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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3일 오후 6시 10분 경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에서 하병수 옹을 만났다. |
ⓒ 박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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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영산 신씨 고가'를 답사하고 오는 길에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에 들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이어서 시간에 쫓겨 그냥 초가만 보고 갈 요량이었다. 근데 초가 입구에 있는 안내표지판이 새 얼굴로 바뀌었고, 문간채도 다시 손을 봤는지 황토방벽에다 햇억새를 이고 있어 샅샅이 훑어보고픈 마음이 동했다.
그새 초가에 이르는 길은 많이 변해 있었다. 소화전(소방)공사를 한 탓에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스럼 난 아이 이마처럼 군데군데 잔디가 헐었다. 그나마 한그루 파초만큼은 예전 그대로 탐방객을 맞았다. 한참을 새로 지은 문간채를 살펴보고 있는데, 안집의 개가 심하게 짖었다. 객쩍은 사람이 무시로 드나들기 때문이었을까. 소리와 함께 하병수 옹께서 거처에서 나오셨다. 넙죽 인사를 드렸더니 반갑게 맞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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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끔하게 새로 단장한 하씨초가 문간채 지난해 1월 29일 '창녕 술정리 하병수 초가는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
ⓒ 박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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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께 초가를 찾아온 목적을 말씀 드렸더니 선뜻 안내를 자청하셨다. 먼저, 그동안 진행되었던 초가명칭변경과 소화전 공사, 그리고 초가에 이르는 잔디보식작업에 대해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 주셨다.
근데, 마침 노인정에 들러 약주를 한 잔 하신 뒤라 불콰한 안색이었다(이 점에 대해서 하 옹께서 양해를 구하셨다). 그리고 대화는 미리 질문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해서 그때 상황에 따라 질문하고 설명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답사기는 사진 그림을 바탕하여 하병수 옹의 말씀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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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간채와 잇닿은 대문 뒤엔 하병수 옹이 거처하는 살림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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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선생님께서는 어디(기와집과 초가)에 거처하시는지요?
"응, 지금 나와 아내는 초가 앞에 있는 기와집에서 주로 거처하고 있어. 살림집이지. 초가는 1967년에 중요민속자료(전통가옥) 제10호로 지정되었어. 강릉 오죽헌이 1965년에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고 나서 두 번째였지. 오죽헌이 99칸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데 비해, 하씨 초가는 3칸 초가야.
근데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데는 하씨 초가 특유의 세 가지 건축 특징 때문이었지. 그건 좀 있다가 초가로 가서 설명할게. 내가 어디에 거처하느냐고 물었지. 우리 가족은 살림집에 살지만, 나는 초가에 자주 머물러. 왜냐면,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금방 망가지기 때문이지."
- 여러 자료를 통해서 초가에 대한 것은 사전지식으로 대략 알고 있습니만, 선생님께서 초가에 대한 평소에 갖고 있는 소회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잠시 생각에 잠기듯 하다가 이윽고) 그래. 평소 초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고 있어. 그게 뭔가 하면 말야. 이 초가는 엄연히 하씨 종손인 내 소유로 되어있지만, 난 내 것으로 여기지 않아. 가뜩이나 전통가옥이 사라지고 없는 이때, 그나마 우리 지역에서 반듯한 초가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그 자체가 나의 자부심이야. 잘 보존해서 함께 나누어야 된다고 생각해(이 대목에서 하옹께서 특히 목소리를 높이셨다). 그래서 애착이 더 많아.
문화재청이 지난해 1월 29일 '중요민속자료(전통가옥) 지정명칭 표기기준'을 마련했다고 연락 왔어. 그래서 '창녕 하병수씨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0호)'은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명칭이 변경 됐어. 잘 됐다고 생각해. 버젓이 내 이름으로 알려지는 것보다 하씨 초가로 세상에 드러나는 게 당연한 것이지.
