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반지성주의
김 진 균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
대학 교원 제도는 너무 복잡하다.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불리는 이들은 대개 정규직 전임교원이다. 강사, 외래교수, 초빙교수, 강의전담교수, 연구교수, 겸임교수, 산학협력교수, 대우교수 등으로 규정된 이들은 비정규교수이다. 비정규교수인 시간강사는 2019년부터 강사라는 법률 용어로 대체되고, 정규직 전임교원이던 전임강사는 2008년부터 법률에서 삭제됐다. 비정규교수에게도 연구조교수, 강의전담부교수처럼 전임교원 직급을 덧붙여주기도 하고, 일부는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원체 복잡해서 대학교수조차 전모를 파악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1980년 졸업정원제가 도입되고 대학생이 폭증한 여파로 1980년대 중후반부터 대학원생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1995년 ‘대학설립준칙주의’ 도입으로 몇 년 사이 30여 개의 대학이 신설되고, 교원 수요도 증가하여 대부분의 학위취득자는 전임교원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대학에서 비정규교수는 강사가 대부분이었고, 대개 전임교원이 되기 전 몇 년 간 겪는 통과의례로 여겨졌다. 급증한 대학 중에 2000년을 전후하여 재정파탄을 겪는 대학이 나오고, 대학 내에도 시장논리가 횡행하면서 다양한 비정규교수 명칭이 등장하여 전임교원 직군을 잠식했다. 2018년 교육부에서 주도한 대학강사제도개선협의회에서 비정규교수 직군을 정리해보려 했으나, 대학마다 워낙 자의적으로 활용해오던 터라 체계적 파악조차 불가능하여 전체 31개 명칭이 있다는 정도만 확인하였다.
정규직 전임교원과의 살인적 낙차
그 사이 초빙대우교수 따위의 명칭이 추가되어 30여 개가 된 비정규교수 명칭은, 연구자들이 비정규교수 직군에 장기간 적체될 수밖에 없는 구조의 표현형이었다. 절망한 비정규교수들이 곳곳에서 세상을 등지는 사건이 잇달아 언론에 보도되었고, 새삼 비정규교수의 열악한 처지가 연일 부각되었다. 2010년 조선대 서정민 강사의 유서에는 구체적 정황이 담겨 있어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어느 교수의 논문 수십 편을 대필했으며, 거금을 내면 교수 시켜주겠다는 제안도 받았다고 하였다.
이 사건은 은근히 짐작하던 전임교원과 비정규교수 사이의 낙차를 충격적으로 각인시켜주었다. 2010년 4년제 대학의 평균 강의료는 36,400원이었고, 강사의 평균 강의 시간은 4.5시간이었으며, 대학은 1학기당 15주의 학사기간을 운용한다. 이 평균 강사의 연봉은 4,914,000원이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지만, 시간을 많이 뺏기면 연구력을 유지할 수 없고 강의를 계속할 수도 없다. 무간지옥이다. 전임교원은 강사 배정권은 물론 교원채용 심사권도 갖고 있다. 불속의 강사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굵은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이성을 잃을 만한 상황인 것이다. 참고로 가장 최근 통계인 2020년 평균 강의료는 66,000원, 여전히 논문 대필과 채용 뇌물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반지성주의의 뿌리는 대학
1935년 발표된 유진오의 「김강사와 T교수」에서 볼 수 있듯 초엘리트들만 교육 받던 식민지시대부터 대학에서는 강사를 착취해왔지만, 대학진학률이 70%에 이르는 2022년이 되도록 강사는 노동자로서의 생계는커녕 직장건강보험 가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고등교육 정상화를 회피해온 역대 정부의 일관된 무책임이 빚은 일이이지만, 한편으로는 대학 전임교원들이 조장해온 일이기도 하다. 강의를 맡길 수는 있지만 동료 대접 안 해도 되는 비정규교수들이 지옥에서 견뎌줘야, 전임교원들은 논문 편수를 채워줄 학회지 운영도 떠맡길 수 있고, 연구재단 계획서와 보고서도 떠맡길 수 있고, 잡무에 일절 손대지 않고도 학술대회를 개최할 수 있으며, 학회 뒤풀이도 저절로 한상 차려지게 만들고, 소장을 맡은 대학연구소도 저절로 굴러가게 만들 수 있으며, 심지어 논문 자료를 자판기처럼 뽑아볼 수도 있다. 이렇게 낙차를 즐기다가 한 걸음만 더 가면 대필 논문과 채용 뇌물이 기다리는 것이다.
전임교원들은 대학 안의 기득권에 젖어 대학 밖의 세상엔 무심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일터에서 강사들이 무간도의 길을 걷고 있는데 못 본 척 연구실 문을 닫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고통에 관심을 갖기가 쉬우랴. 우리 사회도 온통 무한경쟁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무한경쟁의 낙차를 즐기는 대학 지성에게 사회가 무슨 기대를 가지겠는가? 반지성주의 역시 대학이 자초한 일이다.
글쓴이 / 김 진 균(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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