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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는 망상, ‘상품화’ 맹신 버려야”

박종국에세이/단소리쓴소리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1. 2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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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는 망상, ‘상품화’ 맹신 버려야”
[사람]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번역,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이창은·이석주

바야흐로 한국 사회에서 칼 폴라니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지난 7월 번역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꽤 두툼한 분량에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초판 3천부에 이어 중쇄에 돌입, 출판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유명 경제학자도 아닌, 한국에서 생소한 폴라니의 책이 각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가을부터 불어닥친 미국발 금융위기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근본적인 회의를 안겨주었다. 지난 97년 이른바 IMF 사태는 한국 등 동아시아에 국한된 문제였지만, 지금처럼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상태에서 경제위기는 그야말로 ‘패닉’ 그 자체였고 수많은 사람들은 해법과 대안을 찾느라 혈안이 된 상태였다. 바로 이때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나온 것이다.

폴라니는 1944년에 발간한 <거대한 전환>을 통해 “‘인간 만사와 만물을 상품으로 만들어서 경제체제를 구성할 수 있다’는 그릇된 환상을 빨리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장경제는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경제생활이 왜 필요한가’라는 인간의 자유 가치를 포괄적으로 고려한 뒤 다양한 경제활동의 틀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한마디로 “이 책의 분명한 메시지는 ‘상품화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상품화 할 수 있다’는 맹신을 버리고, 인간사회에서 시장경제가 차지해야 하는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홍 소장에 따르면 폴라니가 제시하는 해결책의 방향은 칼 마르크스나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주장했던 시장경제를 없애거나 국가에 의한 적절한 개입 등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닌  '사회'라는 하나의 실체를 발견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시장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국가와 사회를 시장의 부속물로 여기면 국가와 사회가 시장에 복속되고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만 낳고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폴라니 전문가’인 홍 소장은 2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 7월 이 책의 번역판을 내놓았다. 폴라니 이론을 60여 년이 지난 현 상황에 맞게 번역한 뒤,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한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일 서울 홍익대학교 인근 ‘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 회의실에서 홍 소장을 만나, <거대한 전환> 속에 담겨진 폴라니 이론의 핵심과, 현 경제위기 속에서 제시하는 메시지,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과 이에 따른 진보진영의 대응방안, 전지구적 관점에서 한국사회의 방향을 모색할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향후 활동계획 등을 놓고 얘기를 나눴다.

[인터뷰 전문]

“상품화에는 분명한 한계 존재… ‘상품화 할 수 있다’는 맹신 버려야”

이창은(이하 이) :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폴라니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폴라니의 등장이 주는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 인물과 사상 권영탕

홍기빈(이하 홍) : 미국 뉴스쿨 대학 윌리엄 밀버그 교수(경제학과)의 최근 글을 대신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지난 30년 간 케인즈는 경제학계에서 조롱거리였으나, 올해 들어서 사람들은 “케인즈적인 정책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당연시 하면서 얘기합니다. 결국 정부의 재정 정책이 불가피 하고 시장의 기능이 멈춘 상태에서 케인즈가 복권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밀버그 교수의 주장은 “지금 우리의 반성이 케인즈 만으로 충분하냐”는 것입니다.

케인즈 경제학은 시장이 기능부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기능부전을 어떻게 정상적인 기능으로 전환시킬 것이냐’라는 기술인데, 지금 사람들은 “현재 닥친 문제가 시장의 기능부전 문제냐, 아니면 인간사회에서 시장경제가 너무 지나친 위치와 비중을 가진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명시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순히 학자나 정치가들 뿐 아니라 지난 몇 년간 부동산 투자와 펀드에 넋이 나가서 현재 충격을 받은 사람들 마음 속에서 나오는 질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사회에서의 경제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게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동물적인 직감이 전 세계에 오는 상황에서, “이렇게 하면 시장경제를 다시 잘 작동하게 할 수 있다”라는 처방책이 케인즈 경제학의 맥시멈이라고 한다면, 현재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시장경제가 이렇게 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옳으냐’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케인즈가 만든 시야의 지평보다 더 나아간 지평을 볼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거기서 칼 폴라니의 분석과 해법이 아주 중요한 혜안을 준다고 본 것입니다.

이 : 칼 폴라니는 한국사회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최초 출판 시점인 44년 이후 60여 년이 흘렀습니다. 폴라니 이론의 핵심과 60여 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인지요

홍 : 1944년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때이고, 그 전에는 파시즘과 대공황이 있었습니다. 당시 10~15년 동안 전 세계, 특히 서구에 사는 사람들은 지각변동에 가까운 혼란을 겪어야 했는데, 폴라니는 이런 극심한 혼란과 변동이 벌어지게 되는 기원을 19세기 초 영국에서 찾은 것입니다.

