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수천 년 부엌에서 이루어진 여자들의 모진 눈물의 역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부엌은 살벌한 주도권 다툼의 장이다. 고부간이 같은 칼, 같은 그릇을 만진다는 건 무기를 다루듯 긴장의 연속이다. 작은 도마 위에서 튀는 건 생선의 피만이 아니다. 부엌은 철저한 서열로 평화가 유지되는 공간처럼 보인다. 나는 이 사실을 예닐곱 살에 이미 깨우쳤다. 사내가 부엌에 들면 고추가 떨어지는 시절이었다.
줄줄이 아들 다섯인 집안에서 나는 터울 진 넷째로 태어났다. 누구 하나 여자아이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형들은 일찍이 도회지로 유학을 떠나고, 농번기에 들에서 지내던 어머니도 겨울이 되면 미역 공장, 유자 공장으로 일을 가서 나는 할머니를 거들어서 부엌일을 해야 했다. 땔감을 나르고 아궁이에 불 지피는 일이라든가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는 허드렛일이었다.
이미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엌에 들었으니 짜증과 한숨을 달고 살았다. 모든 걸 할머니가 주장하는 부엌 생활은 괴로웠다. 부지깽이 끝에 하릴없이 불 붙여 노는 일로 게으름도 피우고, 양동이 들고 물 길러 가는 길에 동무들 구슬치기하는 데로 묻어 버리기도 했다. 그러자니 게으른 손자 두고 할머니의 잔소리가 쟁쟁했다.
“어디 사람이 께으른가, 눈이 께으르제. 마음 묵고 달겨들면 겁낼 일 하나 없는 벱이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도 철없는 손자 데리고 부엌일 돌보기가 여간 곤욕이 아니었을 것이다. 뒷짐 지고 안방으로 물러나 상이나 받을 연세에 앞치마를 못 벗었으니 노상 신세한탄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렇다고 할머니는 나에게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콕 집어서 무슨 일을 시킨 적은 없었다.
“아이고, 밥그럭 들기도 숨 차는 이녀르 인생. 이 길로 가다가 똬리끈 떨어지듯이 명이라도 뚝 끊어지면 얼매나 좋을꼬.” 할머니가 양동이를 들고 서서 그렇게 먼산바라기로 읊조리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양동이를 받아 들고 우물로 갔다. 나는 그 일 부려먹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매, 지발 그리 말하지 마. 나가 뭐 안 해 준 것 있어? 쎄가 빠지게 일해 줘도 재미가 하나도 없당게.” 그래도 소용없었다. “네 발로 기어 댕겨도 일이 끝이 없네. 오매매, 삭정이 겉은 허리가 똑 부러지겄네. 아궁이에 불 그러 넣어주는 손 하나 없는 이녀르 팔자.” 둘러보지 않아도 부엌에 귀 달린 짐승은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결국 나는 아귀 주둥이가 되어서 부지깽이를 집어 들어야 했다. 그러자니 끼니때마다 조손간에 다투는 소리로 하루도 부엌이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남자들의 부엌 출입이 자유로운 시절이 되었지만 긴장은 여전하다. 가끔 아내 대신 앞치마를 두른다. 미소로 반겼던 아내가 이내 잔소리를 해댄다. 조리 그릇 늘어놓지 마라, 그건 소금 말고 간장으로 간해야 한다, 수돗물 너무 많이 튄다, 그릇에 고춧가루 안 씻겼다……. 그러다가 아내가 무슨 감수자처럼 국자라도 빼앗아 찌개 그릇에 담그는 날에는 뚝배기에 자존심이라도 빠진 듯 앞치마를 벗어 던진다. 다시는 도와주나 봐라! 남편들은 이해가 안 간다. 왜 아내들은 바보처럼 남자를 부엌에서 밀어내서 제 편의를 도모하지 않는가? 아내들은 못미덥고 서툴러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선심 쓰듯 부엌에서 얼쩡거리는 남편의 태도가 우선 얄미울지 모른다. 그렇지만 때로는 제 구역을 침범 당한 방어기제가 엿보이기도 한다. 시쳇말로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경계심이 느껴진다. 부엌에서 남녀가 동등하게 권력을 나눠 갖고 평화롭게 지내는 일은 요원한 걸까.
그런 수모를 당해도 남편들은 부엌 출입을 포기하면 안 된다. 부엌 출입을 포기하는 순간 그 집 남자들은 더부살이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어도 집안 평수의 삼분지 일은 못 쓰는 셈이니까. 남자들은 부엌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글 : 전성태 님
작가소개 이야기 들려주는 남자, 전성태 님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과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가 있으며,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