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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곷밭_주오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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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6. 9. 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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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꽃밭

 

주 오 돈(교사, 시인)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집은 지금은 평생 고향을 지킨 큰형님 내외가 살고 있다. 내 유년기는 조부모님 부모님을 비롯해 칠남매 대가족이 한 집에 살았다. 작은형님들과 누이동생들은 성혼 후 객지로 나가 분가했다. 내가 살았던 고향 집은 그새 몇 차례 구조 변경이 있어 세월 따라 현대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다. 토담을 두른 장독대는 사라지고 맷돌도 용도를 잃었다.

 

요즘은 시골이나 도시에서 옹기를 보기가 쉽지 않다. 어릴 적 우리 집 장독대는 단순한 김치나 장류를 보관하는 저장소가 아니었다. 어머님은 아침마다 새벽 우물 정화수를 길어와 장독 위해 한 보시기 올려두고 두 손을 모으셨다. 어머님에겐 장독대는 가족들과 집안의 건강과 안녕을 빌어주신 성스러운 제단이었다. 나한테는 장독대가 또 다른 기능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꽃밭이었다.

 

우리 집 장독대 주변엔 몇 가지 꽃이 자랐다. 채송화와 맨드라미가 그것이다. 봉숭아도 자랐다. 장독대 주변 꽃들은 여름 한철 꽃을 피우고 때로는 가을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일년생 화초인 이들 꽃들은 가을이면 꽃씨가 떨어져 이듬해 봄 그 자리 새싹이 돋았다. 새싹이 좀 비좁다 싶으면 듬성듬성 속아주고 주변의 잡초를 뽑아주면 되었다. 가꾸느라 그렇게 공 들인 기억이 별로 없다.

 

집에서는 채송화, 맨드라미, 봉숭아 정도였지만 학교에 갔더니 더 많은 꽃을 만났다. 당시 초등학교는 비록 단층이었지만 우리 고장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다. 모교는 폐교가 된 지 오래고 지금은 수련시설로 바뀌었다. 당시엔 운동장도 무척 넓어 보였는데 성장기 이후 둘러보니 손바닥만큼 작았다. 그래도 그 운동장 가장자리엔 화단이 있어 철 따라 여러 꽃들이 피고 지길 거듭하였다.

 

학교에 들어가 우리 집에서 보았던 꽃보다 더 많은 꽃이 있음을 알았다. 백일홍이나 과꽃이나 코스모스도 있는 줄 알았다. 종자가 씨앗이 아닌 알뿌리로 번식하는 꽃도 있었다. 다알리아와 칸나는 알뿌리를 땅속에 얼지 않게 묻어두었다가 이듬해 봄 화단에 심어 싹을 띄워 가꾸었다. 잎맥이 넓어 눈에 쉬 뜨인 파초는 여러해살이 열대식물이었고 나라꽃이 무궁화임도 저절로 터득해 갔다.

 

그 당시는 국민학교라 부르던 시절이었다. ‘국민황국 신민의 준말이라는 것은 한참 뒤 알게 되었다. 토요일 하교 때는 저학년 아우들은 고학년 형들과 함께 애향단 깃발을 앞세워 마을 단위로 같이 하교했다. 이 역시 군국주의 문화의 유산이었다. 우리는 이튿날 일요일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마을 안길도 쓸고 풀도 뽑았다. 마을 어귀 공터에다 꽃밭을 조성해 여러 가지 키웠다.

 

초중고를 시골서 마치고 뒤늦게 인근 중소도시에서 교육대학을 졸업했다. 내가 첫 부임지로 배정받은 학교는 밀양 얼음골 아래 벽촌이었다. 나는 숙직실에서 잠을 해결하고 밥은 교문 밖 가게에서 해결했다. 아름드리 솔밭이 둘러친 그림 같은 교정이었다. 청년교사가 그곳에서 수업 외 맡은 일은 여러 가지였다. 그 가운데 수목관리나 청소도 해당되었다. 꽃밭이야 당연히 내 몫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듬해 경부선에서 역이 가까운 학교로 옮겨갔다. 대구 근교 야간강좌 대학에 적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밀양과 청도 사이에 있는 간이역 부근 학교로 갔다. 역에서는 오 리 남짓 떨어진 학교였다. 걸으면 삼십 분 걸리는 거리라 뒤늦게 자전거를 배워 타고 다녔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다 밤이면 내가 가르침을 받는 위치가 뒤바뀌었다. 그 생활을 사 년 간 보냈다.

 

나는 그 당시 일과 후 학교를 일찍 빠져나간 미안함에 주중 근무는 물론 주말에도 더 열정적으로 근무했다. 학교와 인접해 철길이 지나갔다. 역에 이르는 오 리 길 양쪽에다 코스모스 꽃길을 조성했다. 내가 맡은 학급 고사리 손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비를 맞고 코스모스 모종을 옮겨심기도 했다. 그 후 몇 년에 걸쳐 경부선 그 구간엔 가으내 코스모스 꽃이 화사하게 피었더랬다. 16.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