폴라니 이론의 골자는, 그 당시 생겨나기 시작한 시장경제에서 사람과 자연, 화폐를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고, 당시 겪고 있던 2차 대전과 파시즘, 대공황은 아주 논리적인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입니다.

폴라니가 문제 삼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다른점도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다만 사람과 자연과 인간만사를 가격표가 붙은 상품으로 봐야 하고, 그렇게 볼 때 만이 가장 완벽한 경제와 사회가 오게 된다는 맹신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분명한 메시지는 ‘상품화에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상품화를 시켜야 하는 한계를 분명히 넘어갔습니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상품화 할 수 있다는 맹신을 버리고, 과연 상품화라는 것이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는가, 인간사회에서 시장경제가 차지해야 하는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이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이 : 97년 IMF 위기와 지난해 미국발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 강풍이 몰아친 한국사회는 자본주의 대안 제시 보다, 경제위기 극복에 집중한 경향이 있습니다. 97년 이후 상황과 지난해 이후 상황의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홍 : 위기가 난 상황에서 제도를 크게 바꾼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인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위기만 있을 뿐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오히려 지난 10년 동안 이러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운 상황입니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 이후, 경제성장률에 대한 맹신은 병적인 정도입니다. GDP는 국민들이 그 해 얼마만큼의 화폐소득을 벌어들였느냐의 문제일 뿐인데, 화폐소득을 늘릴 만한 가능성이 있으면 모든 규제를 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사회의 만물을 화폐소득의 창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예가 있습니다. 지난해 숭례문이 불 탈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를 열면 이른바 ‘돈 되는 미래를 연다’는 식의 팝업 창이 떴습니다. 모든 것을 관광상품으로 해서 돈 되는 것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사회의 병적인 징후를 보여준 것입니다.

‘4대강 사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의료와 교육을 영리법인화 하겠다는 것은 현재 우리사회에서 넓은 의미의 보수들의 사상적 도덕적 기반이 얼마나 얄팍하고 천박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전 사회를 움직여야 한다는 합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반성이 이제야 나온 다는 것이 오히려 놀을 정도입니다.

서구에서 폴라니가 크게 각광을 받게 된 계기 중의 하나는 99년 시애틀 반세계화 시위였습니다. 당시 반세계화 시위대들은 특별한 정책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 노선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이렇게 까지 만물을 상품화해도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인간만사와 만물은 상품화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폴라니 책의 핵심 메시지를 받아들이면서, 폴라니 이론의 저변이 확대된 것입니다.

지난해 경제위기가 발생하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지난 30년 동안 시장경제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외국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제와서 마인드 세팅의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CEO 대통령'이란 말은 우파 파퓰리즘에 가까운 얘기”

이 :  홍 소장은 지난 2002년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라는 번역서를 통해 폴라니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현재 폴라니가 각광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 이런 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반증은 아닌지요?

홍 : 결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적, 도덕적 기초가 얼마나 천박한 상태인가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과 의료를 상품으로 한다는 것은 정말 ‘벼락 맞을 일’입니다. 복잡한 이론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폴라니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인간과 자연, 화폐를 상품으로 만들었을 경우, 사람들이 거기에 반항하는 것은 이념이나 논리체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동물적인 직감에 따라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는 지난 10년 동안 ‘상품화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정말 소수 이외에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지적 도덕적 천박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세운 'CEO 대통령'이란 말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입니다. 나라가 기업입니까? 국민들은 주주나 직원이라는 얘기인가요? 세상을 상품으로 하는 상상이 지나쳐서 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주요 일간지, 매체, 대학교수 등이 아주 세련된 아이디어인 것처럼 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쯤되면 우파 파퓰리즘에 가까운 얘기가 되는데, 결국 이런 것을 반성하지 않는 우리사회에 도덕적 위기가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경제위기를 통해 “모든 것을 상품화해도 되는 것이냐”는 질문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 한국사회가 경제 제일주의로 가는 동안 진보지식인들의 역할도 방기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제진단과 현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체계화 하는 작업이 부족했다고 보지는 않는지요.

홍 : 대안 담론이라는 함정에 빠져 무능력한 상황이 됐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대안이라고 하면 거창한 것을 얘기합니다.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보진영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거창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선 잘 안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는 폼을 잡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처럼, 하루라도 정지되면 아무것도 안되는 것의 문제인 것입니다.

