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령(高道令)
조선 숙종 때의 일이다.
아직 나이가 스물이 되지 않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젊은 청년이 경상도 밀양 땅에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고유(高裕)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고경명의 현손(玄孫)이었지만, 부모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친족의 도움도 받지 못해 외롭게 떠돌고 있는 처지였다.
밀양 땅에 이르러서는 생계를 위해서 남의 집 머슴을 살게 되었다.
비록 머슴살이를 하고, 학문이 짧아서 무식했으나, 사람됨이 신실하였고, 언변에 신중하였고, 인격이 고매하였으므로 대하는 사람마다 그를 존중하여 주었으며, 그를 '고도령(高道令)'이라고 불렀다.
그 마을에는 박좌수(朴座首)라 는 사람이 살았다.
박좌수는 관청을 돕는 아전의 우두머리였지만 박봉이었고, 중년의 나이 상처를 한 후에 가세가 매우 구차하였다. 그런데 효성스러운 딸이 정성껏 아버님을 모셨으므로 가난한 가운데도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살았다.
고유는 그 마을에서 달을 넘기고 해를 보내는 가운데 어느덧 그 처녀의 효성과 현숙한 소문을 듣게 되고, 먼빛으로 보고 그 처녀를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내 처지가 이러하거늘 그 처녀가 나를 생각해 줄까?
그 처녀와 일생을 더불어 산다면 참 행복할 텐데!
벌써 많은 혼사가 오간다고 하는데, 한 번 뜻이나 전해보자.
그래, 부딪혀 보자고!”
그러던 노을이 곱게 밀려드는 어느 날 고유는 하루의 일을 마치고 박좌수의 집으로 찾아갔다.
본래 박좌수는 장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장기부터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실없는 말처럼 그러나 젊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품었던 말을 꺼냈다.
“좌수어른, 장기를 그냥 두기보다는 무슨 내기를 하는 게 어떨까요?”
“자네가 그 웬 말인가? 듣던 중 반갑구먼. 그래 무엇을 내기하려나?”
좌수는 이웃집에서 빚어 파는 막걸리나 파전을 내기라도 하자는 건가 생각하며 웃어넘겼다.
“이왕 할 바에는 좀 큼직한 내기로 합시다.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지거든 좌수댁의 머슴살이 삼 년 살기로 하고, 좌수님이 지거든
제가 좌수님 사위가 되기로요!”
박좌수는 그제야 고유의 말이 뜻을 알았다.
“예끼 이 사람아! 금지옥엽같은 딸을 자네 같은 머슴꾼에게 주겠는가?
어찌 자네 따위나 주려고 빗발치는 청혼을 물리치고 스무 해를 키웠다던가?”
고유는 박좌수에게 무안을 당하고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되돌아갔다.
그런데, 고유가 돌아간 뒤 박좌수와 고유가 말다툼하는 걸 방에서 듣게 된 딸이 물었다.
“아버님께서 뭣 때문에 고도령을 그렇게 나무라셨습니까?”
“그 군정(軍丁)이 글쎄 나더러 자기를 사위로 삼으라는구나. 그래서 내가 무안을 줘서 보냈다.”
박좌수는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딸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그이가 어때서 그래요?
지금은 비록 빈천하나, 본래는 명문 사족이었고, 또 사람이 듬직하고 그렇게 성실한걸요.”
박좌수의 딸은 처녀의 수줍음 탓에 얼굴은 불그스레해졌지만, 두 눈에 가득 좌수를 원망하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이 와서 좌수에게 혼인을 지내도록 하라고 권)하여 마지않았다.
마치 자신들 집안의 일인 양 우겨대자 좌수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물 한 사발 떠 놓고 젊은 청년과 처녀의 혼례가 이루어졌다. 마을 사람은 그들이 모은 돈으로 술 동이를 받아 놓고 고기와 과일을 먹고 마시며, 그들 한 쌍을 축복해 주었다.
화촉동방의 밤은 깊어지고, 고유와 신부는 촛불 아래서 부부의 연인 초야를 치뤘다.