지금까진 통일된 기준 없이 해당 가옥 소유자의 이름을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하는 관습에 따라 그렇게 지정했지만, 문화재의 역사와 유래, 특징 등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이에 문화재청은 '소재지, 가옥명칭, 고택 및 고가 등의 순서'로 전통가옥의 명칭을 표기한 거야. 표기기준안에 1차로 적용되는 전통가옥은 모두 22채였는데, '창녕 하병수씨 가옥'은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월성 손동만 가옥'은 '양동 서백당', '파장동 이병원 가옥'은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등으로 각각 명칭이 변경됐어. 문화재청에서 잘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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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는 중요민속자료(전통가옥) 제10호로 지정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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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씨 초가는 건축기법에 있어 어떤 특징이 있으며, 그 비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이것이다'하고 내세울 만한 건축기법상의 특징이 있지. 초가를 그냥 맨눈으로 보면 전국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만 안목을 갖고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 여타 전통가옥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어. 세 가지야. 하씨 초가가 집이 화려하고 웅장해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아니야. 집을 지을 때 특수한 공법을 사용한 것이지.
먼저, 집을 지으면서 기둥은 모두 도끼로 쪼아서 만들었고, 거기다가 못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어. 그게 하씨 초가가 오늘에 있게 한 건축비법 중의 하나야. 다음으로 지붕을 이을 때 한옥기와는 '알매'(방언)라는 흙채를 사용하는데, 하씨 초가는 지붕에 흙이 없어. 모두 대쪽으로 엮어서 지붕틀을 만들었지. 그게 두번째 특징이야.
그리고 마루를 봐. 마루 윗면만 땄을 뿐 통나무를 통째로 이어놓았어. 물론 언뜻 보고 가는 이들은 지붕으로 얹어놓은 억새만 보고 가지. 그러나 억새지붕은 하씨 초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그것만으로 문화재로 지정됐겠어. 어림없지. 억새지붕으로 지은 집은 전국에 걸쳐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내 설명을 들었다면 자네 눈으로 직접 보게."
- 선생님, 지붕을 이은 억새는 어디서 구하나요? 그리고 억새를 이엉을 엮듯 엮었을 텐데 그 방법을 알려주세요.
"5~6년 전까지만 해도 지붕을 이는 억새 전량을 인근 산막리늪(현재 창락초등학교 부근)에서 가져왔지. 하지만 지금 그곳은 모두 논으로 변해버려 억새가 없어. 그래서 우포늪에서 조달했지만, 람사르총회 땜에 더 이상 채취를 못하고 있어. 그래서 근래는 합천 황매산 일대에서 구하고 있다네. 그런 까닭에 예전에는 전부 억새를 사용했지만, 요즘은 억새만 사용하지 않고 억새와 산죽을 반반으로 해서 엮어.
3칸 지붕을 억새로 이는 데는 1마름에 8m로 봐서 전체 329마름이 필요해. 마름을 짧게 하면 지붕을 이을 때 파지가 나와서 지붕 모양새가 안 좋고, 그렇다고 길게 엮으면 무거워서 못 들고 올라가. 그땜에 적정 길이를 정했는데, 8m가 적당해.
지붕의 억새는 한번 이으면 그 수명이 6년이지만, 용마루는 억새를 꺾어서 비틀어 엮어야 하기 때문에 수명이 고작 2년에 지나지 않아. 그만큼 용마루는 빨리 삭아 버리지. 한데, 더 큰 걱정거리는 세월이 갈수록 억새지붕을 이을 사람이 없다는 거야. 일꾼을 사서 일일이 내가 가르쳐주고 지붕을 이고 있는 실정이야. 전수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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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씨 초가의 건축기법의 하나로, 지붕에 흙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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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씨 초가의 또 다른 건축기법은 마루에 있다. 통나무 윗면을 도끼로 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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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씨 초가의 건축비법의 또다른 특징은 지붕에 억새를 얹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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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고추와 푸성귀가 심겨 있는 서편 텃밭에는 예전에 어떤 건물이 있었나요?
"그곳은 골방과 디딜방아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야.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내 눈에는 그곳 골방과 디딜방아가 선연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는 그것들이 그곳에 있었어. 이리 와 보게나. 이것이 디딜방아 '호박(일종의 절구통)'이고, 저것은 '보싯돌'이야.
