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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증도 없는 소가 가출을 했으니

박종국에세이/단소리쓴소리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 23.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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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배꾸마당을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맑은 하늘 바람처럼 비 개인 후 달처럼

가슴 확 트인 새해 맞으시고

설날, 즐겁게 보내세요.

 

.......................박  종  국 드림...........................

 

 

[소가 꾸는 꿈]


주민증도 없는 소가 가출을 했으니… 어쩐단 말이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많이 지쳤잖아"


                                                                                                  - 김도연·소설가

 

지금은 길고 깊은 겨울밤, 우리 집 소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소와 함께 살아온 지 벌써 사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세월 속에서 장성한 자식들은 대부분 집을 떠났지만 부모님과 함께 소는 여전히 큰 눈을 껌뻑이며 외양간을 지키고 있네요. 물론 같은 소와 사십여 년을 산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와 개, 그리고 닭, 돼지, 염소들이 울타리 안 곳곳에서 살아왔지요. 그중에서 으뜸은 역시 소라고 해야겠지요. 장정 네다섯 명 몫의 농사일을 할 수 있는 가축은 소밖에 없으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개, 닭, 돼지, 염소가 어떻게 하루 종일 목에 멍에를 얹고 사래 긴 비탈 밭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기에 다른 가축은 굶겨도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소가 굶는 법은 없었지요. 아, 그렇다고 소가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가끔… 가끔 소도 사고를 칠 때가 있답니다.

사실 어린 시절 저는 소에게 유감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소보다 개를 훨씬 더 좋아했고요. 개랑은 함께 놀 수 있어도 덩치 크고 고집 센 소와 놀 수는 없었으니까요. 놀기는커녕 발이나 걸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의 불호령에 밀려 개울가에 매어놓은 소를 몰고 어두워질 때까지 꼴을 먹이느라 바빴지요. 소는 덩치에 걸맞게 무지막지하게 많이 먹습니다. 그만 먹고 집으로 가자고 아무리 고삐를 잡아 끌어도 말을 듣지 않았지요. 친구들은 마을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지만 저는 쇠똥 냄새가 풍기는 고삐를 잡은 채 파리나 등에를 쫓아야만 했지요. 소는 자기보다 덩치가 작은 아이를 얕보고 있던 터라 집으로 가자는 성화엔 아랑곳 않고 맛있는 풀을 따라가기 바빴지요. 엉덩이와 허벅지에 갑옷처럼 쇠똥을 다닥다닥 붙인 채. 세상에! 넌 어떻게 니가 싼 똥을 태연하게 매달고 다니냐! 창피하지도 않아? 하지만 아무리 놀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요. 소가 없는 집에, 농사를 짓지 않는 집에 살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소원일 뿐이었으니까요.

소와 이별한 것은 타지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부터입니다. 더 이상 작두로 꼴을 썰지 않아도 되고 쇠지랑물에 빠진 축구공을 건져내느라 코를 찡그리지 않게 되었지요. 자기 새끼를 팔았다고 사흘 밤낮을 목이 쉴 때까지 울어대며 공부와 잠을 방해했던 장본인도 바로 어미 소였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눈으로 먹을 것을 보채던 소. 바쁜 봄날 밭을 가는 일이 힘들면 한 번에 눌 똥이며 오줌도 서너 번에 나누어 누며 꾀를 부리던 것도 소였지요. 코뚜레를 잡고 끄는 제 엉덩이를 뜨끈한 콧물과 침으로 적시는 게 화가 나 조금 거리를 두면 소는 이때다 하고 바로 겅중겅중 달아났습니다. 저는 도리 없이 뒤에서 쟁기질을 하는 아버지의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지요. 달아난 소를 붙잡으려고 온 식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밭고랑을 뛰어다녔지요.


