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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조선시대 양반 이야기

박종국에세이/독서서평모음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7. 8. 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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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조선시대 양반 이야기 
하영휘의 『양반의 사생활』 

 
 박 종 국 

 

  흔히 대박을 터트렸다는 얘기. 속되게 돈이 된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필생의 사업처럼 한 우물을 파다 정말 대물을 만난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양반들의 사생활이 고문서의 대가 하영휘에 의해 밝혀졌다. 

  대박이다. 그것도 산더미처럼 쌓인 낡은 문서들 속에서 파묻혀 살다시피 하던 저자가, 야단문고에서 찾아낸 보물이어서 더욱 빛을 보게 되었다.

  새 책 『양반의 사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유학자 조병덕이 아들에게 보낸 1700여 통의 편지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19세기 조선을 재발견한 책'이다.


 

  저자가 조병덕의 편지를 발견했을 때의 감동은 그 어떤 국보가 전해준 그 이상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 만남의 순간을 이렇게 술회한다.

 

  "이 편지가 어떤 경로로 야단문고에 소장되었는지 필자는 모른다. 필자가 처음 야단문고에 갔을 때, 수많은 고서와 고문서가 일부는 정리되었고, 일부는 박스에 담긴 채 쌓였다. 그중 어느 박스엔가 아버지의 편지가 들었었다. 애초에 내용을 검토하여 하나씩 체계적으로 수집한 고서와 고문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자료의 유래를 알 길은 없다. 다른 자료와 함께 뭉텅이로 들어왔을 테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수많은 박스를 풀고 그 속의 고서와 고문서를 정리하다가, 필자는 유려하면서도 단정한 절제미가 담긴 글씨의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봉투도 없고 시간적인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 상태였으나, 보존 상태는 양호했다. 그 편지를 하나하나 정리해 가면서, 필자는 그 글씨의 주인은 조병덕이며, 그 편지의 수신자는 조병덕의 아들 조장희임을 알게 되었다.

  아들 조장희와 소통하던 조병덕의 편지는 150여 년의 세월을 기다려 다시 필자와 소통하게 되었다. 평생을 고문서 더미에서 버텨냈기에 만나는 행운이었다."

 

  책을 펼쳐 보려다 멈칫했다. 우선, 책 제목에 솔깃했다. 양반의 사생활이라니? 남여상열지사? 음담패설? 감각적 더듬이가 뻗쳤다. 표지도 자극적이다. 도포자락 휘날리는 양반의 뒷모습이 빨간 표지바탕과 대비된다.

  엄격한 절의와 초개같이 여겼던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테지만, 실상 이 책은 1700 통의 편지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드러나지 않는 사생활'을 다루었다. 남녀상열지사와는 별반 다른 얘기다.

 

  또 하나, 저자가 1700통에 달하는 행서와 초서로 된 편지들을 보고 해석하고, 그 해석을 재구성하며, 하나의 글로 만들어내는 그 힘든 과정, '노작'이 느껴졌기 때문에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건성으로 넘길 수 없었다.

  이는 근래 읽었던 가벼운 책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 아마 자극적인 책이거니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가는 끝까지 읽지 못한다. 사실 미주들도 꼬박꼬박 챙겨가며 읽으려면 너무나 읽는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굳이 거론해서 무엇하겠냐마는 조선시대 양반은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했다. 양반의 삶은 '겉으로는 도덕과 명분을 내세우면서 사생활을 철저히 감추는 걸'을 미덕으로 중히 여겼다. 혹시 사적 감정을 피할 수 없는 경우, 반드시 '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인 다음 조심스레 드러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 '사적으로' 슬펐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래서 조병덕 편지는 사적 영역에서도 가장 내밀한 부분에 속한다. 생전에 조병덕은 편지 말미에다 반드시 "태우라"고 일렀다. 그의 편지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남의 눈에 띄게 하지 마라', '지승으로 만들어라.', '태워라' 등의 당부는 내용이 지극히 사적임을 반증한다.

