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면 더 커집니다
박 종 국
가난한 의과대학생이 있었다. 하루는 돈이 필요해 몇 권의 책을 헌 책방에 팔기로 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책방의 주인이 병이 나서 문을 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어 집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도중 너무 힘들어 냉수라도 한 그릇 얻어 마실 요량으로 어느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때마침 그 집에 어른은 없었고, 어린 여자아이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그 아이에게 먹다 남은 음식이라도 있으면 좀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우유 한 병과 옥수수떡 한 조각을 가져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엄마가 일하러 가시면서 점심 때 저 먹으라고 남겨주신 거예요. 괜찮으시면 이것이라도 드세요.”
그는 그것으로 허기를 채우고 난 뒤에 고마운 마음으로 그 집의 주소를 적었다. 또 아이와 그의 어머니 이름까지도 받아 적었다.
의대생은 가난했지만 그렇게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그는 어느 부인의 수술을 맡게 되었다. 다행스럽게 수술은 잘 끝났다. 그러나 부인의 딸은 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것에 기뻤지만, 수술비로 인한 부담감으로 불안했다.
딸은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비 계산서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계산서에는 깜짝 놀랄 만한 금액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병원비는 도합 우유 한 병과 옥수수떡 한 조각임. 그 값은 이미 지불되었음.”
어려운 형편에서도 배고픈 이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던 어린 아이의 마음은 결국 그의 어머니를 낫게 해는 데까지 이르렀다.
훈훈한 이야기지요. 누군가에게 도움 줄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크든 작든지 베풂은 아름답습니다. 그다지 눈을 홉뜨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 어렵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회복지시설보육원, 양로원, 소년소녀가장, 거택보호노인, 생활보호대상자 등은 현상적 실태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직장을 잃고 무작정 거리를 나돌고 있는 노숙자들의 어두운 그림자는 첨예하게 대립의 날을 세우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의 한 단면입니다.
더불어 사는 의미가 함께 나누는 것이라면 나눔은 베풂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네 것 내 것 점찍어 놓고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남을 헤아려 이해하는 폭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더라도 남의 탓으로 지칭했을 때는 생각가지가 달라집니다. 흔히 잘된 일은 자기 자랑으로 잘못된 일은 그 낱낱을 다른 사람에게 트집 잡습니다. 사람의 향기는 모두 네 덕이요 내 탓이라고 여길 때 아름답게 묻어납니다.
보시(布施)란 누구에게나 호혜평등으로, 미물하나에도 불문가지로 눈가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측면에서 보면 여러 자원봉사자나 도우미(Helper, 대리부모, 입양아양부모, 가사․육아․금연․상담도우미)는 남에게 드러내놓지 않고 자잘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힘으로 선천적․후천적 심신장애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부처요 하느님의 존재입니다.
오늘, “얻어먹을 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고 했던 걸인 최귀동 할아버지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울림이 결국 지금의 꽃동네를 일궜고, 수천수만의 헐벗고 굶주린 이들이 수백만의 기부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은 나누면 더 커집니다. 그게 베풂의 원칙입니다.
한데 요즘 들어 소액기부자들은 늘어도 기업이나 단체 기부는 줄어든다고 합니다. 기업가의 책무성이 엷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성장일변도의 천민자본주위가 어느 때보다 팽배하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사회의 기업가들도 카네기나 록펠러, 빌 게이츠 같이 아름다운 기부문화를 일깨우는 사회헌신성으로 명예로웠으면 좋겠습니다. 2010. 12.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