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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 두보도 평생 미끄러진 '과거'

박종국에세이/단소리쓴소리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3. 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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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 두보도 평생 미끄러진 '과거'
공정한 인재등용문? 역사발전 걸림돌?
[해외리포트] 1317년간 중국을 지배한 관리선발제도
  모종혁 (mtest)

  
랑중 촨베이공원의 지공당. 향시 감독이 정무를 보던 공원의 중심 사무실이었다.
ⓒ 모종혁
과거제

"과거(科擧)는 중국 문명을 발전시킨 중요한 제도였으나 세 가지 큰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문인으로 하여금 양다리를 걸치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갖추게 했다. 중국에서 문인에게 최고 가치는 관료가 되는 것이기에 '사상적 중립'이 요구됐다. 관료가 되기 위한 '기계적 중립'은 곧 문인의 비판 정신을 앗아갔다.

 

둘째, 사회에 투기 현상을 만연시켰다. 과거는 문인에게 10년간 고행하더라도 단 한 번 시험 합격으로 출세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정상적인 사회경제생활 속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한탕주의에 목을 매는 투기 심리는 과거제가 끼친 큰 해악이다.

 

셋째, 남을 시샘하고 증오하는 사회 병리 현상을 형성했다. 과거는 수많은 참가자 중 극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는 제한된 게임 룰을 지녔다.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은 평생 성공의 기회를 놓친 채 다른 대안을 못 찾고 분노와 울분 속에 살아야만 했다.

 

과거제가 낳은 이 세 문제점은 중국 문인에게 그릇된 인격 심리를 만들어 심각한 오류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 위치우위(余秋雨) '과거제를 논하며' 요약

 

1904년 7월 청나라 예부는 회시(會試)에서 뽑힌 272명의 공사(貢士)가 참여한 황제 주관의 전시(殿試)를 마지막으로 과거시험을 중단했다. 1905년 9월 청 조종의 실권을 장악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과거 폐지령'을 내렸다. 이로써 1300여 년간 이어져온 과거제는 정식으로 종언을 고했다.

 

과거는 587년 수나라 문제(文帝)가 처음 시행한 관리 선발제도다. 전근대 사회에서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한 나라는 극히 드물었다. 아시아에서도 중국을 비롯해 한국, 베트남 등 몇몇 국가에서만 실시됐다. 서구와 일본은 재력과 무력을 소유한 귀족 및 무사 계급이 지배했지만, 과거제 시행 국가에서는 문인이 득세했다.

 

2004년 8월, 과거제 중단 100주년을 맞아 중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평론가인 위치우위는 쓰촨(四川)성 랑중(閬中)시를 방문했다. 그가 랑중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원형 그대로 남은 양대 공원(貢院) 중 하나인 촨베이(川北) 공원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랑중시정부는 위치우위의 내방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위의 방문을 통해 촨베이 공원을 포함한 랑중의 유서 깊고 다양한 역사유적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랑중시정부의 바람과 달리, 위는 과거제가 낳은 중국의 비극을 매섭게 비판했다.

 

  
명청시대 민가가 잘 보존된 랑중고성. 랑중은 역사유적이 풍부한 중국 4대 고성 중 하나다.
ⓒ 모종혁
과거제

  
촨베이공원 입구. 난징의 장난공원과 더불어 중국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과거 시험장이다.
ⓒ 모종혁
과거제

과거, 1317년 간 시행된 세계 최고의 관리 선발제도

 

과거는 중국 봉건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생활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제도다. 중국에서 과거제는 공식적으로 1317년 동안 시행됐다. 하지만 과거의 기원은 한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65년 한문제는 주(州)에서는 한 명의 수재(秀才)를, 군(郡)에서는 인구에 따라 일정 수의 효렴(孝廉)을 추천케 하여 수도에서 시험을 치러 관리에 임명하는 찰거제(察擧制)를 실시했다. 220년 위나라 때는 이를 한층 발전시킨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가 시행됐다. 구품중정제는 출신 가문과 상관없이 개인의 재능과 품성에 따라 관리를 선발코자 하는 취지였다.

 

우선 지방의 각 군마다 중정(中正)이란 관리를 선정하여 군내 관리에 대한 재능과 덕행을 조사했다. 이를 통해 관리를 1품에서 9품으로 나눴는데, 향품(鄕品)이라 했다. 중앙에서도 관료의 등급을 1품에서 9품까지 구분했는데, 관품(官品)이라 했다.