고유는 가난하였으나 행복할 수가 있을거라는 기대뿐이었다.
그러나 색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건 꿈같은 말이 아니었다.
“서방님! 글을 아시나요?”
“부끄러우나 배우지를 못하였소.”
“글을 모르시면 어떡하시나요? 대장부가 글을 알지 못하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도 공명을 얻을 길이 없는 법입니다.”
색시는 고유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앞으로 십 년을 작정해서 서로 이별하여 당신은 글을 배워서 과거에 오르기로 하고, 첩은 길쌈을 하여 세간을 모으도록 해요. 그렇게 한 뒤에도 우리의 나이가 삼십이 되지 않으므로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닙니다. 우리 부부가 헤어지는 건 쓰라리지만, 훗날을 위해 고생하기로 해요.”
색시는 고유의 품에 안기어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고유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는 색시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긴 세월 접어두었던 학문의 길을 깨우쳐 주는 색시가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아직도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에 고유는 짧은 첫날 밤이 새자 아내가 싸준 다섯 필 베를 짊어지고 입지 출관향(立志出關鄕) 했다.
그는 그렇게 떠나서 어느 시장에서 베를 팔아 돈으로 바꾸고 스승을 찾아떠났다.
돈을 아끼려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도 자고, 빈 사당(祠堂) 아래서도 밤을 새워가면서 스승을 찾아 발길은 합천 땅에 이르렀다.
고유는 인품과 학문이 높아 보이는 듯한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글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청했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 학동과 함께 천자문을 처음 배웠다.
처음에는 사람의 비웃음 속에서 시작했으나, 오륙 년이 지난 후에는 놀라움 속에서 고유의 글은 실로 대성(大成)의 경지에 도달했다.
스승도 탄복하면서 칭찬을 했다.
“네 뜻이 강철처럼 굳더니 이제는 학문이 일취월장하였구나!
너의 글이 그만하면 족히 과장(科場)에서 독보(獨步)할 만하다.
나로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올라가서 과거나 보도록 하여라.”
고유는 그동안의 신세를 깊이 감사하며 그곳을 물러나서는 해인사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방 한 칸을 빌린 다음 사정을 말하여 밥을 얻어먹으면서 상투를 매어 달고 다리를 찌르며 글을 익혔다.
어느 해,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숙종 대왕이 정시(庭試)를 보이라는 영을 내렸다.
고유”는 처음 치루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 후에 고유는 조정에서 왕을 모시게 되었다.
왕을 가까이 모시던 어느 날, 소나기가 쏟아져서 처마에 그 소리가 요란하였기에 왕은 대신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숙종은 혼자 말을 하였다.
'신료(臣僚)들 소리가 빗방울 소리에 방해되어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그것을 고유는 초지(草紙)에 받아쓰기를,
“처마에서 나는 빗방울의 소리가 귓가에 어지러우니 의당 상감께 아뢰는 말은 크게 높여라.”
하니 모두 글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왕은 쓴 글을 가져오라 하여 본 다음에 크게 기뻐하여 물었다.
“너는 누구의 자손이냐?”
“신은 제봉(霽峰) 고경명의 현손(玄孫)이옵니다.”
“허! 충성된 제봉이 손자도 잘 두었군. 그래 고향 부모께서는 강령(康寧)하시더냐?”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럼, 처자가 두었겠구나.”
“예, 그러하옵니다.”
그날 밤, 숙종 대왕은 고유를 따로 불러서 그의 사연을 사적으로 듣고 싶어했다.
고유는 감히 기망(欺罔)할 수가 없어서 떠돌아다니다가 밀양 어느 마을에서 머슴을 살게 된 이야기며, 거기서 장가를 들었고, 첫날밤에 아내와 약속을 하고 집을 떠나서 10년 동안 공부를 한 그의 이력(履歷)을 모두 아뢰었다.
“허허! 그러면 10년 한정(限定)이 다 되었으니 너의 아내도 알겠구나.”
