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만석꾼 신씨고가, 50년 '집지킴이'를 만나다

한국작가회의/오마이뉴스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0. 26. 16:47

본문

728x90

만석꾼 신씨고가, 50년 '집지킴이'를 만나다
[창녕의 문화재를 찾아서 16] 영산 신씨고가
08.10.05 18:52 ㅣ최종 업데이트 08.10.05 18:52 박종국 (jongkuk600)

  
▲ 영산 신씨고가 행랑채 앞 연자방아 신씨고가는 각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신씨고가1)와 제 354호(신씨고가2)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웃해 위치한다.
ⓒ 박종국
연자방아

영산 석빙고에서 발길을 돌렸다. 내친김에 영산 신씨고가를 둘러볼 참이다. 그동안 창녕지역에 산재해 있는 여러 고가들을 찾아보았다. 고가래야 200년 정도 밖에 안 됐지만,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나, 대지면 석동 성씨고가도 이제 고색창연한 세월의 흔적을 가졌다. 영산 신씨고가도 마찬가지다.

 

  
▲ 신씨 고가 입구 전경 멀찍이 신씨고가를 바라봤을 때 돌담 전경이다.
ⓒ 박종국
고객

지난번 답사 때와는 달리 초입까지 도로가 확장되어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뻥 뚫린 길은 한적하다. 마침 길 가장자리에다 햇고추를 말리고 있는 노모께 물었다.

 

겨우 차 한 대 정도 다니던 길이 어떻게 이렇게 시원하게 뚫렸냐고. 말씀인즉 지난해까지 영산 신씨고가는 일족이 소유, 관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창녕군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대대적인 수리 중이기 때문이란다. 

 

대문 앞에는 여전히 연자방아가 턱하니 지키고 섰다. 곧바로 대문 안으로 들어서기보다 영산향교 쪽으로 가지런하게 쌓은 돌담을 먼저 찾았다. 군데군데 허물어졌던 새로 고쳐쌓은 흔적들이 역력하다. 하지만 막돌과 흙으로만 쌓아놓은 토담이 예사솜씨가 아니다. 이는 진주 단성면 남사마을을 찾았을 때와 비슷한 감흥이다. 잠시나마 옛담에 대한 정겨운 추억에 겨워 봤다.

 

막돌과 흙으로만 쌓아놓은 담장 "예사솜씨가 아니다"

 

막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문간 평상이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인사를 여쭈었다. 말로만 들었던 신씨고가 실제 집지킴이 장순덕(89, 영산면 교리)님을 만났다. 전에도 두어 번 만났지만 오늘처럼 말문을 트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아 사람들과 일절 왕래를 끊고 살았으나, 요즘은 쾌차하셔서 때 좋은 가을빛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 50년째 신씨고가를 지키고 있는 장순덕님 신씨고가의 실제 집지킴이는 장순덕(89세)님이다. 그이는 33살부터 지금까지 고택에 살고 있다.
ⓒ 박종국
집지킴이

"이제 기억은 까맣게 잊어 버렸지만, 이 신씨고가가 흉가처럼 내팽개쳤을 때 군수(그 당신 군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님이 나한테 찾아와 '장순덕이가 아니면 이렇게 덩치 큰 집에서 살 수 이는 사람이 없지' 하면서 부추기었지. 그래서 어떠랴 싶어 눌러 산 게 어언 50년이 훌쩍 지나쳤어. 33살 때부터 줄곧 살았으니까 신씨도 아닌 사람이 신씨보다 더 정이 들었어."

 

"예전에 이 집은 천석만석꾼으로 잘 살았다는데, 지금은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이제는 일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아무도 찾지 않아. 참 안타까운 일이야. 근데 어떤 집이라도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곧바로 허물어져. 잡초들이 사람 없는 것을 먼저 알고 찾아와. 이렇게 귀신 꼴을 하고 살아도 내가 살고 있으니까 그나마 신씨고가가 형색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그러면서 장순덕님은 피붙이 소개를 했다. 아들 셋에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부산을 비롯해서 인근에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막내딸만큼은 외국인 남편을 만나 나가 산다고 마른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쳤다(듣긴 들었지만 막내딸이 외국에 나가 살지만 장순덕 님은 그 나라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일전에 큰 아들이 편하게 모시겠다고 데리려 와서 부산 갔다가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갑갑해서 다시 왔지. 아무리 노구라고 해도 난 여기만큼 맘 편한 데가 없어."

 

내가 아니면 누가 신씨고가 집지킴이 하겠어

 

신씨고가에 대한 내력을 듣고 나서 사랑채 앞마당에 섰다. 사랑채 헛간은 허물어졌는데 이제는 깔끔하게 완전 복원됐다. 여느 건물보다 도드라져 보였다. 하지만 역시 세월의 흔적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옛정취가 정겹다.

 

사랑채 안마당에 큼지막한 돌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말돌'이란다. 말돌은 그 곳에다 말을 매어놓고 사랑채 양반이 나들이 갈 때 신발이나 도포자락에 흙이 묻지 않도록 이용한 것이다. 그 왼편에는 고방으로 예전에 말을 키웠던 마구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근데 말돌 앞에서 사랑채는 꽤 높았다. 가히 행랑채 행랑아범과 그 식솔들이 지체 높은 양반의 위엄을 우러러 보게 하는 축담 구조였다.   

