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누군지 모르지만 죽으면서도 참 사람을 많이 괴롭혔네요"

한국작가회의/오마이뉴스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0. 26. 16:38

본문

"누군지 모르지만 죽으면서도 참 사람을 많이 괴롭혔네요"
[창녕 문화재를 찾아서⑭] 창녕 계성고분군
08.09.30 20:43 ㅣ최종 업데이트 08.10.01 09:36 박종국 (jongkuk600)

  
▲ 계성고분 1호분 봉토의 분활성토 12방향 계성고분 1호분 봉토의 분활성토 12방향, 1호분은 발굴 조사 결과, 석실의 중앙부를 중심으로 하여 12방향으로 나누어 토질의 차이가 있는 흙을 이용하여 봉토를 조성하였다.
ⓒ 박종국
봉토
 

 

작년 이맘때쯤 현장체험학습으로 경주에 다녀왔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과 불국사와 천마총 등 신라문화유적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에게는 다소 먼 길이었던지 도착하기도 전에 많은 아이들이 차멀미로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널따란 불국사 경내를 돌면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연방 깔깔대는 아이들과 곳곳을 쏘다녔다.

 

사전학습을 하였건만 발길 닿는 곳마다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다보탑과 석가탑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누가 만들었느냐? 언제 만들었느냐? 왜 만들었느냐며 중구난방으로 터진 봇물을 쉬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입에 단내가 날 때까지 거듭 설명하고서야 불국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거대한 불국사 건물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기야 육중한 경내 건물들이 아이들 눈높이에는 전체가 다 들어오지 않았던 탓이다.

 

문화유적답사, 때론 아이들 눈높이로 보아야할 때가 있다

 

차를 돌려 경주시내에 위치한 천마총에 들렀다. 한참 솔숲 길을 걷었을 때 저만치 거대한 천마총이 눈앞에 우뚝 섰다. 그러자 우리 반 만물박사가 뜬금없이 물었다. 늘 무엇이든 관심이 많은 아이다. 질문이 줄줄 잇달았다.

 

“선생님, 저 커다란 무덤은 누가 만들었어요?”

“근데요. 왜 저렇게 크게 만들었나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을 했나요?”

“누군지 모르지만 죽으면서도 참 사람을 많이 괴롭혔네요.”

“….”

 

  
▲ 창녕 계성고분군 창녕 계성고분군은 계성의 영축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삼국시대의 분묘유적으로 일명 ‘계남 고분군’(桂南 古墳群)이라고도 한다.
ⓒ 박종국
계성고분

 

아이 눈에는 그렇게 비친 걸까? 그랬다. 어른들 시각으로 문화재라고 보존하고 있는 고분 하나하나가 아이의 눈에는 커다란 고충으로 보였던 것이다. 내부를 들러보면서도 아이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비록 모조품이기는 하나 소장품을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은 여전히 뜨악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주객이 전도되어 한동안 아이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저렇게 큰 무덤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을까요"

 

지난번 창녕 송현동 고분군과 교동 고분군을 답사할 때도 그런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어린 만물박사의 질문이 일년이 지났는데도 생생하다. 눈을 달리했다. 그 옛날 산성을 쌓거나 족장의 내세를 위한 돌무덤 고분 하나를 만드는데 민초들이 감당해야했을 노역은 실로 삶과 죽음을 넘나들 정도로 심각했을 거라고.

 

  
▲ 계성고분 2지구 1호분 발굴 사진 이 고분들은 지난 1999년 국도5호선 확장공사를 하던 중 발굴된 것으로, 지금은 대부분의 유물들이 창녕박물관에 소장 전시하고 있다.
ⓒ 박종국
발굴

그런 눈으로 오늘 창녕 계성고분을 찾았다. 계성고분은 창녕지역의 여느 고분군보다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 고분들은 지난 1999년 국도5호선 확장공사를 하던 중 발굴된 것으로, 지금은 대부분의 유물들이 창녕박물관에 소장 전시하고 있다. 그 형태는 창녕박물관 오른편 야외전시관에 따로 모형복원관을 마련해 놓고 있다.