엄청난 대안을 제시하는 그럴듯한 문제가 아니고, 구체적이고 범속해 보이는 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진보지식인들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구체적이고 작은 문제는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지식인들은 어떻게든 책 한권이라도 읽으면 큰 아이디어나 개념을 입과 글에 올릴 수 있도록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범속하고 작은 문제들에 대한 천착보다는 뭔가 크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한 번에 답을 내릴 수 있는, 무협지 식으로 따지자면 무슨 ‘비급’ 따위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대안을 내겠다’라는 문제틀이 그러한 경향의 발로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진보지식인들이라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콘텐츠가 없다’는 얘기부터 깨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박관념이 돼서 손발을 묶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진보지식인들을 보면,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데 자기가 어떤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하는 얘기를 보면 흔해 빠진 코미디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은 “민중들에게 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80년대 엘리트 지식인들 주장의 연장입니다.

대안이라는 프레임 자체는 영국의 대처 수상이 만든 것입니다. 70년대 말에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면서 광부 등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안은 있느냐”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대안이라는 프레임 자체는 아주 교묘한 정치철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틀 자체도 우리의 족쇄이며, 구체적이고 범속한 문제들로 접근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대립구도에서 필요한 것은 총체적 방향을 제시하는 엘리트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방향제시라고 나온 얘기들을 보면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 작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자본주의 대안 제시 속에서 다시 회자되는 것이 마르크스 이론입니다. 폴라니와 맑스 식 처방에 따른 경제진단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일부 경제학자는 폴라니를 지칭하며 "아직도 마르크스가 유효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홍 : 폴라니와 맑스는 논의의 지평과 차원이 달라서 (물론 누가 더 위대하고 덜 위대하고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비교해서 말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분쇄할 수 있는가’를 얘기한 것이고, 폴라니는 ‘인간역사에서 시장의 위치란 무엇이냐’를 말한 것입니다. 맑스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제시하는 혁명가였으나, 폴라니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 사유화 할 수 있는 생각의 방식을 제시하고 몇 가지 상상력을 준 정도입니다. 물론 교집합이 있는 부분도 있으나, 지평이 다른 얘기입니다.

▲ 칼 폴라니의 사상을 정리한 <거대한 전환>     © 도서출판 길

올해 초부터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나온 폴라니에 대한 비판의 글 몇 개를 보았습니다. 내 인상은 폴라니의 책은 고사하고 마르크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폴라니는 우경 기회주의다’라는 딱지를 붙이고자 하는 의도만 너무 성급한 것 같아 좀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가 총체적인 청사전이 될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칼 폴라니의 사상을 사회적 경제라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경향과 똑같은 것으로 연결시키는 무지를 보고도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또 칼 폴라니와 무관하게 세상에 누가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경제로 21세기 경제를 다 조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지도 놀라웠습니다.
 
물론 칼 폴라니의 저작과 사상으로부터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정치 경제 질서나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에 아주 중대한 영감을 얻는 일은 가능하다고 나도 믿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경제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회주의’ 식으로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대체하는 청사진(blueprint) 따위가 아닙니다. 신자유주의의 고통이 사방에서 높아지는 가운데에 사회적 경제가 활성화 되지 않으면 삶이 굉장히 괴로워지는 사람들이 있고, 이것이 활성화 되면 힘을 낼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또 마르크스 자체도 사회적 경제의 19세기의 선조격이라고 할 협동 조합 운동(co-operatives) 등에 대해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의미를 평가했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던 ‘생산의 사회화’란 ‘국유화’ 하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물신화된 시장에서의 화폐적 평가를 매개로 하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분업의 조직 형태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에서와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의 변형이 벌어지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란 오로지 국유화 뿐이라는 관념이 굳어졌습니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론 명시적으로 이러한 공산주의적 모델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자본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입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20세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나타난 교조적 태도, 즉 “우리 이외에 모든 것은 이단이다”, “구원은 우리에게만 있다”는 식의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려는 이들이라면 사실 폴라니를 읽어봐야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국가와 시장은 실체 아닌 제도”…“MB정부, 옛날 플랜 계속 추진 두렵다”

이 : 그래도 폴라니식 처방과 해법은 어렵습니다. 사회적 역할이 어떻게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홍 :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모든 것은 상품이 돼야합니다. 예를 들어 시속 80키로 이상으로 움직여야 하는 고속도로에서 서행운전을 하면 안되는 것처럼, 19세기와 21세기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가능한 모든 만사와 만물을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합니다. 그런데, 폴라니가 얘기하는 것은 이것이 애초에 달성할 수 없는 유토피아란 얘기입니다.

