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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문근영 기부행위를 놓고 벌어지는 뜨악한 색깔논쟁

한국작가회의/오마이뉴스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8. 11. 2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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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문근영 기부행위를 놓고 벌어지는 뜨악한 색깔논쟁
  박종국 (jongkuk600

 

한해살이 중에도 가장 힘겨운 이때, 들쭉날쭉한 날씨로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겨우살이 체감온도는 한층 더 차갑다고 한다. 나라경제 탓만은 아니다. 이런저런 볼멘 사정이야 많겠지만, 그나마 자주 만났던 자원봉사자들도 부쩍 줄었고, 기부자들의 관심도 뜸해졌다고 한다.  

 

방송 여파도 크다고 한다. 배우 문근영 기부행위를 놓고 벌어지는 뜨악한 색깔논쟁이 일파만파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기부가 주춤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선행을 한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내팽개쳐짐을 당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섣부른 매도가 알게 모르게 좋은 일을 해왔던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문근영 기부행위를 놓고 벌어지는 뜨악한 색깔논쟁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으로 열연하고 있는 배우 문근영.
ⓒ sbs
문근영

뉴스로, 신문지면을 통해서, 때론 인터넷신문을 들여다보며 극히 놀랐다. 문근영 씨가 왜 연좌제를 당해야 하나? 연좌제란 본인이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친지나 남이 한 일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도 참혹한 연좌제의 틀을 들먹이고 있는가. 연좌제는 개인의 존재를 부정했던 봉건시대나 가능했던 악습이다.

 

근데, 왜 문근영 씨가 연좌제를 당해야 하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에서  시민은 개인으로 그 존재한다. 당연히 문근영 씨도 한 개인이다. 민주공화국에서는 연좌제가 없다. 왜냐? 모든 잘잘못은 개인의 잘못으로만 처벌받는다. 때문에 몇몇 보수논객들이 과거 ‘빨갱이 집안’인 것을 문제로 삼아 철저히 본인과 상관없는 연좌제로 얽어매려는 것은 너무나 빤한 트집이다.

 

아무리 색깔론, 반공주의라 해도 연좌제는 문제 있다

 

단언컨대 문근영 씨는 배우이기에 앞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다. 그래서 그런 그의 아름다운 기부는 보수주의, 반공주의, 색깔론의 연좌제의 덫에 지탄을 받아서는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좌파논객의 말마따나 “문근영의 선행이 선전되면 그만큼 빨치산 집안은 좋은 집안이라는 것이 동시에 선전되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일이니까” 이제는 좌파의 자손은 언론이 띄워줘서도 안 되고, 대중의 사랑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드러내놓고 선행을 하면 몰매를 맞아야한다는 주장이다.

 

대체 이런 억지논쟁이 어디 있으랴 싶다. 그다지 시대를 거슬려가며 따지지 않아도 연좌제가 사회적으로, 공인으로서 출세를 막았던 적은 있었다. 그 덫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빠져 평생을 음지에서 살았다. 그런데 순수 기부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연좌제를 빌미로 더 이상 착한 일을 보도하지 말라고는 것 또한 괜한 억지다.

 

순수 기부행위에 딴죽 걸지 마라

 

그렇게 따져들자면 대한민국에서 연좌제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우선 과거 좌익을 했거나 민주화운동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해당된다. 그들의 논지대로라면 이들 자손들과 당사자는 죽은 듯 살아야한다. 그뿐이랴. 영호남지역주의에 관련된 사람들도 모두 비주류로 단죄된 만큼 함부로 드러내놓고 선행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문근영 씨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무상보시(無相布施)로 아름다운 기부를 했지만 소용없다. 이제부터 역사적으로 비주류는 결코 찬사를 받아서도 안 되고, 언론에 부각되어서도 안 된다. 연좌제 색깔은 이미 빛바랬지만 그 억지논쟁은 드세다.

 

남을 도와주고 베푸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남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면서도 아무른 대가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베푼 행위가 내면세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런 것을 가리켜 '주는 마음도 없이 주는 것, ‘무상보시(無相布施)라 한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머무름이 없는 마음‘,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인 것이다. 특별히 수행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와 같이 살아가면서 가끔 '머무름 없는 마음'을 내는 경우가 많다. 문근영 씨가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남을 도와주고 베푸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주는 마음 없이‘, ‘남는 마음 없이’ 베풀어야

 

사실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 조그만 것 하나를 베푸는 데 주저하는 때가 많다. 이미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과 ‘좋은 일을 했다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의 내면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그것을 통해 스스로 상대에 대한 우쭐한 마음을 느낀다. 단지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보시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순수하게 상대를 위해서 한 보시가 아니다.

 

큰스님과 시봉하는 한 스님이 길을 가던 중 냇가에서 젊은 여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 여인은 큰스님더러 자기를 안아서 냇물을 건너달라고 했다. 그러자 큰스님은 아무 말 없이 여인에게 다가가 덥석 안아서 물을 건네준다.

그 후 한참동안 길을 가던 중 시봉 스님이 고심에 고심한 끝에 묻는다.

 “어떻게 스님이 젊은 여자를 안고 물을 건널 수 있습니까?”

그러자 큰스님께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 여인을 물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안고 있느냐.”

 

이 일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보시를 하되 마음에 남지 않게 보시를 하라는 뜻이다. 만약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나중에 정작 내가 어려워졌을 때 돕지 않는다면 누구나 ‘내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나를 돕지 않다니’ 하며 괘심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도와줬다는 생각을 보통사람은 다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마음을 가진 보시’다. 나눔에 있어서는 그런 생각이 없이 나눠야 한다. 

 

때문에 차가운 길거리에서 날밤을 새는 노숙자나 시설생활자, 거택보호자나 소년소녀가장에 대한 나눔에 있어 ‘주는 마음 없이‘, ‘남는 마음 없이’ 베풀어야 한다. 이런저런 사단으로 걸림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선행은 선행 그 자체여야 한다. 세밑이 코앞이다. 아름다운 기부문화가 더 이상 협잡을 꿈꾸지 않는 동반자 의식으로 여울졌으면 좋겠다.  

 

 

2008.11.21 16:17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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