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혁 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단일한 질병으로 인해 전 세계가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리라고는,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류가 당면한 문제로 바이러스의 위험을 경고한 이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생활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여겨 왔다. 그러나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종 바이러스는 불과 몇 달 만에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바꾸어 놓았다. 인류가 발전시켜온 보건과 의료 및 각종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무력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로 인해 야기될 경제적 손실을 수치화하는 일이 가능하긴 할까 싶을 정도로, 총체적인 난국이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일은, 빨리 ‘코로나19 이후’를 말하고 싶은 대중의 바람과는 달리 이 상황이 종식되려면 지나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예측이다. 게다가 앞으로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고 하니, 이쯤 되면 우려는 비관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우리가 해오던, 혹은 하려던 일들을 다시 할 날이 다시 오기는 할까?
넘어질 수밖에 없다면 잘 넘어져야
유도(柔道)에서 가장 큰 승부처는 상대의 중심을 빼앗아 넘어뜨리기이다. 그런데 유도를 배울 때 넘어뜨리는 기술보다 먼저 배우는 게 넘어지는 기술, 즉 낙법(落法)이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 체육 시간의 일부로 유도를 배웠는데, 도복까지 갖춰 입고 한 학기 내내 낙법만 연습하다 끝났다. 살다 보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낙법 하나만 몸에 익혀 두어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신 선생님의 말씀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몸이 아니라 머리로만 기억한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낙법의 핵심은 부상을 최소화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넓은 부위로 충격을 분산시키고 속도를 완화해야 한다. 이때 손을 먼저 짚거나 무리하게 버티려 하다가는 큰 부상을 당한다. 애초에 넘어지는 상황에 이르지 않는 게 좋겠지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넘어지는 낙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 낙법이라는 말은 한자어이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일본의 유도에서는 낙법을 ‘우케미’라고 부르는데, 한자로는 ‘수신(受身)’으로 표기된다. 1차적으로는 수동(受動) 내지 수세(守勢)의 의미를 지니는 어휘이다. 주도권을 상대에게 내준 상태에서 공격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일환이 낙법인 셈이다.
수세(守勢)의 시대, 넘어짐의 자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주도권을 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다. 바로 몇 달 전까지 언필칭 4차 산업혁명을 내세우며 새로운 미래를 그리던 21세기의 인류는 순식간에 전대미문의 수세(守勢)에 직면했다.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 버티다가는 더욱 큰 곤경을 초래한다. 어떻게 하면 잘 넘어지면서 그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지 그 방법을 찾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
가장 애써 살펴야 할 일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낙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넘어지면 손목이나 발목에 체중이 실리면서 큰 부상을 입기 쉽다. 취약 계층에 더 먼저, 더 심각하게 가해질 충격을 사회 전체로 분산시켜서 함께 감당할 구체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방역 체계가 취약한 국가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도 절실하다.
넘어지면서 비로소 보이는 사물에 잠시 눈을 주어도 좋겠다. 미세먼지 걷힌 시야에 펼쳐지는 새파란 하늘, 저마다 때 되면 어김없이 피고 지는 들꽃들. 주도권을 쥐고 목표를 향해 달릴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물상이다. 그러고 보면 코로나19로 고통을 겪는 생명체는 지구상에 인류밖에 없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많은 질병을 정복해 왔지만, 1980년대부터 이전에 없던 신종 감염병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래 자연 가운데 별문제 없이 존재해 오던 대상을 인류가 과도한 개발과 파괴로 불러내었다고 한다. 학제와 지역, 국가를 넘어서는 ‘원 헬스(One Health)’의 성찰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낙법의 목적은 다시 일어섬이다. 잘 넘어짐으로써 몸의 손상을 최소화하고, 다시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일어서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낙법에 능하다 해도 넘어지는 데 고통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다시 일어섰을 때, 넘어지는 고통으로 인해 얻은 성찰의 시야를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수세는 언제든지 다시 닥치기 때문이다.
글쓴이 / 송 혁 기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고전의 시선』, 와이즈베리
『농암집: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 한국고전번역원
『나를 찾아가는 길: 혜환 이용휴 산문선』(공저), 돌베개
『조선후기 한문산문의 이론과 비평』, 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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