 

구품중정제에서는 관품이 향품에 의해 결정되었기에 중정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다. 초창기에는 왕실의 권력 강화와 숨은 인재 발탁에 도움이 되었으나, 갈수록 중정에 지방 유력자가 임명되어 폐해가 드러났다. 향품을 정할 때 호족가문의 자제에게만 후한 평가를 내리고 집안 배경이 없는 사람은 박한 평가를 매긴 것. 결국 자의적이고 정실에 흐르기 쉬웠던 구품중정제는 귀족계급에게 유리하게 돼 유명무실해졌다.

 

갈라졌던 중국 남북을 통일한 수나라는 정국 안정을 위해 우수한 관료 양성이 시급했다. 고심하던 수문제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고 객관적인 시험제도인 과거제를 창안해 우수한 인재를 모았다. 수·당대 과거에서는 정치학을 다룬 수재(秀才), 유학을 시험한 명경(明經), 문학을 겨룬 진사(進士) 등 과목을 두었다. 그중 명경과와 진사과가 가장 선호되었는데, 특히 진사과에서 유명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진사과는 두 단계로 분류되어 진행됐다. 먼저 주현(州縣)에서 향시가 시행되어 향공(鄕貢)진사를 뽑았다. 향공진사는 수도로 올라가 중앙 대학인 국자감(國子監)에서 선발된 학생과 함께 공거(貢擧)를 치러야 했다. 궁정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태종은 공거에 몰려든 수재를 바라보곤, "천하의 인재들이 이제 내 품 안에 들어왔다"며 기뻐했다.

 

송나라 때는 여러 과목을 폐지하고 진사과로 통합했다. 고급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던 진사는 황제 앞에서 다시 전시를 치러 등급이 나뉘었다. 중국 봉건왕조의 절정을 이룬 명나라는 과거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지원자도 많아 단계를 더욱 세분화했다. 크게 동시(童試)·향시·회시·전시 등 네 단계로 나눠는데, 이를 통과한 사람도 생원(生員)·거인(擧人)·공사·진사 등으로 구분했다.

 

동시는 과거의 첫 단계로 천민을 제외하고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에 참가한 사람을 연령을 불문하고 동생(童生)이라 불렀다. 시험 장소는 단계적으로 올라가, 동시는 현과 부(府)에서, 향시는 성도(省都)에서, 회시와 전시는 수도에서 거행됐다.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시에 있는 천년 역사의 유에루(嶽麓)서원. 중국의 서원은 강학(講學)을 통한 학술발표장이자 과거시험 준비장의 성격이 짙었다.
ⓒ 모종혁
과거제

  
베이징에 위치한 국자감 안에 있는 공자상. 국자감은 수당시대 최고 교육기관으로 과거 응시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다.
ⓒ 마러
과거제

평등 지향했으되, 창조적 사고는 막았으니

 

과거시험의 단계가 다른 만큼 수석 합격자를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 향시, 회시, 전시에 1등한 사람은 각각 해원(解員), 회원(會員), 장원(壯元)이라 불렀다. 전시의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라 했고, 향시·회시·전시에서 모두 1등한 사람은 연중삼원(連中三元)이라 칭했다.

 

중국 역사상 776차례의 과거 시험이 시행되어 646명의 장원을 탄생시켰다. 이 중 연중삼원은 단 6명에 불과했다. 과거가 남성의 전유물이긴 했지만, 유일한 여성 장원이 한 명 나타나기도 했다. 남녀가 모두 과거에 참여할 수 있었던 태평천국운동 시기인 1853년 과거에서의 장원 부선상(傅善祥)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과거의 급제와 낙제는 한 사람의 운명을 가름 지어 중국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실제 과거제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중국 문학과 사상을 변천시켰다. 당시(唐詩)와 송사(宋詞)라는 문학적 변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과거 시험의 선발 중점이 바뀌면서 문학의 형식까지 변한 것이다. 팔고문(八股文)으로 상징되는 정형화된 형식주의는 중국 문인의 사상을 구속했다.

 

팔고문은 명청시대 과거제에 쓰였던 문체로, 과거의 당락을 좌우했다. 문체 속에 고정된 격식인 팔고문의 제재는 모두 사서(四書)에서 따와 반드시 주희(朱熹)의 주석에 입각해 글을 써야 했다. 결국 과거제는 한 편의 팔고문에 부연하는 것 외에 다른 사상이나 지식을 용납하지 않아서, 시험에만 능하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고를 부족한 인간형을 양산했다.

 

과거제는 위대한 시인을 절망에 빠뜨리기도 했다. 당대 과거에서는 감독관이 과거 응시자의 재능과 명성을 조사한 뒤 선발 시 참고토록 했다. 이에 응시자들은 평소 잘 쓴 시문을 골라 고관대작이나 사회명사에게 바쳐 인정을 받고 시험관에게 추천되길 바랐다. 이를 행권(行卷)이라 하는데, 당대 시성인 두보(杜甫)는 적지 않은 행권을 썼다.

