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찍이 행자와의 만남
깜찍이 행자와의 만남
박종국
4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집짐승을 키우거나, 반려동물을 돌보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어렸을 때 좋잖은 기억때문이다. 그때만해도 집안행사나 마을동제 때면 으레 닭이나 돼지를 잡았다. 그것도 누구나 빤히 눈에 띠는 개울 근처에서. 그럴 때면 엳아홉 살 철부지인 나는, 군입거리 한 점 얻어먹으려고 죽살이 현장을 기웃거렸다.
그곳에는 동네에서 몸집 좋은 삼촌이 팔팔하게 날뛰는 돼지와 씨름하며 멱을 땄다. 괙괙대는 돼지의 단말마가 온 동네를 감쌌다. 그러고도 덩치 큰 돼지는 쉬 숨이 떨어지지 않았다. 커다란 함지박에 핏물이 가득 고일쯤이면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시퍼런 무쇠칼을 들이대며 돼지 배를 갈랐다. 시뻘건 핏물이 개울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린 마음에 섬뜩했다. 그 광경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닭 잡는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만고만했던 그때 그시절 아무리 빈한했던 집이라도 씨암탉 몇 마리 정도는 길렀다. 그게 봄철 밭갈이나 여름모내기, 가을걷이를 끝내고 힘든 노동에 대한 몸보신 먹거리였다. 한편으론 귀한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했다. 그때 고깃국은 집안 중요행사가 아니었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꿀 일이었다.
시골동네 까까머리 떼쟁이였던 나는, 집안에서 기르던 수탉과 암탉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날마다 아가주먹만한 달걀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노랑병아리 때부터 함께 뛰놀며 컸던 소꿉놀이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안 어른이 생각하는 닭은 단지 술안주일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당 한가운데를 한가롭게 노니는 닭 중에서 두어 마리 날개죽지를 움켜쥔 어른은 파닥거리는 닭들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끈 목아지를 비틀어버렸다. 그리고는 팔팔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가 쓱쓱 닭털을 뽑았다. 닭 잡는 일이 너무 쉬웠다.
또 어떤 때는 소 잡고, 염소 잡고, 개잡는 모습도 뜨악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내 눈앞에서 죽어간 동물은 매일처럼 가족같이 지냈던 등속이었다. 한데 그들이 죽어서 고깃국으로 혀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감사보다 눈앞에서 사라진 존재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에 더 큰 신열을 앓았다. 아무튼 유년시절 내게 집짐승은 반려동물이기는커녕 도축의 대상이었다.
해서 지천명에 이르기까지 고양이나 개 한 마리 길러 본 적이 없었다. 바삐 사느라 그럴 시간적 여유도 빠듯했고, 또 키울 여건도 되지 못했다. 연전 근무지 사택에서 망아지만한 세퍼드를 키웠는데, 귀엽다기보다 차라리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온통 사납고 거칠어서 옆에 가기를 꺼렸다.
그런데 4년전 서울에서 쥐몸똥만한 반려견 '행자'(행복하게 자라라)를 만났다. 좁은 방안에서 거의 빌붙어 살다시피했던 행자의 처음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영양 부족으로 피골이 상접해서 커다란 눈망울만 깜빡거렸다. 이미 행자의 돌봄은 한계점에 이르른 상태였다. 난감했다. 마침 절친하게 지내는 형수의 제안으로 내가가 맡아돌보기로 하고선 데리고 왔다. 그게 벌써 4년 세월이 후다닥 지나쳤다. 그동안 행자와 함께 지내면서 숱한 일이 빚어졌다. 웬만하면 반려동물 하나 건사하기보다 늦둥이하나 키우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될 정도다. 그만큼 손 가는 데가 많았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이제 행자를 늦둥이보다 더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새삼 반려동물을 키우는 의미를 체감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녀석의 재롱이 얼마나 기특한지 생활 전반에서 행자를 제외할 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되었다. 똘망똘망한 행자를 두고 나는 연신 룰룰 짝짜꿍을 연발한다. 진정으로 반려동물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이 마음을 모르리라.
지금도 자기 존재가 사람인양 옆자리를 차지하고, 뙤리를 틀었다가는 냅다 혀를 들아대고 얼굴을 핥아댄다. 이 모습을 지켜본 지인은 손사래를 친다. 그렇지만, 한가족으로 받아들인 나는 그저 애교스럽고 귀여울 따름이다. 제 눈에 안경이 따로 없다. 분명 행자의 존재는 내 삶에 신선한 삶의 활력에너지다.
오늘도 집을 나서는 나의 모습을 그냥 지켜보지 못하는 행자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장소라면 바늘과 실처럼 꼭 동행한다. 그러면 행자는 온몸으로 화답하며 반긴다. 덜떨어진 사람보다 녀석이 낫다.
|박종국참살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