 

사랑채 오른쪽을 비껴서면 안채로 들어가는 안대문이 있다. 이 안 대문은 여느 고가의 솟을대문과 손색이 없다. 신씨고가의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안 대문은 마치 사랑채와 안채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해두려는 듯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기와를 새로 이었지만 안 대문 지붕에는 잡초의 흔적까지 있어 고풍스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신씨고가1의 안채 안대문 문화재자료 제109호(신씨고가1)의 안대문 모습이다.
ⓒ 박종국
안대문

  
▲ 신씨고가2의 안대문 문화재자료 제354호(신씨고가2)의 안대문 모습
ⓒ 박종국
신씨고가2

 

신씨고가의 특이한 구조는 안방마님이 거주하는 안채가 대감님이 거주하는 사랑채보다 규모에서 큰 게 특징이다. 물론 사랑채에 없는 부엌이 딸려 있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마당의 넓이도 사랑채보다 안채의 마당이 훨씬 넓다. 모든 집안의 대소사 및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쓸 수 있게 배려한 때문이리라.

 

널찍한 안채 마당, 7칸 안채가 고풍스럽게 서 있다. 그러나 인적이 끊긴 지 오래여서 그런지 고적하기만하다. 지붕은 근래 새롭게 단정했는지 새색시 옷맵시처럼 깔끔한 자태다. 예전에 들렀을 대는 지붕에 두런두런 풀이 돋아나 을씨년스러웠는데 다행스러웠다. 역시 집은 사람의 온기가 스며들지 않으면 그냥 기운을 다하다 보다. 그 기세 좋았던 신씨 일족이 이다지도 허물어지다니 세월이 무상하다.

 

  
▲ 신씨고가 안채 모습 7칸의 신씨고가 안채는 만석꾼 부농의 기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 박종국
안채

  
▲ 안채 부엌앞 디딤돌 고색창연한 신씨고가 안채 부엌앞 디딤돌 하나
ⓒ 박종국
디딤돌

 

  
▲ 안채 대들보와 써가래 고아한 책채를 잘 드러내고 있는 안채의 대들보와 써가래
ⓒ 박종국
대들보

  
▲ 안채 청마루 안채 청마루는 원목을 깎아서 그대로 사용했으며,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 박종국
마루

신씨고가의 특이한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의 규모다

 

신씨고가는 각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신씨고가1)와 제 354호(신씨고가2)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웃해 위치한다. 위쪽의 신씨고가는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나, 아래쪽의 신시고가는 그렇지 못하다. 안채와 담장 등이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안채와 문짝 등은 곳곳에 보수한 흔적이 역력했다.

 

  
▲ 안채 자연석 주춧돌1 안채 주춧돌로 200년 동안 기둥을 떠받쳤다.
ⓒ 박종국
주춧돌

  
▲ 안채 주춧돌2 신씨고가의 주춧돌은 모두 자연석 그대로 사용했다.
ⓒ 박종국
자연석

  
▲ 신씨고가 주춧돌3 7칸 기둥 주줏돌 모두 각기 다른 형태의 주춧돌이다.
ⓒ 박종국
기둥

  
▲ 안채 부엌 기둥 주춧돌 신씨고가 7칸 기둥 중 부엌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이다.
ⓒ 박종국
부엌기둥

신씨고가2는 19세기 중엽에 처음 지어진 이후 1940년대 크게 수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씨고가2의 경우, 안 사랑채가 없어지고 안채 사랑채벽채 곳간채 문간채 등 모두 5채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 집은 상류주택의 보수성과 민가의 실용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부농주택이다.

 

  
▲ 신씨고가2 사랑채 신씨고가 맞은 편에 있는 또 다른 신씨고가 살림집 사랑채
ⓒ 박종국
사랑채

  
▲ 신씨고가2의 안채 신씨고가와 잇닿아 있는 신씨고가2의 안채모습
ⓒ 박종국
안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안 대문을 달아 전통적인 내외법을 고수했지만, 곳간채는 안으로 들이고 안마당은 넓게 잡아 집안 대소사와 작업공간을 두루 쓸 수 있게 배려하였다. 안채와 사랑채는 기단과 지붕을 낮추어 권위주의적 표현 대신 경제성을 추구하였으며, 벽장과 받침대를 많이 달아 쓸모를 늘였다.

 

별채는 사랑채와 등지게 배치하여 독립성을 높였다. 이 집은 근대기 남부지역 부농주택의 대표적인 특징을 고루 갖춘 집이다. 한때 ‘만석꾼’으로 불리던 옛 부잣집, 세월의 부침은 어쩔 수 없는 듯 조촐해 보였다.

 

  
▲ 신씨고가 1,2의 모습 신씨고가는 각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신씨고가1)와 제 354호(신씨고가2)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웃해 위치한다. 위쪽의 신씨고가는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나, 아래쪽의 신시고가는 그렇지 못하다.
ⓒ 박종국
문화재자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미디어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