오히려 달성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게 되면 반항만 더 커지게 되며, 이로 인해 시장경제의 기능도 무너질 뿐 아니라 반항작용이 너무 강해서 사회가 두개로 분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2차 대전과 파시즘, 경제공항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입니다.

폴라니는 이것에 대한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 만사와 만물을 상품으로 만들어서 경제체제를 구성할 수 있다’는 그릇된 환상을 빨리 버려야 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에게 경제생활이 왜 필요한가라는 구체적인 고려와 도덕적 배려, 인간의 자유 가치를 포괄적으로 고려해서 다양한 경제활동의 틀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구체적 인간관계'를 사회라고 부른다. 사회가 중요하다는 얘기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폴라니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정당화 한 사람 쯤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케인즈 주의자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폴라니는 “국가가 시장에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와 시장보다 더 근본적 차원이 있다는 것, 즉 인간이 자신의 다양한 욕망과 꿈,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 생활의 장으로서 사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선적으로 삼아서 국가의 영역이든, 시장의 영역이든 다시 작동하도록 재배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나온 시기와 지금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복잡한 사회의 역할 속에서, 한국사회의 경제문제를 푸는데 사회의 개념과 범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홍 : 국가와 시장은 사회의 실체가 아니라 기능적 제도들일 뿐입니다. 국가와 시장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근대적 합리성’으로만 작동하는 곳입니다. 사회는 기능이나 제도가 아니라, 삶의 실체적인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사회를 굉장히 낯설어 하는데,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국가나 시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삶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바에 지배 종속되도록 만들자는 것이지만, 우리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룰에 종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실제 벌어지는 삶을 그 곳에 종속시키고 있습니다.

예들 들어, 직장에서 3~4년 근무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문자로 해직 통보를 받을 경우, 그 것은 구체적 인간들이 맺었던 관계가 어느 순간 “너는 을이고 나는 갑이다”라는 것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제도에 따라서 기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회 전체가 그런 제도를 전면화 시켜야만 인간 사회가 잘된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그 순간이 실제 사회가 제도에 압도당하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과 구체적 관계에 근거해서 제도를 바꿔야지, 국가든 시장이든 그 제도가 갖고 있는 룰에 우리를 맞추는 사태는 막아야 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구체적 실체, 연대로써 확인해야”

이 : 그렇다면 종속당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주체적 인식을 갖거나, 자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요? 이를 구체화 시킬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홍 : 사람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라고 얘기를 해야 합니다. 즉 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이나 철학자,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학자, 노동 부분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몫이 있습니다. 이들이 같이 모여서 종합적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해고를 당하든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연대하지 않으면 사회는 없어지게 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우치는 순간이 사회라는 것을 깨우치는 순간입니다. 이익집단의 개념을 먼저 넘어서야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는 누구의 문제도 될 수 있는 사회의 문제입니다. 개인적 이익으로 보거나, 특정 집단의 문제로 보지 말고 사회라는 보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를 용인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관점에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그 순간이 사회가 형성되는 순간입니다.

실제로 폴라니가 얘기하는 것은 환상이나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19세기 후반 사회사를 실제로 뒤져보면, 자기보호운동이라는 것이 바로 이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너무 도를 넘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사회가 연대해서 반응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에 와서 연대가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갖지 못하고 사람들이 포괄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포괄적인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연대가 위축되고 있을 뿐입니다.

작년 촛불집회를 예로 들겠습니다. 사람들은 사회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 어떤 강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실체를 놓고 “이게 원인이 돼서 이러한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을 합리적인 설명으로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이해관계에 대한 판단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맑스 주의자들은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회현상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폴라니가 제시한 것은 어떤 큰 사회적 일이 벌어질 때 그 사람들이 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나, 동료의 경제적 이익을 생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뛰어 넘어서 사회라는 관점에서 판단한 뒤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작년 쇠고기 파동에서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진 뒤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면, “안 사먹으면 그만”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얘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곳에 나온 이유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 차원이 아니고,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해도 되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것을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너무 기가막히다”, “도대체 이럴 수 있느냐”는 생각, 즉 공분(公憤)을 느껴서 나온 것입니다.

이 : 폴라니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의 흐름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4대강 사업 등 이명박 정부의 경제제일주의 패러다임에 다수의 국민들이 함몰된 경향이 있는데,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홍 : 이러한 경향은 노무현 정권 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산가격의 지속적 상승을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잘 팔리는 것을 많이 생산해서 돈을 거둬들인 뒤 소득의 흐름을 크게 한다는 것이 옛날의 패러다임이었다면, 21세기 초와 90년대 말 부터는 자산가치의 상승 자체를 목표로 하는 모델들이 나왔습니다.

