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노예 해방인가, 인간 해방인가
영국의 식민지인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1776년 7월 4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1세기 반 동안 영국의 통치를 받던 식민지인들은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에 맞서 8년 간 독립전쟁을 한 뒤에 1783년 파리평화조약을 통해 공화국으로 출범했다. 독립전쟁의 동기와 배경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19세기 말까지 지배적이었던 해석은 미국의 독립이 영국의 가중되는 통상 규제와 정치적 압박으로 인하여 일어났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유와 자치 사상에 젖어 있던 미국 정신이 18세기 중반에 들어와 여러 가지 사건들에 의해 촉매 역할을 받아 독립혁명으로 발전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영국이 미국인들의 이러한 자유의 의지를 계속 압박하였기 때문에 혁명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 63쪽)
독립전쟁은 자유사상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모두 작용
이런 견해는 고전적인 것으로서 지금도 대다수 미국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고, 세계 여러 나라 보수적 교과서들 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나 혁명이 인간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간섭 받지 않는 삶에 대한 욕구라는 단순한 동인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지금도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독립선언과 전쟁을 주도하면서 자유와 평등과 독립정신을 주창한 것이 식민지 대중의 절대적 호응을 받았고, 그것이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20세기 초에 혁신주의적 분위기를 타고 급진주의 학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미국의 독립이, 자유를 부르짖었던 여러 정치적, 사상적 지도자들이 영국의 압제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기보다는 영국과 미국 사이, 그리고 미국내에서의 경제적 이해관계 대립에 의하여 생겨난 독립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적, 사상적 요소보다는 경제적 요소가 미국혁명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책, 64쪽)
이 두 주장 중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보면 역사를 평가하는 균형을 잃게 될 것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프랑스 혁명과 1905~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지배계급에 맞선 투쟁이었을 뿐 아니라 그 시대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계급 간의 싸움이었다고 보면 북아메리카의 독립전쟁에도 비슷한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어쨌든, 독립한 미합중국이 탄생하여 대륙에 신생국의 희망과 기운이 넘쳤지만, 원주민들과 흑인 노예들의 삶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거의 없었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미국의 독립은 백인들이 ‘대영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지, 원주민들과 흑인 노예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인 이외의 거주자들이 보면 미국을 지배하는 와스프의 신조인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려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구약성서가 되풀이 강조하는 ‘선택된 백성들’만을 위한 복음이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1732~1799)의 삶을 보면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독립전쟁을 이끈 워싱턴은 많은 노예를 거느린 대지주
버지니아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살 어린 나이에 토지측량관이 되어 6년 동안 일하고, 21살 때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참여했다. 1759년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한 워싱턴은 아내가 부모한테 상속받은 노예 3천여 명과 땅 1만7천 에이커를 재산으로 갖게 되었다. 그는 기왕의 자기 자산인 땅까지 합쳐서 2만2천 에이커를 소유한 버지니아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그는 1789년부터 1797년까지 8년 동안 대통령으로 일하고 나서 물러났다.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많은 사람들이 종신 대통령으로 남 아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더 연임하면 장기집권을 위한 무서운 정치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워싱턴이 그렇게 말하고 물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된 뒤 연방정부 관리 전체의 수가 그가 소유한 노예의 수보다 적은 것이 ‘연임 사절’의 원인이었다는 설이 나중에 제기되었다.
독립전쟁으로 세운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이 엄청나게 많은 노예를 거느린 대지주였다는 사실은 그 이후 미국에서 전개될 역사를 예고하는 주요한 지표였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아메리카의 비극’이 단시일에 쉽게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근거나 다름없었다.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789년 4월 30일로부터 2백20년이 되는 2009년 1월 20일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검은 오바마’가 보기에 아메리카의 비극은 얼마나 해소되었는가? 인디언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은 그 땅의 주인으로서 지위를 조금이라도 되찾았는가? 링컨 대통령이 주도한 노예 해방은 흑인들에게 자유와 존엄한 삶을 보장해 주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답변은 미국의 태생적 죄악을 그가 어떻게 씻어버리고, 반성하지 않고 되풀이하는 전쟁과 살육과 수탈에 어떻게 제동을 걸는지, 정책과 방향을 보여줄 것이다.
이 문제를 짚어볼 때 전제로 해야 할 것은 오바마 자신이 미국의 건국과 발전은 물론이고 원주민 학살과 흑인 억압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적인 표현을 한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는 시카고 빈민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일한 경험 덕분에 21세기에 미국에서 많은 흑인들이 겪고 있는 빈곤과 소외, 범죄와 자학행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으로 시작해서 연방상원으로 도약했고, 마침내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미국 역사의 치부와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혁명적으로 사회체제를 개혁하기에는 너무나 조심스러운 현실 정치인이다.
