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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농군의 추억을 심으련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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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농군의 추억을 심으련다

온가족이 땅을 가꾸며 생계를 잇던 유년 시절… 경기도 일산 시골마을에 ‘가족농장’ 마련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한 후배는 어느 노시인의 자서전을 읽다보니 자꾸 내 얼굴이 떠오르더라고 했다. “형에게 듣던 어린 시절 얘기와 어쩌면 그리 비슷하냐…”고. 그 시인은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기신 분이다. 그런데 아직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시퍼런 나이의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 문명이 밀려들기에는 도시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이었던 까닭이다. 그랬다. 나는 호롱불 밑에서 한글을 배웠고, 아버지의 소달구지를 타고 삼십리 떨어진 장에 따라가 기차를 구경하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직접 짚으로 짜신 멍석을 마당에 펴고, 백제시대에 쓰던 것과 거의 똑같이 생긴 훑테로 벼를 훑으셨다. 정말이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내 어린 시절은 그다지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 지난해 여름 고추와 토마토에 지주를 세워주고 있는 모습.

아버지가 텔레비젼을 사지 않은 까닭

세상은 너무 빨리 변했으므로 그런 유년 시절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생이 되던 해에 마침내 우리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5촉(와트)짜리 전구조차 얼마나 밝게 느껴졌던지, 마을 사람들은 그날 밤 태어난 옆집 쌍둥이 딸이 “전깃불에 깜짝놀라 엄마 뱃속을 박차고 뛰쳐나온 모양”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변화의 시작일 뿐이었다. 몇해 지나지 않아 마을 앞 신작로에도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뛰놀던 숲들은 하나둘씩 불도저에 파헤쳐져, 붉은 흙을 드러낸 밭이 되었다. 세월이 더 흐르자 밭을 갈던 아버지의 소는 트랙터로, 어머니의 훑테는 콤바인으로 변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지난해 결국 문을 닫아버렸다.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평생 당신 손으로 텔레비전을 사지 않으셨다. 바보상자 때문에 자식들이 공부를 소홀히 할까봐 그러신 것이 아니었다. 일을 소홀히 할까봐서였다. 5남매에겐 각자 맡은 일이 있었다. 소를 들판에 내어매고 들여오는 일, 꼴먹이기, 소죽 끓이기는 20년 가까이 이어진 4형제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것은 자연스레 대물림되었다. 두엄내기, 보리베기, 모내기, 새쫓기, 가을걷이로 이어지는 일거리 또한 사철 끊이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자라서 농사꾼이 되고, 자식을 낳아 뛰어난 농사꾼으로 키우는 것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라고 믿었다.

내 생에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내 예상은 빗나갔다. 농사꾼 대신 나는 어쩌다 한번씩 농민들 이야기를 마치 남 이야기 하듯 기사로 다루는 백수(白手)의 기자가 되었다. 그래도 칠순을 넘긴 부모님이 여전히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까닭에, 나는 요즘도 간혹 농사일을 거들곤 한다. 한때는 코뚜레만 잡으면 성난 황소도 그자리에 무릎 꿇릴 만큼 힘이 세던 고향 어른들은 이제 늙은 호박 하나조차 제대로 들기 어려울 만큼 팍삭 늙어버려, 작은 체구의 나도 제법 쓸만한 일꾼 노릇을 한다. 그러나 단순노동의 쉼 없는 반복이거나 허리를 휘게 하는 농사일을 신나게 느낀 적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없다. 그런데 재작년 늦가을 나는 무슨 바람이 들어선지, 내가 사는 고양시 일산새도시에서 오리쯤 떨어진 한 마을의 주말농장 한 구획을 빌렸다. 그리고 지난 한해 나와 가족은 정말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농사를 지었다.

무엇이 나를 충동질해 주말농장으로 향하게 했을까? 주말농장은 애초 농약이나 비료를 치지 않고 푸성귀를 직접 길러먹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대부분의 먹을거리를 생활협동조합에서 친환경 농산물로 사먹지만, 그래도 직접 길러먹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농작물이 싹트고 자라 꽃이 피고 열매 맺는 모습을, 지렁이·땅강아지·방아깨비가 어울려 사는 세상을 올해 일곱살이 되는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주말농장을 시작한 또 하나의 이유다. 하지만 정작 주말농장 가는 날을 가장 기다리던 이는 내 가슴속에 숨어살고 있던 작은 소년이었음을 나는 이제 안다. 내 생에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나는 그렇게 추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주) 훑테는 쇠로 만든 살이 20여개 달린, 머리빗 모양의 농기구다. 살이 하늘을 향하게 다리를 받쳐 세워놓고, 살 사이로 벼이삭을 넣고 당겨 벼를 훑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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