전 세계 경제라고 하는 것은 중심부에 있는 자본시장을 중심으로 재편되는데, 거기에는 위계구도가 있습니다. 일종의 계단식 논처럼 물이 흘러가는 서열이 있는데, 여기서 물꼬를 잘 막아놓으면 돈이 흘러갈 때 마다 항상 고이는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 돈이 풍족하게 돌게 되면 그곳의 자산가치는 상승하게 돼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돈이 그쪽으로 계속 들어오게 하려면 그곳에서 모든 자산시장의 가격을 일정하게 계속 상승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인데, 이런 식의 모델 추구 나라들이 아일랜드 등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금융주도형 성장모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전 세계 경제가 핵심 자본시장을 중심으로 화폐가 전 지구적인 자금순환이 그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그 지역에 항상 물이 고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물꼬를 다 막아놓으면 뭐하나. 위에서 물이 말라 버리거나 비가 안오면 거기도 갈라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작년의 경제위기가 나타나면서, 그 전에 사람들이 보고 있었던 전 세계적 자금 흐름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흘러가는 자금에 기댄 뒤 자산가치의 상승을 기대하면서 만들어 졌던 경제모델들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일랜드, 아이슬랜드, 두바이도 완전히 붕괴됐습니다. 거품이 꺼지고 있는 것입니다. 크게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데, 지금 이명박 정부를 보면 노무현 정부의 기조를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자본시장 통합법과 금산분리법 완화 등도 노무현 정부 때 부터 추진했거나 운동이 시작된 것들입니다. 이런 패러다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귀결을 가져올지 두려울 정도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부동산 값이 자꾸 내려간다는 위기를 느끼고, 금리는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젠가 부터 '부채도 자산'이라는 얘기에, 빚들을 내고 집을 샀습니다. 자산가격이 안오르고 금리도 안 오르면 진짜로 큰일 날 것입니다.

문제는 그럴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전 세계적으로 자산가격이 크게 극적으로 오르는 일을 전망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옛날 플랜을 계속 추진한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반MB가 아니라 MB 뽑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 : 최근 진중권 문화평론가에 대한 유무형의 탄압과 관련해서 강준만 교수, 우석훈 박사 등과 함께 탄압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이 '진중권' 개인 문제에 성명을 발표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홍 : 진중권 씨에게도 안티와 팬이 있을 수 있지만, 담론 이외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침묵시키려 하는 것에 놀라웠습니다. 특히 정년보장을 받기 전 까지 눈치를 보지 않으면 말을 하기 힘든 여러 시간강사 등 지위가 불안정한 젊은 지식인들이 유형무형의 압력을 받는 일이 마구 벌어질 판국에, 결국 진중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사회가 공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을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중권 씨는 정권과 자본, 대학, 제도 등의 배경을 빌지 않은 ‘독립적 지식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진중권’을 둘러싼 여러 논쟁들을 보면 전형적으로 드러납니다. 항상 진중권의 상대편은 상당한 현실적인 힘을 등에 업고 있지만, 진중권은 언제나 혼자입니다.

모든 지식이 전문화 돼있는 상황에선 사람들의 이해 부족으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문제에 대한 쟁점 등을 아주 선명하게 설명해주고 무엇이 공중의 토론을 거쳐야 할 측면인지를 지적하는 지식인들이 있는데, 이런 이들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작동하는데, 이러한 작동의 양태가 우리사회에선 한 번도 인식된 적이 없습니다. 대학과 권력, 자본과 연결되지 않은 지식인은 ‘백수’ 정도로 취급되고 있으며, 어떤 제도를 배경으로 했을 때에만 그 발언에 무게가 실립니다. 결국 진중권 교수를 우습게 알고 있는 경향이 있고, 그야말로 ‘듣보잡’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보수적 지식인들은 공공적 지식인 같은 역할에 대해 “그게 무슨 학자냐”라고 말하지만, 그 것은 이상한 권위주의이자 교권주의 입니다. 그러다 보면, 민주주의가 작동을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말해 진중권 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지식인들을 바라보는 협소한 시각 등 전체적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이 :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시민사회의 활동이 저조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체적 목표 없이 지리멸렬하다는 지적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악순환 고리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위축되거나 적극적 대항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홍 : 남한테 영향을 주고 싶은 것을 권력의 의지라고 한다면, 시민단체도 권력집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은 나쁜 것도 아니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작동방식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시민사회 전문가가 아니라 무책임한 얘기일 수 있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시민운동 진영에선 “우리가 영향을 주는 방식이 무엇이냐”, “우리는 어떤 종류의 문제를 제기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빠져있습니다. 물론 일부 단체는 확고한 논의를 하고 있지만, 결국 ‘존재의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민운동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기둥이라는 점에서 시민운동의 존재 이유는 연대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국가나 시장은 연대를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파괴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에게 유리한 한도 내에서만 사람들을 연계시키거나, 아니면 철저히 소외시킵니다.