일반적으로 나무로 만드는데 우리 것은 청석으로 만들었어. 집뒤가 당산이라 그곳에 청석이 많았거든. 그것으로 갈고 쪼아서 만든거지. 보싯돌은 디딜방아 공굿돌을 거는 장치야. 언젠가 복원하려고 여기에 고이 간직해 두었지. 내가 힘이 닿을 때 예전처럼 다시 지어야 하는데 자꾸 세월만 덧없이 가네. 그게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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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병수 옹이 고이 보관하고 있는 디딜방아 호박(절구통) 하병수 옹은 초가 서편에 있는 텃밭에서 예전의 골방과 디딜방아를 복원해야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히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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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디딜방아 하병수 옹이 디딜방아의 한 장치인 '보싯돌'을 가리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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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씨 초가 뒤란에는 억새로 엮은 지붕이엉이 보관돼 있다. 이는 지붕 보수용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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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경우 초가에 들르면 앞뜰만 보고 갔습니다. 그런데 뒤란도 앞뜰 못지않게 잘 정리되어 있네요. 여긴 무엇이 있나요?
"흠,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여긴 일종의 골방과 같은 곳이야. 초가의 자잘한 흔적들을 모아두는 곳이지. 매년 장맛비와 태풍이 들이닥치고, 빗물이 스며들어 삭은 게 많아. 그래서 쪽문과 기둥 일부로 보수했어. 여기 봐. 새로 단장한 흔적이 보이지. 근데 그것을 자세히 봐. 다른 가옥의 기둥과는 다르지.
그게 하씨 초가 기둥을 만든 비결이야. 통나무를 가져다가 도끼로 기둥을 다듬었어. 전혀 대패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손도끼만으로 기둥을 만들어 세운 거지. 요즘 사람 같으면 그런 작업을 안 해. 전기 대패로 한 번에 드르륵 반듯하게 갈아 버리고 말지. 그래서는 기둥이 오래 가지 못해. 모든 게 '빨리 빨리' 만든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지. 그 덕분에 하씨 초가는 갖은 비바람에도 끄떡하지 않고 긴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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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씨 초가 뒤란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 하병수 옹 그저그런 눈으로 볼 때는 감춰진 공간을 볼 수 없다. 하씨 초가 뒤란에는 또 다른 비법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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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하씨 초가에 대한 보존과 골방과 디딜방아 복원 등 일련의 계획이 있다면 밝혀주세요. 이외에도 방문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골방과 디딜방아는 경상남도 문화재 관리국과 상의해서 일을 추진할 거야. 복원계획이 잡혀 있어. 다행이야. 그런데 별 욕심이 없어. 그저 이 하씨 초가가 내 개인 소유물이란 개념보다는 여럿이 함께 나누었으면 해. 특히 자라는 학생들에게 전통가옥에 대한 산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네. 그리고 찾아 오는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참고자료에 의거해서 그저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좀 더 밀착해서 초가의 건축기법을 바르게 챙겨 보았으면 해. 무엇보다도 요즘 사람들이 옛것에 대한 애정이 깊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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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로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 동안 하씨 초가에 대해 설명해 주셨던 하병수 옹. 전통가옥, 하씨 초가에 대한 애착이 유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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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 초가 서편, 그러니까 예전에 골방과 디딜방아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난수밭'(텃밭)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고추, 가지, 결명자, 해바라기, 쪽파가 파릇하게 대궁을 드세우며 자라고 있었고, 호박 넝쿨이 담을 타고 있었다. 줄 처진 가장자리에는 맨드라미가 한가하게 가을풍경을 그려냈다.
언젠가 골방과 디딜방아가 복원될 것이다. 그때 다시 찾아 보고 싶다. 손수 집앞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시는 하병수 옹의 손을 부여잡고 변함없는 건강을 기원했다. 하 옹의 말씀처럼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가 영원토록 보존되어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그름에 하씨 초가 앞으로 우뚝 서 있는 '술정리 동삼층석탑'에 애애한 가을노을이 고즈넉하게 물들었다. 일간 하병수 옹을 다시 만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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