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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석리 성씨 고가 전경 창녕 석동마을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해 꺾어들면 '석동성씨고가'가 있다. 성씨 고가는 현재 큰집, 둘째, 셋째, 넷째집으로 이루어진 1만평 남짓하다. 이 고가는 1920년대 일본강점기에 지었는데, 전통약식에 약간의 변형이 가미된 특이한 한옥이다. |
ⓒ 박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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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7일), 창녕술정리동삼층석탑을 답사하고 우포늪 가는 지방도 중간에 있는 창녕군 대지면 석동마을 '창녕성씨고가'를 찾았다.
마을 앞은 광활한 들판, 길 양옆으로 줄지은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반겼다. 예전에 이 들판은 양파를 지천으로 심었으나, 지금은 중국산에 밀려나 수익성 있는 마늘을 더 많이 심는다. 양파 시배지 기념탑에 들어서니 한옥 십여 채가 보인다. 예전 부호의 세거지란 걸 단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곳이 바로 창녕 석리 성씨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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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양파 시배지 기념비 우리나라에서 양파를 맨 처음 재배한 곳(창녕 석동 성재경)이 창녕 '석동마을'이다. 그것을 기념해서 창녕 성씨 고가 옆에다 세운 기념비다. 이 기념비는 창녕에서 양파 재배에 힘써 창녕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이끌었던 <사단법인 경화회(耕和會)가 세웠다. 오석 위에 두 손이 양파를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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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다. 평소 성씨 고가는 철책으로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지붕이 허물어져 내린 안채 복원을 하고 있는데, 오늘 상량식을 하는 날이었다. 마당에는 성씨 대종이 모여 안채의 상량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집안 곳곳을 샅샅이 훑어 볼 수 있었다. 사진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찍었다. 언제 다시 '성씨 고택'이 개방될지 기약을 할 수 없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 한옥촌이 형성된 것은 1850년쯤. 성씨 문중 입향조인 성규호옹이 터전을 마련했다. 창녕에서는 '성부잣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지난 1953년 일본에서 양파 씨를 갖고 와 창녕에서 재배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성재경씨의 생가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씨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창녕성씨 전통가옥이다.
성씨 고가는 현재 큰집(일신당·日新堂), 둘째(아석헌·我石軒) 셋째(석운당·石雲堂), 넷째(경근당·慶勤堂)의 집으로, 본채와 별당으로 1만 평 남짓하다. 그 중 셋째의 집은 썩은 목재를 교체하는 등 1999년에 복원됐다. 이 집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었는데, 전통양식에 약간의 변형이 가미된 특이한 집이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화장실을 외따로 지었다. 근데 이 집은 출입문이 바깥으로 나있어도 화장실은 안채 지붕 아래 함께 있다. 또 일반적인 고가의 대청마루는 여름철 시원함을 주는 공간으로 마당과 탁 트여 있지만, 이 집은 대청마루와 안마당 사이에 유리창이 끼인 열 창문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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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 고가 솟을대문 종갓집의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 대문이 가로막는다. 행랑채 머슴들의 생활공간과 안채 상전 생활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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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기웃거리자 행사에 참가했던 문중 어른 한 분이 안내를 자청하셨는데 마다하고 혼자 집안 곳곳을 쏘다녔다. 솟을대문 달린 종갓집, 연이어 세 집이 붙어 있는데 중문(中門)으로 다 이어져 있다. 솟을대문과 중문 등에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한 의미로 붙은 '지네철'이 있었다.
종갓집의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 대문이 가로막는다. 행랑채 머슴들의 생활공간과 안채 상전 생활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돼 있다. 솟을대문은 열 때 소리가 요란하게 열려야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야 안채 주인도 그 소리를 듣고 사람을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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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숲에 휩싸인 후원 후원은 상당히 큰 규모의 정원으로 볼거리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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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대문을 들어서면 이 한옥촌에서 가장 압권인 풍광이 내방객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무릉도원 뺨치는 종가의 정원이다. 여느 한옥의 정원과 배치 구도가 다르다. 통상 한옥의 정원은 건물 중앙에 두지 않는다. 거의 후원 개념으로 한쪽으로 밀쳐둔다. 이건 일본 등 외국 정원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왼편 연지도 원형으로 하지 않았다. 한반도 모양으로 파놓아 만든 이의 세심함과 정성이 묻어 있다.
수심은 개구리밥으로 덮여 있어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4m쯤 될 것 같다. 서울 지점에 석탑을 쌓고 봉우리에 70㎝ 남짓한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이밖에 배롱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측백나무, 단풍나무, 천리향 등 20여 종의 수목이 원형으로 도열해 있고 그 복판에 십자로를 냈다. 돌확처럼 보이는 석물이 몇 개 눈길을 끈다.
성씨 고가에서 눈여겨 볼 것은 마루와 지붕이다. 툇마루, 쪽마루, 눈썹마루, 대청마루 등이 전통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청으로 쉽게 잡고 오를 수 있도록 말린 죽순 손잡이를 매달아 뒀다.