사람들이 눈앞의 시장 관점에서 봤을 때, 내 이익이 아니더라도, 혹은 국가가 명령하지 않았다 해도, 사람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과 뭉쳐서 얘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무한히 넓은 영역이 있습니다. 이것이 연대이고 그렇게 됐을 때, 사회는 실체가 됩니다. 사회를 실체로 만들어 내는 핵심적 촉매제가 시민운동인 것입니다.
 

▲ 홍 소장은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를 강조했다.     ©인물과 사상 권영탕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는 그나마 인적 네트워크라도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국가영역에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시민운동 단체든 황당하고 멍해지는 상황입니다. 지금 시민단체는 연대해서 사회라는 실체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하지만 최근 아프간 파병 논란의 경우 “그거(반대) 해봤자 영향을 주겠느냐” 라는 얘기가 시민사회 진영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구체적 결과로 평가받는 정당 관계자의 얘기라면 이같은 주장이 정당화 될 수 있으나, 시민운동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얼마나 모으고,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어느 만큼 연대하여 사회라는 실체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그 존재 이유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부의 실제 정책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니 활동의 폭을 줄인다는 것은 정당한 논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 최근 박원순 변호사 등이 참여한 <희망과 대안>이 공식 출범했습니다. 시민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차원에서, <희망과 대안>의 ‘연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홍 : 그 분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측면은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정권을 잡아서 풀려고 하는 등 '과잉 정치화' 돼있는 면이 있죠. 하지만 막상 정권을 잡으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사회가 굉장히 복잡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문제에 대한 사회 전반의 폐해가 생겨났을 때, “이명박 정권을 선거에서 떨어뜨리면 우리사회는 희망찬 사회가 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왜 안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이명박 정권을 떨어뜨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뽑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폴라니 이론과 같이, 사회의 실체는 시장도 정권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생각하느냐가 실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맺어놔야 실제로 국가와 시장을 자기 지배하에 둘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희망과 대안>이 스스로를 정치 전선체로 생각하는지, 활동의 하나로서 정치개입을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시민운동을 잘못하여 정치전선의 일 주체로 편입하려는 경향은 여러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시민 운동의 본래 존재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람들의 연대로 사회를 실체화 시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민단체의 ‘반MB 전선’과 관련해선, “이명박 정권 이후 전반적인 사회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적 차원의 경각심을 일으켜야 한다”는 연대의 의미로서는 괜찮지만,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막아내느냐 아니냐 즉 정권 교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는 의미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 몇 개로 제국주의 얘기하는 보수, 민족정체성 이해 못하고 있어”

이 : 과거 이영훈 교수 등 일제하 근대화론자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보수진영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홍 : 전제를 하나 달겠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90년대 이후 ‘민족’이라는 말이 금칙어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에 수치를 느낀 적도 없었고,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낀 민족주의 이미지는 굉장히 고귀하고 정신적인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민족’은 금칙어와 같은 것이 됐습니다. 당혹스럽습니다.

