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와 삶자리
박 원 재(강원대 삼척캠퍼스 강사)
면접장에 들어서는 할머니들의 얼굴은 너나없이 기대와 설렘, 또 그만큼의 조바심과 초조함으로 약간씩은 들떠 있었다. 하지만 면접이 시작되자 자신이 왜 준비된 지원자이며, 잘할 수 있는 적임자인지를 말 그대로 십인십색의 색깔들로 어필하였다. 그러다가 면접이 끝나면 또 약속이나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요즘 여성 고령 인구, 특히 그 가운데서도 대도시 거주 할머니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의 올해 선발 면접장 풍경이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선 인생
작년까지 몸담았던 기관에서 운영하는 사업이고, 또 개인적으로 퇴직 당시 이 사업의 책임자를 맡았던 인연이 있어 지난 4월 말에 전국적으로 진행된 제9기 이야기할머니 선발 과정의 서울지역 면접위원으로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사람을 선발하는 면접장 풍경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의 면접에는 확실히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특히 할머니들의 이력서에는 격동기 한국사회를 살아온 우리 누이들의 신산한 삶의 여정이 오롯이 담겨있어 면접 내내 가슴 한켠이 먹먹하였다.
이야기할머니의 지원 자격은 ‘만56세에서 70세까지’라는 나이 기준 외에는 특별한 조건이 없다. 이런 까닭에 60대 초중반의 연령대가 주류를 이루는 서울 지역 지원자들의 삶의 궤적 역시 다양하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거기에는 몇 가지 평균적인 요소들이 발견되었다. 우선은, 정확히는 계산해 보지 않았지만, 얼추 70% 이상의 지원자들 고향이 지방이었다. 다음으로, 이들 지방 출신자들은 여상(女商) 졸업자가 월등히 많았다. 또 하나,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한국방송통신대학이 최종 학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의 경력에는 하나같이 자원봉사활동이 빼곡히 기재되어 있었고, 구연동화를 비롯하여 독서지도사, 미술치료사 등의 자격증을 구비한 이들도 꽤 있었다.
이런 공통 요소들을 접하면서 면접 내내 한 여자의 인생사가 그려졌다. 그녀는 지방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를 고향에서 마쳤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딸의 신분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여상이라도 졸업해 집안 살림을 돕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과 배움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교집합을 이룸으로써 그것이 가능하였다. 그렇게 고향에서 여상을 졸업한 그녀는 부모의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또 당시 고만한 처자들의 로망이었던 도시적 삶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서울 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공장 노동자로 회사 경리로 판매원으로 고된 일상을 영위하면서, 덜 먹고 덜 입으며 저축한 돈을 고향 부모님 소 값으로 오빠와 남동생 대학등록금으로 보내며 억척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인연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웠다. 언필칭,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무던히 애쓰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에게 어느 순간 죽비처럼 자신을 정면으로 대면해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내 삶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어디에 있었는가? 아이들은 다 커서 출가하거나 독립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정년 뒤 인생 2모작을 한다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찬찬히 돌아볼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자기 인생의 유통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방송통신대학 졸업장과 각종 자격증은 아마 이런 결심이 실행으로 옮겨진 결과들일 것이다.
이것이 소정의 교육을 이수한 후 일주일에 평균 세 곳의 유아교육기관을 방문하여 우리 옛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조그마한 일에 경제적으로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그 많은 그녀들이 지원하는 이유이다. 그녀들에게 있어 아이들은 단순히 사랑스럽기만 한 차원을 넘어 자기 삶의 존재이유를 증명해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일자리에 대한 시각 전환도 필요
‘일자리’가 전 사회적이며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등장한 지 오래다. 특히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는 모든 현안 가운데 늘 첫 번째 이슈다. 그리하여 이 문제가 국정운영의 중심 과제로 올라서고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일자리 상황판’이 메인 메뉴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국가의 각종 정책과 예산은 관련 부문으로 전면 재배치되거나 재조정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일자리 창출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시도들이 봇물을 이룬다. 그러다 보면, 일자리 창출과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정책과 사업들도 일자리 현황 그래프의 상승세를 반등시키기 위한 통계로 징발되는 일들도 잦을 것이다. 무릇 정책이란 입론 목적과 방향의 적절성 못지않게 스스로 그 효용성을 주기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어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의성을 지니는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는 데 불가피하다면 그 정도의 부작용은 얼마든지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승-전-일자리’인 시대를 살면서 한 가지는 우리 모두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일자리 못지않게 ‘삶자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시대로 우리가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할머니 지원자들처럼 배고프지 않고 등 시리지 않음에도 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밥을 보장해주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놓을 자리를 갈구한다. 이런 사회적 욕구는 앞으로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2015년 청년의 연령을 18세에서 65까지로 재규정한 유엔의 조치는 이것이 향후의 과제가 아니라 눈앞의 현안임을 말해준다. 이렇게 탄생한 ‘청년 노인’들은 노년의 삶에 대한 경제적 보호를 넘어 그 삶이 당당히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요구한다.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어떤 미래상을 가져다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새로운 산업환경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아무리 강조해도 결국 사람의 일자리는 기계에 잠식당해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지난 대선 때 잠시 논란이 되었던 기본소득제의 시행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세가 될 것이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함에도 일자리는 반비례하여 줄어든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과실을 재분배하는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음은 불문가지이다.
그렇게 된다면 ‘노동 없는 미래’를 이야기한 팀 던럽(Tim Dunlop)의 예측처럼(『노동 없는 미래』, 2016), 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바뀌어야 하고 또 바뀔 수밖에 없다. 경제적 수입보다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써 일자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갈수록 점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용어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굳이 구분하자면, 그것은 ‘일자리’가 아닌 ‘삶자리’에 대한 기대와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면접을 마치고 나가며 평생 면접이라는 것을 처음 봤다면서, 이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어느 이야기할머니 지원자의 소회는 이 흐름이 생각보다 빨리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말해준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恨)을 안고 살아가는 백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진 정치의 요체라는 생각이 지금도 일정 부분 유효하다면, 작금의 일자리 정책이 긴 안목에서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글쓴이 / 박원재
· 강원대(삼척캠퍼스) 강사
· 전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중국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 역서
〈중국철학사1〉간디서원, 2005
개혁과 적폐 청산은 무엇으로 하는가 (0) | 2017.08.01 |
---|---|
실행될 때만 개혁이다 (0) | 2017.07.28 |
인문 기행에서 만난 건물과 음식 (0) | 2017.07.27 |
백성을 괴롭히던 완도의 황칠 (0) | 2017.07.27 |
시대에 따라 힘쓸 일 (0) | 2017.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