“모를 줄 믿사옵니다. 과거(에 급제한 지가 며칠이 안 되어 아직 통지를 못했습니다.”
“음, 그래?”
왕은 그 자리에서 이조판서를 불러들여 현(現) 밀양 부사를 다른 고을로 옮기고, 고유를 밀양 부사로 임명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유를 바라보면서,
“이제 내가 너를 밀양 땅으로 보내니 옛날 살던 마을에 가서 아내를 만나되 과객처럼 차리고 가서 아내의 마음을 떠봐라.
과연 수절하며 기다리는지, 아니면 기다리지 못하고 변심했는지 뒷이야기가 나도 궁금하구나!”
고유는 부복(俯伏) 사은(謝恩)하고 물러 나왔다.
그는 왕이 명한대로 하인은 도중에 떼어놓고 홀몸으로 허술하게 차린 다음에 옛 마을을 찾았다.
그러나, 집터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고, 사람 그림자도 없이 버려진 채로 수년세월이 지난 모습으로 보였다.
고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못 믿을 게 여심이라던가? 첫날 밤에 맺은 굳은 언약이 가슴속에 사무치건만.”
마침 가까이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보고 박좌수 집 형편을 물으니 그가 고유인 줄은 못 알아보고는 늙은이는 아는 대로 일러 주었다.
“‘박좌수 어른이요? 그러니까 그것이 3년 전이었군요. 병으로 죽었지요.
그는 딸을 하나두었지요.
벌써 10년 전 이 마을에 머슴을 살았던 고도령에게 시집을 갔는데, 첫날밤에 신랑이 자취를 감추어 버려 혼자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첫날 초야(初夜)에 아들이 하나 생겼어요.
참 똑똑하지요. 그 여자는 현숙하고, 어찌나 부지런했던지, 남편이 없었는데도 크게 가산(家産)을 일으키더니 땅과 살림이 무수하고, 건너편 산밑에 백여 호가 넘는 대촌(大村)을 이루어 놓았어요.”
고유 너무도 기뻤다.
가산을 이뤄놓은 사실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을 지키면서 자신을 기 려줬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다.
고유는 노인에게 사례하고 자신을 따르는 군속에게는 주막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어둑어둑 어둠이 마을을 감싸올 무렵, 마을 사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제일 큰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구걸하는 소리를 질렀다.
“얻어먹는 인생이 한그릇 밥을 바라고 왔소이다.”
사랑방에서 늙은 스승한테 글을 배우던 소년이 그 소리를 듣고 나왔다.
“들어 오세요, 손님!”
고유는 그가 아들인 줄 알면서도 짐짓 “아니 처마 밑에서라도 좋네.”라고 하였다.
“아니, 올라오세요. 우리 집에서는 과객을 대절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굳이 올라오라 하므로 못 이기는 척 올라가 윗목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 그런데 손님의 성씨는 무엇이신지요?”
“허, 비렁뱅이에게 무슨 성이 있나, 남은 고(高)가라 하지만.”
그러자 소년의 눈이 더욱 빛났다.
“저, 그럼 손님 처가의 성씨는요?”
“10년 전에 장가들어 첫날밤을 지내자마자 헤어졌으니, 무슨 처가(妻家것이 있을까?
그 댁호(宅號)야
’박 좌수댁(朴座首宅)‘이었지만...”
그때 박씨(朴氏) 부인(婦人)이
사랑(舍廊)에 과객(過客)이 들었는데
성(姓)이 고씨(高氏)라고 하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아들이 나왔다.
아들의 눈은 기쁨과 설렘으로
어머니의 눈빛을 확인(確認)을 한다.
박씨(朴氏) 부인(婦人)은 고개를 끄덕 이더니
아들 손을잡고 사랑방(舍廊房)으로 들어갔다.
비록 10년(年)을 떠나 살았지만
한눈에 알 수 있는 남편(男便)이라
기쁜 나머지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
오래 그리던 회포(懷抱)에 쌓인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열살먹은 아들을 인사시켰다.
