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잔소리하지 않는 날
오늘은 잔소리하지 않는 날
좋은 부모는 그저 만들어지지 않아
박 종 국
자녀가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자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부모는 적지 않다. 아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오락게임을 하려 든다. 그러면 엄마는 가만두지 못한다. 공부와 담을 쌓고 사는 아이에게 부아가 치민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무심코 내뱉는다. 어깨 너머로 그 말을 듣는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지금 게임을 할 때야!”
“넌 왜 그렇게 엄마 속을 썩이니?”
“네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내가 못 살겠다.”
어른만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다. 부모에 못지않게 아이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도 자녀의 마음 상태를 따뜻하게 읽어주지 못하고 함부로 아이를 다그치는 건 좋지 않다.
학교에서 아이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집에서 받는 가장 큰 고통이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의 처지에서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막무가내로 닦달한단다. 매일매일 거듭되는 엄마의 잔소리가 싫단다. 물론 아이들은 엄마의 잔소리가 사랑의 손길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사랑이라 해도 되풀이되는 잔소리는 싫다고 한다.
누구나 행복감이 높으면 자신감이 높아진다. 당연한 결과로 아이가 공부를 잘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 성인남녀의 경우 사랑에 빠지면 우선 얼굴빛이 달라지고 웃음이 헤퍼진다. 지독하게 사랑을 해본 사람은 긍정하리라. 그런데도 오직 내 방식 나의 의도 대로 아이를 키우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는 진정한 사랑을 못 해본 사람이다. 아니, 학창 시절 공부와 담을 쌓고 지냈던 사람일수록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고 점수를 챙긴다. 아이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어디 공부가 마음대로 잘 되는가. 그러잖아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려 있는 요즘 세상, 부모마저 공부로 한통속이 된다는 건 불행이다. 부모가 보다 여유를 갖고 기다려 줄 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가 되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공부에 지친 아이의 얼굴빛이 달라진다. 그게 아이를 더 크게 키우는 사랑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오냐오냐하며 모든 걸 다 품어주어야 한다는 고슴도치 사랑을 주문하는 게 아니다. 아이 스스로 아이답게 행동하고, 조그만 일 하나도 스스로 실천할 때 아낌없이 칭찬하고, 인정하고, 격려하며, 지지하면 된다. 그게 최상으로 행복 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논밭의 알곡들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여문다.
먼저, 어떠한 상황이 연출되더라도 아이의 존재를 믿어주고, 실수하면 위로해준다는 확신좌표를 가져야 한다. 단지 아이가 몰라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잘하지 못할 뿐이라고 믿어주어야 한다. 부모가 신뢰하고 기다려줄 때 아이는 자신감을 느낀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어떤 잘못을 해도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때론 아이가 하는 짓을 보면 머리끄덩이가 곤두서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부모라면 참아내야 한다. 부모가 화를 내면 꾸짖는 내용보다는 화를 퍼붓던 상황만 기억에 남아 오히려 아이는 분노를 배우게 된다. 맞고 자라 아이, 핀잔을 받고 자란 아이는 폭력성을 잠재하고 자란다. 감정을 조절하기 어렵다면 그때는 아이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다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스스로 감정을 조절될 때 말해야 한다.
한 사람을 소중하게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듯이 좋은 부모는 거저 되지 않는다. 부단한 자기 연찬이 필요하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로는 아름다운 사랑의 하모니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은 변함없는 관심이다. 부모로서 그런 열정을 가졌다면 아이가 지치지 않도록 언제나 따뜻하게 격려해 주어야 한다. 특별히 격려할 게 없다면 애써 만들어 내서라도 다독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곧바로 아이의 무한한 사랑이다.
|박종국에세이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