우파나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들은 “밥만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식입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보면 이 기간 중 경제가 성장하고 경제적 근대화의 토대가 놓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실자체를 왜곡하거나, 경제적 근대화의 폄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화의 핵심은 자율적인 개인과 집단의 탄생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어떤 종교적 도그마나 미신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학에서 얘기하는 ‘공장이 만들어지고’ 하는 식의 근대화는 가치중립적인 용어입니다. 우파나 뉴라이트가 이것을 가지고 마치 긍정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전자의 근대화와 같은 것으로 살짝 섞어넣어서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점에서 봤을 때, 일제가 우리에게 철도를 부설하는 등 개발을 부인하진 않겠지만 제국주의가 식민지 국가에게 남긴 가장 치명적이고 큰 죄악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파괴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철도를 짓는 것으로 보상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정신분열과 인격분열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제가 고등교육의 기회를 극히 제한한 탓에 조선인들이 그 전 몇 백년 동안 가지고 있던 정신적 문명은 모두 파괴됐습니다. 36년 동안 모두 무지의 상태로 살았던 것이고, “못 배우면 사람 취급을 못받는다”라는 생각이 드니까, 해방이 되고 나서 무조건 배우려고 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21세기 까지 왔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남긴 폐해는 ‘쌀 수탈’ 등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모욕 시켜놓고 정체성을 파괴한 뒤 집단이 집단으로서 자존감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불구를 만든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죠. 우파 측은 그 것을 문제 삼지 않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 몇 개 만들어 놓았다는 것으로 제국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인간사회를 이해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 이명박 정부 이후 우파 세력들의 득세가 현 정권의 속성, 즉 대외의존적인 구조와 연결돼서 더 심화된다고 보진 않는지요. 물론 과거청산에 매달릴 것은 아니지만,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 문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우리사회가 점점 둔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홍 : 흔히 민족을 ‘상상된 공동체’라고 하는데, 세상에 상상되지 않은 공동체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상상이 잘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힘을 주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상상이냐가 문제인 것이죠. 사람이 훌륭한 인간으로서, 개인적 이익만 생각하지 않고 윤리적인 것과 닿아 있었던 것이 예전에 알고 있었던 김구 선생, 안재홍 선생 등 일제 시대 선각자들과 함석헌 선생 같은 분들의 민족주의 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민족에 대해 “물질적 실체가 있느냐”를 놓고 얘기합니다.

민족주의를 물질적 차원에서 얘기한다는 것은 집단적 정체성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꾸 ‘민족’이라는 것을 물질적 실체로 환원하여 생각하는 버릇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쪽은 그 말에 물질적 실체가 없는 ‘상상’에 불과하며 혹은 물질적인 철도나 공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민족이라는 것을 중요시하려는 집단에서도 민족이라는 문제의 물질적 실체에 집착한 나머지 쌀 공출이 얼마이고 등등의 문제로 접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일제는 우리에게 철도를 만들어줬다. 우리에게 기여한게 아니냐”라는 뉴라이트의 주장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민족 문제에서 정말로 중요한 집단적 정체성을 눈에 보이는 물질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하려고 하지 말고 개인적 집단적 차원에서의 정신 문화라는 차원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청산 문제를 다뤘으면 좋겠습니다.

민족 자체는 문화적인 차원 이지만 민족주의는 정치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시대적 성격에 따라 프로젝트의 내용이 쇄신돼야 합니다. 하지만 옛날식 민족주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고루하게 들리고 역작용이 나는 이유는, 1945년에 만들어진 민족주의를 지금의 정치적 프로젝트인 것처럼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현 상황은 45년의 민족주의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적 운명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을 지금 상황에 맞게 창의적으로 프로젝트를 만들어 가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반도 문제는 ‘지구적 구조’ 인식하에 접근해야…IMF위기 총체적 진단, 진보적 민주주의 역사 등 연구할 것”

이 : 2002년부터 홍 소장은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등 논객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간 인터넷은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변화를 겪었죠. 현재의 인터넷 언론과 인터넷 여론 등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홍 :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났다고 봅니다. 예전에 내가 정치 웹진 <서프라이즈>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조회수가 2~3만 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당시 글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라, “뭔가 새로운 생각이 없나, 진지하게 토론하고 싶다”라는 열기가 워낙 강하다 보니 그러한 조회수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그러한 반응은 당시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공공적 의지에 대한 갈증이 굉장히 컸다는 것이죠.

하지만 한계도 드러났습니다. 제도권 정치세력과 유착 결탁하면서, 어떤 특정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몇몇 토론 사이트의 운영진으로 참여한 적도 있었는데, 그 당시 결론은 “인터넷 판이 시장판과 똑같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터넷이라는 자발적 공간이 세상을 바꿀 것인가’라는 일방적 논리에 한계가 분명히 보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할 만한 지적인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토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는 정보와 논리를 제공해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인터넷 민주주의가 앞으로 나가는데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칼럼을 쓰지 않기로 했고, 이후 (인터넷을) 떠나게 됐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토론의 장을 열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장판이 될지, 토론 중심의 아고라가 될지는 종이 한 장의 차이입니다. 미묘한 순간이죠. 이것을 규제한다거나 제도화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좋은 아고라가 되도록 인프라를 제공해야 한다는 게 지식인의 올바른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 활동 초기 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로 소개됐습니다. 다소 생소한 분야인데, ‘지구정치경제’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홍 : 80년대 초 부터 영어권에선 ‘지구정치 경제학(global political economy)’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지구화가 되면서 그것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구정치 경제학’이란 용어를 슬그머니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국제라고 하면 미국과 북한, 기껏해봐야 일본과 중국 정도로 생각합니다. 한국 문제에 있어서도 분단의 문제를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전 지구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봐야 분단 모순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정치경제문제의 의식은 부동산, 교육과 같은 일상 문제도 지구적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죠.

