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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념으로 무치기 직전의 '솎음배추' 봄여름은 말할 것도 없고, 가을철에도 입맛이 깔갈할 때는 '겉절이비빔밥'이 최고다. 겉절이 재료로는 상추나 열무, 솎음배추 등 다양하다. 때문에 겉절이는 소금 밑간을 해서 담은 일반적인 김치와는 또다른 맛이다. 특히 구수한 된장국을 한 숟갈 얹어 비비는 비빔밥의 맛은 상상을 초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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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비빔밥하면 '전주비빔밥'을 떠올리고, '진주비빔밥'을 그에 대적한다. 이는 마치 냉면하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손꼽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즘 햄버거와 피자, 인스턴트 음식에 입맛을 점령당했을 거라고 여겼던 교복 차림의 학생들에게 커다란 양푼에 담긴 비빔밥이 인기다. '들밥'이라곤 구경도 못해봤을 어린 학생들,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양푼에 숟가락 섞어가며 먹는 '양푼이 비빔밥'의 맛은 무엇일까?
비빔밥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중국, 일본에도 비빔밥은 없다. 특히, 외국인들이 즐겨 먹는 한국음식 중의 하나가 비빔밥이다. 예전에 마이클 잭슨이 우리나라에 오면 비빔밥을 자주 먹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유럽이나 미주 간을 운항하는 비행기 기내식 중에서 서양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우리 음식이 비빔밥이다. 외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김치나 불고기지만, 그들의 눈에 이 음식들이 요리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음식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밥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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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솎은배추를 씻어놓았다 겉절이를 하기 위해서 솎은배추를 찬물에 씻어 소쿠리에 받혀두고 물기를 빼고 있다. 바짝 말라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물기를 흥건하게 묻은 배추를 겉절이하면 물기가 묻어나서 상큼한 맛을 잃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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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비벼 먹기를 좋아하는 나는, 콩나물을 주재료로 하는 전주비빔밥, 숙주나물에 선짓국을 곁들이는 진주비빔밥, 잘게 썬 김치 위에 쌀을 앉혀 밥을 짓는 해주비빔밥 등을 좋아한다. 각 지방의 자연 환경과 특징이 담겨 있는 ‘비빔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집에서 이와 같은 비빔밥을 즐겨 먹는다는 것은 어렵다. 비빔밥을 제대로 만들려면 갖은 재료를 다듬고, 양념하느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때문에 비빔밥은 반찬이 마땅치 않을 때는 으레 이것저것 넣고 대충 비벼 먹는다. 밥 위에 반찬 몇 가지 얹어 고추장 넣고, 참기름 조금 떨어뜨려 쓱쓱 비비기만 하면 뚝딱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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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절이 양념 볼에다 겉절이 양념을 만들었다. 주재료는 액젓 1숟가락, 양조간장 2숟가락, 재래간장 조금, 참기름, 깨소금, 마름고춧가루 적당량, 홍고추는 잘게 다지고, 식초를 몇 방울 뿌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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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비빔밥의 비법은 바로 철마다 나오는 신선한 채소에 있다. '겉절이'다. 봄에는 향긋하게 돋은 상치, 여름에는 풋풋한 이파리를 가진 열무다. 바람결 서늘한 이즈음에는 '솎음배추'를 최고로 챙겨먹는다.
솎음배추는 가을배추를 심고 보름쯤 지나 밭고랑마다 잰걸음으로 다니면서 솎아낸다. 물론 그런 수고로움이나 번거로움을 겪지 않으려면 별도의 텃밭에다 그냥 흩어 뿌려 놓으면 솎아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날 한시에 씨앗을 뿌려놓아도 키 자람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솎음배추겉절이'는 이른 아침 해가 돋을 즈음에 솎아야 싱싱하다. 웃자란 놈부터 먼저 솎아낸다. 전체 솎음배추를 순차적으로 가꾸는데 꼭 필요하다. 개중에는 배게 자란 것을 과감(?)하게 솎아내야 한다. 한 곳에 지나치게 많은 배추가 자라면 잎이 실하게 자라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줄기만 껑충 자라 겉절이로 씹는 맛이 떨어진다.
특히 요즘과 같은 계절에는 솎음배추밭에 물을 주어야하는데(그 이유는 배추줄기가 질겨지지 않는다), 아침나절보다는 해질녘이 좋다. 무엇이든 거저 얻어지는 것이라곤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만한 수고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 소쿠리 솎아 온 배추는 곧바로 다듬어야한다. 다듬을 때는 밑동만 자르고 겉잎을 제외한 모두를 겉절이로 사용한다(겉잎은 따로 데쳤다가 나물로 무치거나 국거리로 대체한다). 양이 많다 싶으면 속내 잎은 버려도 좋다. 하지만 나의 경우 솎음배추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이렇게 다듬어진 솎음배추는 찬물에 휘젓듯이 씻어 소쿠리(대소쿠리면 금상첨화다)에 받혀 물기를 뺀다. 그 까닭은, 겉절이를 할 때 물기가 너무 많은 재료를 사용하면 나중에 물이 흥건하게 묻어나서 제 맛이 안 난다.