 

두보는 행권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과거의 문은 그에게 열리지 않았다. 두보는 절망감에 '아침에는 부잣집 문 두드리고, 저녁에는 살진 말의 먼지를 뒤좇아 마시다, 남은 술에 식은 고기로 쓰라림을 삼킨다'며 울분을 토했다.

 

과거에 낙방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는 황소(黃巢)가 대표적이다. 단순한 농민 반란으로 알려진 '황소의 난'은 진사과에서 잇달아 떨어진 왕선지와 황소가 주도한 것이다. 875년 당나라 체제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 황소는 여러 차례 조정과 교섭하면서 관직을 요구했다.

 

황소는 당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한 뒤 격문을 붙여 조정의 죄과를 열거했다. 이 가운데에는 과거제의 불공정성을 지적하여, '추천과 선발 과정에서 실력 있는 인재를 놓친다'고 비판했다. 사회경제적 기반이 열악했던 황소의 세력은 결국 884년 진압됐지만, 당나라 멸망의 큰 원인이 되었다.

 

  
촨베이공원의 과거 응시자 시험장(考場). 과거시험에서도 부정 시험자가 적지 않아 공원 측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에 부심했다.
ⓒ 모종혁
과거제

  
과거 관련된 다양한 사무를 처리하던 촨베이공원 내 사무실.
ⓒ 모종혁
과거제

 

과거제는 폐지됐지만...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각종 문제점을 노출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공원도 사라졌다. 공원은 옛날 향시나 회시를 치르던 시험장으로, 중국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공원은 신해혁명 뒤 하나둘씩 다른 용도로 사라지고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오늘날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은 쓰촨 랑중의 촨베이 공원과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의 장난(江南)공원이 유일하다. 촨베이 공원은 1652년 청나라가 쓰촨 전역을 점령하기 임시 성도였던 랑중에 세워졌다. 과거제 폐지 이전까지 촨베이 공원에서는 매년 가을마다 향시가 열려 쓰촨 전역에서 인재들이 구름같이 몰려왔었다.

 

랑중에서는 촨베이 공원을 중심으로 각종 서원(書院)이 발달했고, 교육과 문화가 흥성했다. 촨베이 공원의 존재는 과거시험에도 영향을 끼쳤다. 랑중이 배출한 역대 장원은 4명, 진사는 116명, 거인 403명 등에 달했다. 특히 1317년 동안 쓰촨 출신 장원이 단 17명이었다는 점에서 랑중의 인재 배출 공헌도는 절대적이었다.

 

장치(여) 촨베이 공원관리소 직원은 "오랫동안 쓰촨 경제사회의 중심지였던 청두(成都)나 충칭(重慶)조차 과거 장원은 각각 2명, 1명에 불과했다"면서 "랑중의 높은 교육열과 공원의 존재가 과거 합격자의 비율을 높이는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본래 과거는 평등한 경쟁, 교육 중시, 지식 숭상, 귀족적 편향에 대한 지향 등 순기능을 가진 제도였다. 과거는 관리 지망자에게 높은 지식과 교양을 요구하는 철인(哲人)정치의 이상을 요구했다. 과거가 가진 평등과 공정의 정신은 명대 이후 중국을 방문했던 서구인들에게 깊은 감명까지 주었다.

 

18세기 서구 사회의 모순을 비판했던 볼테르, 디드로 등과 같은 계몽 사상가들은 과거제 채택을 주장하면서 '글을 숭상하고 학문으로 인간을 평가하자'고 부르짖었다. 오늘날 전 세계 국가에서 시행되는 고등 고시제도는 과거제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과거가 낳은 역기능은 역사 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과거 시험에만 매달리면서 자아의식이 결핍되고 창조적 사고가 부족한 인간상을 만들었다. 시험 내용은 현실과 동떨어졌고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졌다. 과거의 폐단은 한때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했던 중국이 서구세계에 뒤처지는 결과마저 낳았다.

 

오늘날 한국인도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문제점과 폐해를 우리가 똑같이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제를 통한 명암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쉽게 내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과거를 현대화한 고시제도를 비판하지만, 고시가 있었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이 출신 배경 없는 인물이 등장할 수 있었다.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시험 제도로 인재를 찾으려 했던 과거의 정신마저 부정하기 힘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04년 촨베이공원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진 공사 시험 합격자를 알리는 방.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옛 문인들은 '시험 유전자'를 간직한 채 살아가야 했다.
ⓒ 모종혁
과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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