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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정월대보름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6. 2. 12.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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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밝이술→귀가 밝아져라, 통밤→총명해져라, 생두부→...
[김제 벽골제] 김제평야에서 자란 내 기억 속의 정월대보름
텍스트만보기   김현자(ananhj) 기자   
ⓒ 김현자
보름을 앞두고 오곡밥과 갖은 나물, 부스럼을 먹지만 전형적인 시골, 그것도 평야가 발달한 김제에서 자란 전 보름날 이른 새벽에 잠이 덜 깨 부시시한 눈으로 대보름음식을 먹곤 하였습니다. 정월 대보름이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풍습이고 보면 설 못지않게 우리는 이 날을 많이 기다렸습니다. 부모님 역시 며칠 전부터 이런 저런 준비를 많이 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오곡밥과 오곡나물 같은 대보름 음식 준비를 하였습니다. 갖가지 나물을 미리 삶아 우리고 오곡밥을 지을 다섯 가지 곡식을 준비하였죠.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들판의 들깻대, 고춧대, 가지나무대, 호박덩쿨 등을 잊지 않고 한 지게 가득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정월 대보름 이른 새벽에 가족들의 복과 운, 건강을 위하여 그 어떤 날보다도 바삐 움직이셨습니다. 날도 밝기 전인 이른 새벽부터 집안에는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넘치며 우리들의 선잠을 깨우기도 하였지요.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준비한 음식 중에는 오곡밥과 다섯 가지 이상의 갖은 나물 외에 통김과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맑은 콩나물국과 두부, 귀밝이술, 그리고 생밤 같은 부럼이 있었습니다.

▲ 복조리에는 쌀, 진짜만 골라 일고 돌과 같은 불순물은 취하지 않는다는, 이와 같이 복과 좋은 것만 갖자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지요. 올해는 추억속에 있던 푸른빛 도는 복조리 한쌍 꼭 사야겠습니다.
ⓒ 김현자
우리들은 오곡밥과 함께 준비한 다섯 가지 이상의 갖은 나물을 통김에 가득 싸서 볼이 볼록해지도록 먹곤 하였는데요. 이것은 풍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김 한 장은 벼 한 섬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두부는 부실하게 자라나기 예사인 옛시절에 토실토실, 포동포동 속살이 붙길 바라는 의미였고, 맑은 콩나물국은 쑥쑥 자라라는 의미에서였다네요.

▲ 요즘에는 이렇게 조그맣고 장식성을 우선한 복조리나 복주머니 등이 일년 내내 팔리지요. 시중의 이런 제품들 중에는 대나무를 모방한 플라스틱 재질의 복조리나 중국산 등도 자주 보이고요.
ⓒ 김현자
정월 대보름 음식에는 고춧가루를 절대로 쓰지 않는데 이것은 여름에 '살 쐐기(이나 벼룩이 없어도 따끔거리거나 무엇이 무는 것, 옛날에는 이런 것이 잦았다)'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한 모금씩 꼭 먹게 하여 눈을 질끈 감고 받아 먹던 귀밝이술에는 '귀가 밝아지라'는 의미가, 부스럼을 막기 위한 부럼 중에 통밤은 '총명해지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럼 중에는 정월 대보름 밤에 달집의 불씨로 볶아 먹는 콩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달집을 피우면 우리들은 어머니의 다리미에 콩을 담아 불씨를 콩 위에 덮었습니다. 그러면 얼마 후에 콩이 '타닥~!' 조용한 소리를 내며 익었는데 그걸 입이며 손이 까매지도록 골라 먹기도 하였습니다.

남자애들이 깡통을 돌리는 정월 대보름밤, 저같은 여자애들은 복조리나 소쿠리를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는 반드시 세 집의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이것은 삼복더위에 더위 먹지 말고 건강하게 여름을 보내자는 의미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오곡밥을 99번 먹고 갖은 나물도 99번 먹는다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많이 먹고 열심히 일하라는 뜻에서라고 하네요.