 

계성고분은 창녕지역의 여느 고분군보다 역사적 가치가 있다

 

창녕 계성고분군은 계성의 영축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삼국시대의 분묘유적으로 일명 ‘계남 고분군’(桂南 古墳群)이라고도 한다. 이들 고분군은 여러 차례 발굴 조사되었다. 이곳의 고분에서는 시신을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묻고 돌로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널무덤’(竪穴式石槨墓)과 시신을 옆으로 넣어 만든 ‘앞트기식 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 항아리에 넣어 만든 ‘독무덤’(甕棺墓)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무덤들이 발견되어 여러 가지 묘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고분이다.

 

  
▲ 계성고분 출토유물 사진 이 고분군에서 무기류와 마구류, 토기류, 생활용구, 장신구 등 다양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계성고분 2지구 1호분에서 출토된 20여 점이 있다.
ⓒ 박종국
부장품

  
▲ 계성고분 1호분 풀초 유물-무기류 계성1호고분에서 출토된 무기류 유물이다.
ⓒ 박종국
유물

  
▲ 계성1호고분 출토 유물 중 유리제 계성1호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제 유물이다.
ⓒ 박종국
유리제

 

이들 고분군에서 무기류와 마구류, 토기류, 생활용구, 장신구 등 다양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계성고분 2지구 1호분에서 출토된 20여 점 중 범삼엽문환두대도, 철제관모, 철모, 고배, 목걸이 등이 창녕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계성고분군에서 다양한 부장품이 출토

 

창녕박물관은 창녕읍 교리와 계성면 계성리 일대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가야시대의 고분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모형이 있는데 무덤자리를 구하는 모습에서 땅을 파고, 돌과 흙을 구해 쌓고 옮기는 모든 과정이 실제처럼 만들어져있다.

 

  
▲ 계성고분 2지구 1호분 이전복원모형관 성고분 2지구 1호분 봉토분을 원형그대로 이전 복원해 놓은 ‘계성고분군’이 있다. 대형 강화유리를 덮개로 한 전시실에는 발굴당시 실제 고분 크기 그대로 '횡구식석실'과 '토된 유물 모형인 목걸이와 팔찌, 토기 등을 전시하고 있어 실제 고분의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 박종국
모형관

  
▲ 모형관 안 앞트기식 덧널무덤 모형관에 답사온 사람들이 봉문 위로 올라가 문화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 박종국
봉분

그리고 박물관 건물 바로 뒤편에는 지난 99년 계성면 명리 일대 국도 5호선 확장공사 중 중요유물이 출토된 계성고분 2지구 1호분 봉토분을 원형그대로 이전 복원해 놓은 ‘계성고분군’이 있다. 대형 강화유리를 덮개로 한 전시실에는 발굴당시 실제 고분 크기 그대로 '횡구식석실'과 '토된 유물 모형인 목걸이와 팔찌, 토기 등을 전시하고 있어 실제 고분의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계성고분 그대로 이전 복원해 놓아

 

  
▲ 묘제의 변천과정(사진) 묘제의 변천과정(고인돌무덤->토광묘->토광목곽묘->석곽묘(횡혈식석곽묘, 횡구식석곽묘)->을 그린 그림이다.
ⓒ 박종국
묘제

이곳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부장품은 신라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에 흩어져 있는 고분군은 적어도 창녕지역이 신라에 편입된 이후인 5-7세기, 신라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고분은 분명 달랐다. 평소 그냥 데면데면하게 지나쳤던 송현리, 교동 그리고 계성, 영산 고분군들이 다시 새롭게 보였다.

 

창녕지역에도 경주나 공주에 못지않게 산재하고 있는 고분들이 많다. 주말에는 이제 4학년이 된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지역의 고분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고분을 만들었던 방법과 묘제의 변천에 관해서 깨우쳐주고 싶다.

 

어린 아이에게 옛무덤 이야기를 하는 게 뭣하지만, 궁금증이 채 가시지 않았을 아이가 고분에 대해 또 다른 이해를 가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미디어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