이 : 캐나다 요크대학에서 지구정치경제학을 공부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홍 : 68년 혁명 이후 3~40년 동안 진보세력의 특징은 경제 문제를 얘기하려 하지 않고 인문학에 편향된 것 같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많은 비판을 하면서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은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가장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죠. 진보세력의 근간이 되는 것은 민중들의 먹고사는 괴로움인데, 누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캐나다 요크대학은 90년대 중반 북아메리카에서 진보성향의 학자들이 제일 많이 모인 곳의 하나였기에, 진보적 학문의 조류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제일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 2005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창립멤버였고,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새로운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를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설립 배경과 주요 목표, 준비과정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홍기빈 : 내년 3월 창립을 목표로 준비중입니다. 연구소의 첫 번째 전제는 “지구적 구조가 있다” 는 것입니다. 현재 인간사회의 구조가 나라 단위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많이 생각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신자유주의와 같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질서는 지구적인 구조의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전제는 지구적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가 80년대 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후 30년 동안 지속돼 왔는데, 경제위기 속에서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앞으로 더 보수적으로 갈지, 진보로 갈지, 파탄이 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밀착해서 연구해야겠다는 것이 ‘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의 목표입니다.

연구소는 일단 상근 직원을 포함해 10여 명 안팎으로 구성되며, 2주에 한번 씩 모여서 연구작업을 진행할 것입니다. 내년에 4~5권의 책을 낸 뒤 총서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주요 방향은 지구적 구조가 어떻게 되가느냐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연구소가 어떤 연구 플랜을 갖고 있는가, △IMF 위기를 총체적으로 진단한 것, △NPT(핵 확산금지조약)의 역사를 다룬 책, △지구적 관점에서 본 70년대 세계의 진보적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 또 탄소 배출권을 둘러싼 금융, 산업, 지정학의 문제 등입니다.


* 한국의 대표적 폴라니 전문가인 홍 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캐나다 요크대학에서 지구정치학을 전공했으며, 귀국 후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지난 99년 <자본론을 넘어서>라는 번역서를 시작으로,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권력 자본론>, <투자자-국가직접소송제(FTA의 지구정치경제학)>, <소유는 춤춘다>, 그리고 최근의 <거대한 전환>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년 번역서 혹은 연구서를 내는 등 성실함과 함께 한미FTA 등 현안이 있을 때마다 <프레시안> 등에 기고를 하는 등 논객으로서 발언을 아끼지 않은 적극적 성격의 소장 학자이기도 하다.

홍 소장과의 인터뷰는 참으로 어려웠다. 인터뷰 주제인 칼 폴라니의 사상이 어렵기도 했지만, 어떤 위기에 대한 처방과 해법이라면 간단명료해야 할텐데 사실 그의 해법은 지난한 것이기에 더 어려웠는지 모른다.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장경제’라는 상식이 유토피아이며, '사회'라는 하나의 실체를 발견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접근해야 한다는 폴라니적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사회’는 얼마나 막연한가?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보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시장경제’에 갖혀 살았는지를 반증하게 해준 것이다.

홍 소장과의 인터뷰 내내 관통한 단어는 ‘연대’였다. 사회의 구체적 단위가 연대를 함으로써 현재의 경제위기와 질곡을 깨뜨릴 토대가 된다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사회를 실체로 만들어 내는 핵심적 촉매제가 시민운동이며, 시민사회진영의 연대도 강조했다.
 
그러나 홍 소장과의 인터뷰가 무거웠던 것 만은 아니었다. 글 솜씨 만큼이나 그의 화법은 늘 활기차면서도 간단명료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수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예리한 메스를 들이댄다. 그가 이렇게 밝은 눈을 가진 것은 오랜 유학중에도 한반도 문제에 깊은 관심 뿐만 아니라 지구정치경제적으로 접근하는 유연한 사고에 기인할 것이다.

오랜 연구원 생활을 바탕으로 전 지구적으로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를 준비하는 그에게 기대가 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홍 소장의 건승을 기원한다.
 
* 인터뷰 진행 : 이창은 / 정리 : 이석주
* 사진 : 인물과 사상 권영탕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12월 호에 실렸습니다.

기사입력: 2009/11/25 [15:03]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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