌고 갈지도 알지 못하며, 그것이 자신의 목표에 도움이 되는지, 혹은 어떤 사악하고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득이 되는 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두 세계, 즉 주위의 세계나 그 자신의 내면세계 모두에 대해 눈이 먼 상태이다. 그는 현실이나 그 자신의 동기를 포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양자 모두에 대한 만성적 공포상태에 놓여 있다. 감정은 인식의 도구가 아니다. 철학적 요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감정을 가장 조급하게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들은 가장 절망적으로 감정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다.
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문화적 환경으로부터, 즉 학교, 대학, 책, 잡지, 신문, 영화, 텔레비전 등으로부터 철학적 원칙들을 흡수한다. 하지만 어떤 문화의 색조를 결정짓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소수의 사람들, 즉 철학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확신해서건, 실수로건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영향하에 놓여 있던 지난 약 2백여 년간 철학의 주류는 인간정신의 파괴, 이성의 힘에 대한 인간신뢰의 파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왔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경향의 절정을 목도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성을 포기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이 그들을 이끌어줄 수 없을 뿐 아니라 공포라는 단 하나의 감정을 제외하고는 어떤 감정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 사이의 마약중독 확산은 오늘날의 지적 유행을 따라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인식수단을 빼앗기고 현실로부터, 존재를 다룰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젊은이들이 독립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광적으로 무엇엔가 '속하고자' 하며, 어떤 그룹, 파벌, 집단에 그 자신들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점에 주목하라.
그들 대부분은 철학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그들 자신이 감히 묻지 못하는 질문들에 대해 어떤 근본적인 답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과 어울리는 무리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점쟁이나 무당, 도사, 혹은 독재자, 그 어느 누구건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자신의 도덕적 자율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내가 얘기한 그 우주비행사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인지, 혹은 두발로 걸을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자, 이제 여러분들은 물을 것이다. "만일 철학이 그토록 사악한 것일 수 있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연구해야 하는가?" "특히 우리는 왜 명명백백하게 틀린 철학적 이론(이치에 닿지도 않고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을 연구해야 하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진실과 정의, 자유,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졌던, 혹은 앞으로 가질 수 있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이다."
물론 현대사에서 너무나 많은 철학이 사악하기는 했지만, 모든 철학이 다 사악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 여러분들은 모든 문명적 업적(이를테면 과학, 기술, 발전, 자유 등)과 이 나라의 탄생을 포함해 우리가 오늘날 향유하고 있는 모든 가치의 근저에서 2천여 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몇몇 철학자들의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들을 읽을 때 지겹기만 하다면, 나는 여러분을 진정 동정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그러한 이론들을 제쳐놓으며 "말도 안되는 소린지 알면서 내가 왜 그따위 것을 공부해야 하지요?" 하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말마따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실제로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고 있다. 그 철학자들이 내린 모든 결론과 모든 사악한 구호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한 여러분들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린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인간존재의 가장 치명적인 죽고 사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중요한 철학적 이론의 근저에는 합법적 문제가 있는데, 이 경우 합법성이란 인간의식의 진정한 요구가 그 속에 들어 있느냐를 의미한다.
철학자들간의 싸움은 곧 인간정신을 위한 싸움이다. 여러분이 그들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칫 그 이론들 중 최악의 것에 말려들 위험이 있다.
6. 철학에 이르는 길
철학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길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듯 그에 다가가는 것이다. 즉 누가 살인자이고 누가 영웅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모든 샛길과 단서, 함축된 의미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추리의 기준은 '왜?'와 '어떻게?'라는 두 가지이다. 만일 어떤 주어진 주의(主義)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다른 주의(主義)가 그릇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것은 밀려나게 되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즉시 다 찾지는 못하겠지만 여러분들은 본질과의 관계에서 사고하는 참으로 가치 있는 특성을 얻게 될 것이다.
지식이건 자신감이건, 내적 평화 건 정신을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이건, 그 어느 것도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인간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모든 가치(심지어 신체의 적당한 자세까지도)는 발견하고, 배우고, 획득해야 하는 대상이다. 철학적 훈련은 인간에게 그 자신의 정신을 자신만만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적당한 지적 자세를 제공해준다.
오늘을 위해 내가 나 자신에게 부과했던 과제는 여러분이 나의 철학에 찬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철학 그 자체를 여러분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철학에 관해서도 함축적으로 얘기해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들 그 어느 누구도, 또 어느 말 한 마디도 철학적 전제에서 벗어나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인터넷 카페 펌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