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8일 서거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23일 85세의 일기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김대중 이름 석자 속에 대한민국 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김대중은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입니다. 민주투사 김대중 보다는 평화주의자 김대중이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정치인 중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가장 즐겨 사용한 분이 김대중 전 대통령님입니다.
정치인 김대중 전 대툥령님이 생전에 추구했던 독재타도 민주화 운동, 남북화해 통일운동의 목표가 한반도 평화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정치인 김대중의 한반도 평화운동은 대북햇볕정책, 대북포용정책으로 구체화 됐고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세계가 인정하게 됩니다. 평화를 노래하면서 한국 정치사에 굵은 획을 긋고 생을 마친 김대중 전 대통령에 앞서 우리 근대사에서 평화를 노래한 분이 또 한분 있습니다. 100년전 동양평화만세를 부르면서 순국하신 안중근 장군이 바로 그 분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장군은 법정에서 이등박문이 조선민중을 핍박하고 동양평화를 위협했기 때문에 제거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안중근 장군은 사형집행을 앞두고 한국과 중국, 일본이 각기 국권을 인정하고 공동번영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동양평화론‘서문을 기초했습니다. 평화를 노래한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100년전 안중근 장군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김대중은 민주투사였고, 안중근은 항일독립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각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에 몸을 던지신 분입니다. 100년 전 안중근 시대는 국권회복과 대한독립이 화두였습니다. 정치인 김대중 시대 화두는 독재종식 민주화와 남북화해 민족통일이었습니다. 안중근과 김대중은 시대의 화두에 온 몸을 던진 행동하는 양심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김대중 동경납치사건, 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 사형선고 등의 죽을 고비에도 흔들림 없이 민주회복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불사조 같은 김대중의 투쟁정신은 목숨을 던지면서 항일독립운동에 나선 안중근 장군의 구국정신과 맥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안중근 장군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두 분 모두 보통신앙인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안중근 장군이 사형을 앞두고 감옥에서 고해성사를 했고, 순국 직전 유언을 통해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도록 교육하라 할 정도로 천주님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가졌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신앙 역시 남달랐습니다. 생의 마감을 앞두고 쓰여진 마지막 일기 속에서도 정치인 김대중의 신앙의 깊이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일본 동경에서 납치되어 바다 속에 던져질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김대중은 하느님께 기도했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간증할 정도였습니다. 김대중과 안중근 두 분 모두 토마스(한자표기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다는 점도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 모두 행동하는 양심으로 시대정신을 행동으로 실천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수가 됩니다. 다만 사형수 안중근은 형장에서 순국했고, 사형수 김대중은 감형으로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그리고 다시 망명객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고문 투옥 연금 등 사형에 버금가는 죽을 고비에 여러 번 넘기면서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의 주역으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안중근과 김대중의 공통점 중에 독서가 있습니다. 두 분 공히 독서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유묵을 남겼습니다. 김대중이 독서광이라는 것은 널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동교동 사저 지하실에 3만권이 넘는 장서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내용입니다. 평화주의자 김대중의 평화는 상대적으로 한반도 평화에 기초합니다. 이를 위해 남북관계 개선에 심혈을 쏟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이 대북햇볕정책이란 이름으로 실천에 옮겨집니다. 김대중의 대북햇볕정책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금광산 관광, 개성공단 시대를 열게됩니다. 김대중의 한반도 평화정책은 김대중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게 합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주창했습니다. 100년전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을 예견하고 일본에 의한 동양평화 파괴를 직감하게 됩니다.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제의 침략주의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선 것입니다.
안중근은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동양의 평화를 갈구했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 3국이 상호 주권을 인정하고 3국이 공동번영을 위해 손을 잡자는 내용이 담긴 100년 전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남북이 상호 주권을 인정하고 공동번영의 길로 나가 협력단계를 거쳐 통일로 나가자는 김대중의 3단계 남북통일 방안 모두 평화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100년 전 국권회복을위해 동포들의 단결을 호소했던 안중근의 인심단결론과도 그 맥을 함께 합니다. 안중근 장군이 살아계신다면 그는 민족공동번영을 추구한 햇볕정책의 신봉자가 됐을 것입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중국, 일본, 한국이 공동번영을 위해 공동은행설립, 공동화폐제작, 공동의회 구성, 연합군창설 등 구체적인 동양3국의 평화정착 방안을 주창했습니다. 정치인 김대중이 남북분단시대를 종식시키기 위해 일생을 몸부림쳤다면 31살로 생을 마감한 안중근은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평화를 갈구한 것입니다. 동양평화를 갈구한 안중근 장군 하얼빈 작전 100주년에 평화의 사도,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장자의 서거를 목도하게 됩니다. 천국에서 두 분이 만나 못 다 이룬 평화의 노래를 부르시길을 기원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8월 23일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대표 정광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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