너무나 조심스러운 현실 정치인, 오바마
만약 2008년 대통령선거에 나선 오바마 후보가 “우리 흑인들이 그렇게도 존경하는 링컨 대통령이 단순히 인간애와 정의 실천을 위해 노예 해방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고 비판했다면 대다수 백인들은 물론이고 상당수 흑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돌아보려고 오래 전에 쓴 글을 뒤져보았다. ‘더 친절하고 신사다운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김종철 정치글모음, 1992년 4월, 한길사)에 실려 있는데, 날짜를 보니 1989년 1월 21일, 곧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이었다.
미국의 서울 워싱턴의 펜실베이니아 대로 1600번지에 우뚝 솟은 백악관 앞에서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시의 취임식 축하행사가 오늘 화려하게 열렸다. 전통적인 가장행렬에는 북부의 전형적인 미국인인 ‘양키’도, 성조기의 울긋불긋한 줄무늬로 실크해트를 친친 두른 ‘엉클 샘’도, 창과 방패를 들고 기성을 지르는 ‘인디언’도, 얼굴이 석탄처럼 새까만 흑인도 모두 모두 나와서 ‘손에 손 잡고’ 새 대통령의 출발을 축하한다. 아메리카합중국을 사랑하는 조국, 자랑스러운 자유민주주의 나라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군중을 바라보면서 함박웃음을 웃는 부시의 머릿속에는 또다른 회심의 미소가 흐를 것이다.
‘귀여운 나의 백성들! 내 보좌관이 니카라과의 반군들에게 무기를 밀수하는 공작에 개입했다는데도, 내가 텍사스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해서 인종 차별을 없애자는 법안에 반대했다는데도, 빨가족족한 물이 든 듀카키스를 떨어뜨리고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어여쁜 백성들!’ (위의 책, 204쪽)
이 문단들에 이어 “‘전쟁광’ ‘미친 람보’라는 독설이 귀가 따갑게 들려왔어도 정치·사회적 문맹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미국의 우매한 대중은 레이건을 신처럼 받들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의 다수 국민들이 레이건을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링컨은 어떤가?
대통령을 향한 신화들
부시에 앞서 대통령 자리를 거쳐 간 마흔 명의 정치인들을 향한 우상 숭배와 신화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미국의 역사는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이 코흘리개 시절부터 제일 존경하는 ‘위인’의 하나로 꼽는 링컨은 어땠는가?
(·····) 그는 미국과 한국의 교과서가 미화하듯이 짐승만도 못하게 사는 흑인 노예들이 가엾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노예 해방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후발자본주의 지역으로서 산업노동자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던 미국의 북부는 ‘해방’과 ‘자유’를 미끼로 남부 노예들의 탈주를 부추겼다. 목화농장을 주종으로 하는 농축산업으로 번영과 안락을 누리던 남부의 대지주들이 링컨이 이끄는 북부의 정파와 자본가들의 이 도발에 발끈해서 분리와 독립을 선언한 것이 남북전쟁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위의 책, 205쪽)
20년 전에 쓴 글이라 지금보다 날이 서있고 너무 단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아래 글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링컨은 자유노동의 고귀함에 대한 절대적 신념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흑인들이 백인들과 동등해질 수 있다는 데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선거 유세 동안 더글라스와 세기적 토론을 벌였다. 더글라스는 링컨이 흑인들의 사회적 평등을 믿고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하여 링컨은 이것을 반박하면서 그의 인종차별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냈었다. 링컨에 의하면 흑인과 백인 사이에는 분명한 신체적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흑인과 백인은 사회, 정치적 위치에서 동등한 입장에서 공존하는 것은 영원히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그가 훨씬 우월한 백인이라는 점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하였고 흑인과 백인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링컨은 웬델 필립스나 조지 핏츠휴, 그리고 더글라스 등과 마찬가지로 강한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소유하고 있던 그 시대의 보수적 인물이었다. (<미국의 역사>, 165쪽)
4년 동안 계속된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지만 미합중국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링컨은 1865년에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연방 재건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존 윌크스 부스라는 배우에게 암살당했다.
링컨의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루 존슨은 남부 출신으로서 전에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연방 재건을 위해 남부를 상대로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공화당 급진파와 갈등을 빚어 1868년에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탄핵 심의를 받았다.
어쨌든 흑인들은 법적으로는 자유를 누리고 참정권까지 보장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 사회, 문화적 활동에서 소외당한 채 한 세기를 보내야 했다. 민권운동가들이 고난과 희생으로 흑인의 자유와 권리를 조금씩 확보하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까지 ‘검은 노예’들의 비극은 끊이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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