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제국주의, 서구중심주의의 잔혹사 | |||||||||||||||||||
[인민경제학 ⑩] 원(原) 제목은 인민경제학이 아닌 ‘핏빛’경제학이었다 | |||||||||||||||||||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한다. 그 안에서도 대서양에 연접한 서단에 마치 보석처럼 조그맣게 박혀 있는 나라다.
이에 비하면 고작 범선 몇 척의 포르투갈 선단이 처음에는 서부 아프리카 언저리를 맴돌다, 15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넘어 마침내 인도양에 들어선 걸 두고 ‘대항해’시대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무엇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살아왔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 입장에서 본다면 ‘대발견’이라는 말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당대 역사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뒤늦게 역사를 지켜보는 국외자의 입장에서조차 가슴이 ‘폭폭할’ 지경이다. 언어의 포스트모더니즘적 견지에서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Finders keepers!)라는, 제국주의적 선점과 수탈을 정당화시키는 논리가 이미 시작부터 언어 자체에 자연스럽게 숨어있고 배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인류사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점에 주목한다면 대항해 또는 대발견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큰 무리는 아닐 수 있다. 근래 ‘서구중심주의’라 일컬어지는 제국주의 시대, 곧 비서구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식민 지배의 시작이다. 최근 미국의 주도하에 ‘글로벌’ 운운하지만 이건 서구 패권시대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질적인 변화가 아니며, 단지 제시된 구호 정도만 다른 연속선상의 양적인 변화에 불과하다. 이처럼 인류사의 진정한 ‘글로벌’은 15세기 포르투갈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널리 ‘지구촌’이라 불리는 하나의 세계는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된 거고, 우리는 15세기 이후 16세기까지의 시기를 ‘제1세대 제국주의’ 시대라고 칭할 수 있다. 먼저 포르투갈이 시작하고 뒤이어 스페인이 해양을 주도하며 완성 짓는다. 마르크스는 이보다 400년 가까이 뒤늦은 19세기 중반 서구 제국주의의 대내적 착취 모습에 ‘한정’하여, 곧 자본주의의 수탈적인 지배억압 관계를 인식하게 된다. 레닌은 20세기 초 전개된 독점자본주의의 대외적 식민착취 상황에 주목하여 이른바 ‘제국주의론’을 마치 그때부터 시작된 것인 양 제기한다. 그들의 주장, 전혀 유의미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근대라는 역사의 전체 맥락에서 본다면 수백 년은 뒤늦게 ‘뒷북치기’나 진배없다. 근대 자체가 대외적으로 유혈의 제국주의, 정치경제적으로 수탈의 자본주의, 문화적으로 유일신, 곧 유일사상의 기독교라는 ‘삼위일체’의 구조 위에 처음부터 축조됐던 것이고, 이후 오늘에까지 비록 단계적인 모습을 달리 하면서도 거시적으로 계속된다. 드디어 식민지 인민들, 무참한 시련과 처절한 고통의 시작이다. 총칼을 든 제국주의자들에게 직접 앞잡이로 또는 간접 부역으로 협조하는 자들(우리로 치면 박영효, 김홍집, 서광범 등 소위 개화파로 불리던 구한말 친일매국노들)만 빼고.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신부들이나 목사들을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 일반적으로 일컬어 틀림없지만, 그들 또한 인간 세상의 일원으로 하나의 예외 없이 그런 건 또한 아니다. 스페인의 라스카사스 신부는 인디언들을 절망과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다. 1567년 발표된 그의 저서 ‘인디언 멸망에 대한 간결한 보고’중 일부 인용이다. “스페인 군사들은 인디언 마을에 침입하여 노인, 아이, 임산부를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 대로 인디언들을 찔러 죽였다. (먼저 맞선 자들을 무수히 쏴 죽였고, 맞서지 않았던 자들에 대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나선 마치 도살장에서 짐승을 다루듯 인디언의 시체를 토막내버렸다.” “어떤 자들은 인디언을 ‘토막 내기’ 시합을 벌인다. 누가 더 정확히 반 토막 낼 수 있는지, 누가 더 한 칼에 많은 인디언을 죽일 수 있는지. 또 어떤 이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젖먹이를 빼앗아다 아이의 다리를 잡고 바위를 향해 패대기쳤다.” 서구 제국주의, 그 시작부터 온 세상을 시뻘겋게 핏빛으로 물들였던 것이다. 본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대표 제목을 원래 <인민경제학>이 아니라 ‘핏빛경제학’ 또는 ‘피어린 경제학’으로 삼아볼까 한참 고심하기도 했었다. 함부로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하지 말라! 도대체 인간 말고, 구체적으로 근대의 서구 ‘기독’ 인간 말고, 어느 짐승이 저렇게 잔인한 짓을 문명 이래 하기나 하였던가. 항거불능 상대에 대한, <역사의 강간> 자체다. 저들의 뇌리 깊이 감춰진 ‘원죄’ 의식이다. ‘인디펜던스 데이’ 등 할리우드 영화들은 종종 외계인과의 우주전쟁 이야기를 담아낸다. 자신들의 다른 문명에 대한 죄악, 심지어는 생물학적 멸종을 포함한 ‘학살의 집단추억’으로 말미암아 저들은 외계인 하면 마치 자신들처럼 의례 지구로 전쟁하러 오는 것인 양 생각한다. 생물학적 본성의 관점에서, 사실 우리라고 해서 별로 다를 것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저들은 자신들의 잔악함을 실제로 보여줬던 것(기수)이고, 우리는 적어도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미수)이다. 현실세상에서 마음속 간음은 간음이 아니다. ‘미수’는 기수와 달리 원칙적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과연 누가 진짜 ‘야만’이었던가? 배타적이고 잔혹한 저들 ‘유일신’ 문명과는 달리, 다른 문명들은 총과 대포가 없거나 제조기술이 뒤떨어졌을 뿐이지, ‘인문’의 견지에서는 저들보다 더 높게 고양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야만 억제 장치>를 더 잘 갖춘 문명들일 걸로, 오늘 미루어 헤아려본다. * 글 쓴이는 '개방과 통합 (연)'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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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1/27 [14:22] 최종편집: ⓒ 대자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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