“고유(高裕)”는
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전히 힘없는
소리로 그의 그간 지난 일을 꾸며댔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는 뜻을 이루어보려 하였으나,
운수(運數)가 사나워서 베를 판 돈은
도적(盜賊)을 만나 빼앗겨 버리고,
이리저리 유리걸식(遊離乞食)하여 다니자니
글을 배울 힘도 나지 않았거니와,
서당(書堂)이 있어 글을 배우려 해도
돈이 없으니 가르쳐 주려는 사람도 없었소.
세월(歲月)만 허비(虛費)하고는 글은 한자(字)도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비렁뱅이가 되었소.”
그러나 부인(婦人)은 조금도
원망(怨望)하거나 민망(憫惘)해하는
빛이없이 사람의 궁달(窮達)은 모두
운수(運數)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自己)가
벼로도 수천석(數千石) 추수(秋收)를
장만해 놓았으니 우리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좋은 의복(依伏)과 음식(飮食)을
들여 놓으면서 도리어 남편(男便)을
위로(慰勞)하여 주었다.
“고유(高裕)”는 음식상(飮食床)을 앞에두고
부인(婦人)이 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부인(婦人)의 눈길에 남편(男便)의
겉옷이 거렁뱅이의 옷차림이지만
속옷은 새하얗고 깨끗하였으며
허리춤에는 관리(官吏)들이 차는
명패(命牌)가 흔들거리고 있었으니 놀랐다.
“서방님! 사실(事實)대로 말씀 해주십시오.”
“나와 동행(同行)하던 사람이 있으니,
그들도 불러들여 함께 먹어야 하겠소.”
부인(婦人)이 하인(下人)을 시켜 그 사람을
사랑방(舍廊房)으로 모셔 들이라 하였다.
하인(下人)이 나가서 문(門)밖에 서 있는
과객(過客)을 보고 들어가시자고 하자,
그는 들은척도 않고 대로(大路)에 나가더니
품에서 호적(號笛)을 꺼내어서 높이 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여명(數十餘名)의 관속(官屬)들이 달려와
안으로 들어가서는 도열(堵列)하였다.
그리고 박씨(朴氏) 부인(婦人)을 향(向)해
문안(問安) 인사(人事)를 올리는 등(等)
야단(惹端)이었다.
문(門)밖에 서있던 과객(過客)은 “고유(高裕)”의
지시(指示)를 받은 군관(軍官)이었다.
“고유(高裕)”는 그제야
박씨(朴氏) 부인(婦人)에게 말했다.
“우리 부부(夫婦)의 사연(事緣)을 들으신
상감마마께서 지시(指示)하신 것이라오.
당신(當身)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 것이
결코 고의(故意)가 아니었소.”
군속(軍屬)이 관복(官服)을 가져오니 갈아입고
박씨(朴氏) 부인(婦人) 앞에 당당(堂堂)하게
선 남편(男便)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인(婦人)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그 이튿날부터 3일간(日間) 크게 잔치를 베풀어
동리(洞里)의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불러모아서 실컷 먹고 마시게 하였다.
박씨(朴氏) 부인(婦人)은
그동안 모아놓은 전답(田畓)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처음으로
글을 깨우쳐 주신 서당(書堂)의 스승과
해인사(海印寺) 스님들에게도 많은
보은(報恩)의 폐백(幣帛)을 보냈음은 물론이다.
“고유(高裕)”는 얼마 안 있어 벼슬이
경상감사(慶尙監司)에 올랐다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으니,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正祖(정조) 등(等)
3대(代)를 모시면서 영화(榮華)로움이
말할 것도 없고,
박씨(朴氏) 부인(婦人)도 나라에서 지정(指定)한
“정부인(貞夫人)”이 되어 늦도록
복록(福祿)을 누렸다고 합니다.
고사(古史)가 감동(감동)이지요????
요즈음 시대(時代)에도 이런 아내가 있겠죠?
좀 비슷한 일이라도 생겼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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