 

  홍산 현감의 아버지가 그 권속을 데리고 하향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돌아다니는 소문이다. 대저 소란스런 말이 전보다 백배나 더 심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 종이는 즉시 태워라. 이만 줄인다. - 1866년 9월 15일 편지 중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번에 발견된 조병덕 편지는 양적 측면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어떠한 자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보고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양반들의 사적 영역을 보여주는 편지는 태워버렸거나, 문집의 편집과정에 걸러졌던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대개 상투적인 편지만 남았다. 그런 반면에 조병덕의 편지는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며, 지극히 사적이라는 점에서 여느 편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버지의 주문을 실행에 옮겼다면 우리가 이 편지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아이러니다. 그렇게도 불에 태워 없애라는 신신당부에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1700통의 편지가 살아났다. 21세기에 서서 19세기의 꼿꼿하게 살았던 양반들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그것은 단지 관음증과 같은 악취미와는 다르다.

  150년 가까이 파묻혔던 고문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건 분명 역사적인 성과다. 하지만 그 숱하게 많은 편지들이 이렇게 근사한 역사의 자료가 될 줄은 정작 편지를 쓴 당사자는 까마득히 몰랐을 거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양반 연구가 사적 영역을 고찰할 자료가 부족해 공적 영역에 다룰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병덕 편지는 보관 상태가 깨끗하고 무엇보다도 그 양이 많다. 조병덕은 대략 6일에 한 번씩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 연구에 두고두고 참고할 소중한 자료다.

  이 편지가 남지 않다면, 양반가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으랴. 밤낮 빚 걱정에 시달리는 양반의 모습을 어찌 상상이라도 하랴. 

 

  내 이미 돈 '전'자를 편지에 쓰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어찌 이 결심을 깨뜨리겠느냐. 내 죽을 날이 멀지 않아 다시는 재물을 만들 길도 없고, 사방 어디에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으니 그저 앉아서 죽음만 기다릴 뿐이다. (……) 또 달마다 이자가 붙는 60여 냥 화급전이 썼는데, 8월이나 9월 사이에 구하면 난처함을 면하겠으나 역시 옴짝달싹할 수 없다. 나는 늘 이 생각 때문에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내간의 부채도 산과 같고 바다와 같아서 지금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머리카락 하나 꼼짝할 수 없으며, 동서남북의 빚 독촉이 끊이지 않는 것도 실로 하루하루 큰일이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 1859년 7월 9일의 편지 중에서

 

  나는 설사로 오래 고생하여 피골이 상접하여 지탱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모두 인삼을 써야 한다고 하지만, 양식 대기도 어려운데 어찌 약을 먹을 생각을 할 여유가 생기겠느냐? 그리고 매일 먹는 건 토장일 뿐인데, 이것이 진실로 안분지족에 합당하나, 그래도 병중에 밥맛이 없어 감내하기 어렵다. 이러다가는 어찌 세상에 오래 살겠느냐? - 1844년 6월 30일 아버지의 편지 중에서

 

  이렇듯 조병덕 편지는 차남 조장희에게 쓰여졌는데, 주요 소재는 심부름, 안부, 채무, 훈계, 건강 등이다. 그 내용은 금전거래, 빚, 가족 간 갈등, 아들에 대한 실망, 시국에 관한 언급, 질병 등 개인 사생활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영역에 속해 남에게 알리기 힘든 게 대부분이다.

  이들 편지에서 몰락한 양반의 경제적 궁핍함, 재정상태, 체면, 자존심, 처량함 등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평생 경학을 공부한 유학자라고는 하나, 삼경 중 최고로 꼽히는 주역의 내용 또는 가치관이 편지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선시대 양반의 삶은 겉으로 도덕과 명분을 내세우면서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추는 이중성을 지녔다. 양반은 공과 사의 구분이 매우 엄격했다. 학문, 벼슬살이, 사회생활 등은 공에 속했고, 가정생활은 사에 속했는데, 공은 훤히 드러나는 반면, 사는 철저히 가려졌었다.