또한 평주와 고주기, 종도리,·판공대, 중보, 동자주, 대들보 등 집 내부와 천장을 하나하나 새롭게 보였다. 망와, 수막새, 암막새 등의 기와,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등의 지붕도 여느 고가와 달라보였다. 곡식과 음식을 보관하던 고방, 마당에 놓여진 떡돌, 절구 등을 보면서 한옥에 대해서 한꺼번에 많은 것을 보았다는 충만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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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원 툇마루 성씨 고가에서 눈여겨 볼 것은 마루와 지붕이다. 툇마루, 쪽마루, 눈썹마루, 대청마루 등이 전통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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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혼자 돌다가 마침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연만하신 문중 어른께서 말을 붙이셨다. 그래서 자연 화제는 성씨 고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말씀에 따르면 옛집, 그러니까 고택의 명당은 따로 놀지 않는 법이란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곳이 왜 풍수지리로 명당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수 있었다. 셋째 집 바로 뒤편 후원으로 가는 길에 푸른색을 띠는 얕은 암벽이 있고, 그 중간쯤에 황토가 있다. 또, 그것은 안채의 정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토는 땅의 혈이니 땅의 기운이 그대로 이집을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후원의 여러 볼거리도 소개해 주셨다. 후원은 상당히 큰 규모의 정원이다. 먼저 대나무 숲이다. 고택들에 대나무 숲은 은은함을 좋아한 선조들이 햇빛보다는 대나무 숲에서 나는 그 은은함을 좋아했기 때문이란다. 대나무 중에는 까만 오죽도 있었다. 안채(지금은 복원 공사 중) 쪽으로 조금 더 돌아가니 사당 바로 뒤편에 여러 개의 석등이 세월을 이기고 서있었다. 그 중 몇 개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있었다.
이 밖에도 후원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세숫대'였는데, '확대'라고 했다. 수도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었던 그 시대에 후원 곳곳에 무릎 높이의 돌에 둥근 모양과 복숭아 모양의 홈을 파서 물을 담을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둥근 모양은 남성전용이고, 복숭아 모양은 여성전용이었단다.
후원에는 연못도 있다. 그 형태가 보는 사람에 따라 지렁이를 본 딴 것으로도 보이고, 한반도를 본 딴 모양으로 보일 수도 있단다. 연못을 지렁이를 본 딴 것은 이 곳 터가 지네의 입에 해당하는 형상이 때문에, 그래서 지네가 좋아하는 지렁이를 본 딴 것이란다. 실제 이곳에는 지네가 많이 나왔다고 했다. 한반도를 본 딴 것은 일제시대 우석 성재경 선생이 고가 바로 앞에 '지양강습소'를 세워 4년 정도 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해 폐쇄되는 등 조선독립을 위한 활동을 했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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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원 뜨락에 있는 연못 이 고가의 정원에는 한반도 지도를 본따 만든 연못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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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성씨 고가는 여느 한옥촌과는 달리 한옥 전문가들에게 귀하게 대접받고 있다. 특히 풍수연구가들에게는 양택 명당으로 알려져 답사팀이 수시로 찾는다. 게다가 양옥 태동기와 한옥 쇠퇴기 어름에 조성돼 한국 한옥 발달사의 후미를 장식, 보존가치가 인정돼 2004년 7월 14채 중 6채가 경남 문화재자료 355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6·70년대 이 마을도'이촌향도(離村向都)' 바람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생활거점이 서울로 이동함에 따라 자연 여기 한옥도 사람이 살 수 없는 정도로 퇴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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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상량식에 참여한 문중 어른들 오늘(음력 8월 8일)은 길일이라 안채 상량식을 거행한다고 했다. 안채는 9칸으로 복원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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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착한 상량 대들보 마침내 안채 상량 대들보가 제자리에 안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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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긴 분이 있었는데, 거기서 태어나 성장한 성기학(61) 영원무역 회장이 고사 직전의 한옥촌 살리기에 나선다. 영원무역은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로 유명하다. 벌써 13년 전 일이다. 그는 틈만 나면 한옥마을('한옥 컨퍼런스 센터') 복원사업이 한창인 현장을 찾는다고 한다.
성 회장은 고조부 때부터 일가친척들이 집성촌을 이뤄 살아온 이곳에 2만3000㎡(약 7000평)의 땅에서 220칸 규모의 실용적인 한옥마을 복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한옥마을 조성사업은 주춧돌만 남은 집터에 새로 한옥을 짓거나 낡아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기존 한옥을 개 보수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복원사업은 2년 후쯤 완공할 예정인데, 우선 2008년 10월 경남에서 열리는 국제습지협약인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에 참석하는 외국인들을 한옥마을에 초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씨 고택을 휘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우포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그새 해가 많이 짧아졌다.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하고 솟을대문을 나서니 확 트인 앞 들판에 찰랑찰랑 알곡 익어가는 소리가 정겹다. 지난 번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를 찾았을 때도 집터에 터 잡고 사는 분을 만나 세세한 설명을 들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발품을 잘 팔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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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 고가 모습 답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다시 되돌아 보았던 성씨 고가의 고아한 전경이다. 한 동안 철책으로 굳게 닫혔던 성씨 고가, 우연찮게 활짝 열린 공간에서 마음껏 휘돌아 볼 수 있어 두고두고 가뿐한 기분이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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