다음 차례는 겉절이 맛을 좌우하는 '양념준비'다. 우리 집 겉절이 양념비법은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았다. 어머니는 박씨 종갓집에 열여덟에 시집와서 특유의 음식비법을 지니셨다. 어머님으로부터 그 노하우를 전수 받는 데는 많은 세월흐름이 필요했다. 왜냐? 음식 만드는 비결은 그냥 말로써, 글로써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손맛과 입맛에 따라 달다지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장맛이나 젓갈 등 전통음식을 대대로 전수받고 있는 종부(宗婦)들을 만나보면 열에 아홉은 어머니 시어머니로부터 직접 전수 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그게 맛깔스런 음식을 만들어내는 비법이다.
우리 집 양념 비결은 간장과 된장, 젓갈(액젓)에 있다. 간장과 된장은 직접 담아서 해묵은 것을 쓴다. 젓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젓갈은 그냥 쓰지 않고 걸러서 사용한다. 그래야 김치를 담거나 다른 양념으로 사용할 때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젓갈을 걸을 때는 반드시 한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젓갈 찌꺼기가 남지 않고 맑은 젓국을 얻을 수 있다.
'솎음배추겉절이 양념'은 5인분 기준으로 액젓(한지로 걸러 둔 액젓) 1 숟가락, 양조간장 2 숟가락, 재래간장 조금, 참기름, 깨소금, 마른고추가루 각각 조금 넣고, 붉은 고추(가을빛 나는 지금의 홍고추는 보약이다)를 잘근잘근 다져넣고, 식초를 적당량 떨어 뜨려 박박 문지르지 말고 조물조물 무쳐낸다.
이때 간을 보아야 하는데, 겉절이는 소금에 절인 채소처럼 밑간되어 있지 않기에 싱겁고 짠 정도로 곧바로 맞춰야한다. 새콤한 것을 좋아 하거나 매콤한 것을 즐긴다면 그 취향에 따르면 된다.
이제 남은 것은 고슬고슬하게 뜸이 잘 돌은 밥으로 비비는 차례, 절로 군침이 도는 시간이다. 먼저 널찍한 대접에다 적당량의 밥을 퍼 담는다, 대개 반 공기 정도면 충분하다. 비빔밥은 거십(비빔밥에 올려놓는 갖고 나물 종류, 경상도 방언)이 많이 넣어야 더 맛이 좋다. 그리고 나서는 두어 번 뜨거운 밥의 열기를 식혔다가 준비된 재료(솎음배추겉절이)를 얹어 젓가락으로 비빈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비비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비빔밥을 숟가락으로 비비는데, 그것은 온당치 않은 고정관념이다. 비빔밥은 젓가락으로 솔솔 비벼야 한다. 그래야 밥알에 양념이 골고루 묻고, 갖은 재료들의 제각각 향기와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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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은 양념으로 겉절이 무치기 준비된 양념으로 '솎은배추'를 무친다. 이때 주의해야할 것은 박박 문지르지 말고, 조물조물 만지듯이 무쳐야한다. 그래야 배추의 싱싱함이 그대로 살아난다. 그게 겉절이의 생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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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친 겉절이를 담아놓은 모습 갖은 재료를 손(겉절이는 매손으로 무쳐야 제 맛리 난다.)으로 조물조물 무친 겉절이를 그릇에 담아놓았다. 싱싱함이 살아있는 모습이 먹음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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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솎음배추겉절이'로 포만감을 맛보았다. 비록 전주비빔밥이나 진주비빔밥의 명성에 근접도, 비견도 못하는 '조촐한' 음식이지만, 그래도 나는 겉절이비빔밥을 자신한다, 세상 단하나 뿐인 이 노하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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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은 재료를 올려놓은 밥 겉절이 이외에도 반열무김치, 쪽파무침, 지리멸치무침, 고춧잎무침, 된장국 등속을 함께 올려놓았다. 젓가락으로 비비기 직전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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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젓가락으로 비벼놓은 비빔밥 갖은 재료를 넣어 젓가락으로 비벼 놓은 비빔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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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싱싱하게 살 오른 전어가 최고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의 비빔밥 예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상 모든 비빔밥에는 가용할 수 재료를 다 넣을 수 있고,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어우러지는 맛이 다 다르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재료를 수용했어도 비빔밥은 각각의 재료가 서로의 맛을 다치지 않고 제 맛이 난다. 이는 우리 삶과 닮아 있다. 그게 우리 집 비빔밥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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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절이는 '밥 도둑' 비비자마자 한순간에 밑바닥을 보인 비빔밥 그릇, 그 어느 비빔밥에 견줄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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