  양반들은 늘 공을 앞세웠기에 평소의 말과 행동은 모두 공에 속한다. 게다가 감정까지도 공과 사로 구분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은 겉으로 내세우는 도덕과 명분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 사생활이다. 그게 바로 이 책이 갖는 또 다른 의미다.

 

  나와 너, 그리고 너희 형제가 모두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무엇 때문이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목마른 후 우물 판다.'고 비록 남의 웃음거리가 될지라도, '착해지기를 빠른 바람처럼 하고 허물을 고치기를 사나운 천둥처럼 하며, 분노를 누르기를 산을 무너뜨릴 듯이 하고, 욕망을 막기를 죽어 골짜기에 버려지듯 하며, 독서하고 수신하기를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않는다.'는 말들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결같이 이마에 붙여라. 늘 이 말들을 생각하여 잠시라도 마음에서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아버지의 편지 중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그릴 수는 없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목마른 후 우물 판다'와 같이 그는 당시에 회자되던 속담도 간혹 인용하기도 했다. 조병덕과 아들이 사는 집은 10리가량 떨어진 거리였다. 걸어가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왜 그토록 많은 편지를 썼을까? 요즘 같은 세상에도 그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조병덕이 아들을 걱정하며 쓴 편지를 읽으면 마치 바로 옆에서 말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아버지가 유학의 관습이 몸에 밴 양반의 전형인 반면, 아들은 악명 높은 토호였다.

  그러나 이렇게 상반된 성향의 부자를 이어주고 소통을 가능하게 한 건 바로 편지였다. 거리상 멀지 않지만, 직접 말을 건네기는 힘든 거리를 편지가 메웠다.

  편지의 사적 내용이 양반의 이면을 드러낸다면, 부자의 모습은 당시 양반의 갈등을 보여주었다. 어느 시대나 부모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똑같은가 보다. 부모 속을 썩이는 자식 놈도 마찬가지다.

 

  이밖에도 조병덕의 편지는 아들 외에 각지의 지인들에게 전하는 편지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것은 조병덕이 삼계리에 은거해 살면서도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았던 게 아니기에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묻고 답하는 구실을 톡톡히 했다.

  아들이 아버지와 세상을 이어주는 일종의 창구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조병덕 편지는 일상사의 보고이며, 19세기 조선 사회의 실상을 다른 어떤 자료보다 인간적인 이야기로 전해준다. 그래서 편지 전편에서 느끼는 조병덕은 비교적 양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편지를 읽다 보면, 관혼상제, 과거, 가계, 음식, 농사, 생활도구, 교통과 통신, 서적과 문방구, 질병과 처방, 화폐와 고리대 등 조선시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궁핍한 가운데서도 그때 그 시절의 인간 전형을 만난다는 건 뭐랄까. 마치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다. 아울러 서얼, 노비, 상놈, 잡류, 첩, 토호, 아전 등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의 삶의 질곡도 만난다. 때문에 어느 하나도 쉽게 놓지 못할 만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의 우리에게 19세기 조선 사회는 얼마만한 거리일까. 시간상으로 그다지 먼 과거는 아니지만, 그 접근에서 15세기보다 멀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양반의 사생활』은 19세기 조선 사회와 양반의 내밀한 일상을 손에 잡힐 듯 보여준다.

  따라서 조병덕의 편지가 지닌 매력은 그 어떤 고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고문서가 가진 역사적 의의뿐 아니라 흔치 않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다.

 

  사실 옛 간찰의 경우 대부분 초서로 쓰였기 때문에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편지가 쓰인 당시의 법도와 문서 양식 등에 관한 배경지식을 갖춰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양반의 사생활』은 저자가 국내에서 초서를 해독하는 데 첫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며, 한 꼭지를 가진 역사학자라는 이력을 대변해준다.

  또한 이 책은 저자가 지난 17년간 산더미 같은 문서들에 파묻혀 살다시피 하면서 야단문고에서 조병덕의 편지를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낸 결과다.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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