그뿐인 줄 아세요. 어느 밤엔 외양간에 묶어놓은 소가 고삐를 풀고 가출한 적도 있었답니다. 집을 나와 강릉과 서울을 잇는 국도변을 걸어가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까지 출동했었지요. 하지만 소에게 주민등록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출동한 경찰이 그 새벽에 오죽 당황했겠어요. 더군다나 그 경찰은 도시에서 자란 터라 소를 전혀 다룰 줄 몰랐다고 하니. 겁에 질린 경찰은 간신히 소고삐 끝을 붙잡고 소와 저만치 떨어져서 집집의 대문을 두드리고 다니며 수소문을 했다고 합니다. 혹시 이 소의 주인이 아니냐고. 그럼 이 소의 주인을 아느냐고. 고삐 하나 제대로 묶지 못하냐는 아버지의 타박을 듣고서야 저는 외양간으로 돌아온 소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왜 집을 나간 거야?"
"…."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소는 제 힐난에 대한 답 비슷한 것을 주었습니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다가 매일 밤 식은땀을 흘리며 잠드는 저의 꿈속으로 찾아와. 소는 여전히 저의 학교 가는 길을 막고 화난 얼굴로 씩씩거렸지요. 또 어느 때는 옛날 저를 골탕 먹이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한 채 싱글싱글 웃곤 했지요. 웃는 까닭이 뭐냐고 따지면 소는 어느새 어머니의 얼굴로 변해 있어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지요. 한동안 잊고 살았던 소가 왜 독한 땀 냄새를 풍기는 제 꿈속으로 찾아와 말을 걸고 시비를 거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요. 그 꿈들 속의 저는 어김없이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었지요. 꿈에서 깨어나면 정말로 소가 휘젓고 간 듯 작은 자취방은 난장판이나 다름없었지요.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지만 꿈 밖 어디에도 소는 보이지 않았답니다. 다음 꿈에 만나기만 하면 사투를 벌여서라도 그 소를 잡아 모두 설렁탕으로 만들어 질리도록 먹으리라 다짐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지."
"…뭐?"

이건 무슨 옛날이야기의 한 토막처럼 제 모습으로 변한 소가 건넨 말이었습니다. 이런 제기랄! 저는 소로 변해 있었지요. 사람으로 변한 소가 소로 변한 사람의 코뚜레를 끌고 있었답니다.

"근데 우리가 왜 뒤바뀌어 있는 거야?"
"너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왜?"
"…많이 지쳤잖아."
"고향집엔 절대 안 돌아갈 거야! 절대로!"
"왜?"
"…창피하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 코에 걸린 코뚜레가 코청을 세차게 끌어당겼습니다. 코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팠지요. 비로소 저는 인간이 소의 코에 왜 코뚜레를 달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소에 끌려 신산했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겨울밤입니다. 닭은 닭장에서 자고 개는 개집에서 잠을 잡니다. 당연히 소는 외양간에서 잠을 자지요. 지금 우리 집 외양간에는 두 마리의 소가 임신을 한 채 자고 있습니다. 조만간 귀여운 송아지를 낳을 거라고 하네요. 그러면 아버지는 고생했다고 가마솥에 미역국을 끓여 어미 소에게 먹이겠지요. 송아지들이 춥지 않도록 외양간 바닥에 짚을 푹신하게 깔아 주겠지요. 한동안 어미 소는 제게 새끼를 낳은 유세를 떨 것이 분명합니다.

뭐… 그렇더라도 기꺼이 참아야지요. 쇠똥도 치워주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젖을 먹는 송아지의 모습도 사진에 담아줄 생각입니다. 빚진 게 많으니까요.

"고마워."
"…."

소는 어둠이 고인 외양간에 엎드린 채 멀뚱멀뚱한 눈으로 저를 빤히 바라봅니다. 혹시라도 새끼를 낳지 않았을까 손전등으로 외양간을 살핍니다.

"내가 힘들 때마다 찾아와 준 거 정말 고마워."
"…."
"이제 말은 안 할 거야?"

눈 내리는 겨울밤, 방바닥에 엎드려 소설을 끼적거립니다. 가끔 외양간에선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소가 숨 쉬는 소리가 눈송이를 흔들며 길게 건너오네요. 하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 마을의 마지막 외양간인 이곳도 텅 비어버리겠지요. 더 이상 소가 밭을 가는 세상이 아니니까요. 조금 슬퍼지네요. 소처럼 방바닥에 엎드려 소가 더운 숨을 토해내며 밭을 갈 듯 긴 이야기를 끌고 밤을 건너갑니다. 소가 꾸는 꿈인가요?

 

출처조선일보 200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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