저의 고향에서는 정월 대보름 해뜨기 전인 이른 새벽에 반드시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남보다 먼저 일어나 남보다 많이 일하고 남보다 많이 거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날 밤에 밥을 얻어먹는 풍습은, 굶는 사람이 워낙 많은 못 먹던 시절에 이날 만큼은 천빈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고르고 풍성하게 나누어 먹고 복을 나누자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 색동은 우주를 이루는 원소인 물, 불, 흙, 쇠, 바람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들의 화합과 조화로 '만사형통', 운이 활짝 피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해요.그래서 복주머니,혹은 어린 아이들이나 성년에 접어 들기전의 저고리에 쓰이기도 한답니다.
ⓒ 김현자
글쎄요. 다른 분들께는 어떤 추억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골서 자란 제게는 농경문화의 큰 풍습인 정월대보름의 이런 저런 추억이 참 많습니다. 달집을 만들기 위하여 동네 오빠들이 관솔을 자르러 산으로 몰러 다니던 것도 생각나고요. 동네 한가운데 논에 만든 큰 달집에 불이 붙는 순간 마음이 들뜨던 것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서툴지만 차례를 기다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널뛰던 것도 생각납니다.

늦은 밤까지 깡통불을 돌리고 언제 왔는지 잠든 남동생 옷에서는 불냄새가 풀풀 났고요. 가까운 이웃동네 아이들과 불싸움하였던 무용담도 며칠을 두고 화젯거리였지요. 어린 기억 속에 있던 가물가물한 기억을 찾아 친정에 전화하였는데 어머니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젊은 사람들 없는 보름을 쓸쓸해 하였습니다.

"정월 대보름달처럼 두루두루 원만하고 풍성하였으면!"

ⓒ 최진연
신대마을(경기도 안성시 죽장면 칠장리)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박성수(44) 이장의 열정 때문이다. 박 이장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복조리 만드는 일을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다. 복조리는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신대마을 복조리는 완성단계에서 손잡이를 묶을 때 지그재그로 안과 밖을 한 번씩 더 엮어서 머리 땋기로 만들기 때문에 일반 막조리와는 다르다. 조리만들기 30년, 박 이장은 맥을 이을 사람을 찾고 있다. 누군가는 복조리 만드는 법을 전수해서 사라져가는 전통을 지켜가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최진연 사진집 '마음이 머무는 풍경>

ⓒ 최진연
신대마을이 복조리 마을로 명성을 얻은 것은 조리의 재료인 산죽이 지천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조릿대의 재료는 잔가지가 없는 1년생 대나무가 상품이다. 복조리는 1년 내내 만들지만 집중적으로 만드는 시기는 11~2월이다. 준비작업만 잘 끝내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만들기만 한다. 준비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찬바람이 불기 전 10월에 대나무를 베어다 햇볕에 말린다. 비를 맞으면 대가 썩어서 푸르스름한 고유의 빛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말린 대나무는 네 쪽으로 쪼갠다음 껍질을 벗기고 물에 반나절 정도 담근다. 그냥 사용하면 너무 뻣뻣해 복조리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에서 건져낸 조릿대는 한결 부드럽고 작업하기 쉽다. <최진연 사진집 '마음이 머무는 풍경>

ⓒ 최진연
한해의 풍년은 물론 1년 내내 복이 들어 온다는 믿음의 상징...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집집마다 복 많이 받으라고 조리를 마당에 던져 놓은 후 정월 대보름날 안에 돈을 받으러 다녔다. 복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조리값은 깎지 않았으며 쌀로 받아가던 시절도 있었다. 복조리는 안방 또는 마루 기둥에 걸어 놓고 그 안에 성냥 초,동전, 곡식 등을 담았다. <최진연 사진집 '마음이 머무는 풍경>


※복조리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어서 사진 출처 허락해주신 최진연(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의 최근 신간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그밖에 다른 풍습

▲ 복주머니에는 전체적으로 둥근 두루주머니와 귀퉁이가 각진 귀주머니 등이 있는데 새겨진 '복'자와 함께 아이들 금박댕기나 한복 고름에 쓰이는 꽃 문양은 좋은 운을 불러 들이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김현자
※다른 지방풍습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고향이 원산인 친정아버지와 경상남도 함양이 고향인 친정어머니의 정월대보름과 전라북도 김제의 풍습이 복합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이런 풍습들은, 다만 모두 제가 자라며 기억해 온 것을 토대로 친정 어머니께 확인하여 썼음을 말씀드립니다.

1. 보름날 새벽에 오곡밥을 짓기 위하여 쌀과 곡식을 씻은 쌀뜨물을 받아두었다가 밥이 다 된 다음 불씨를 물에 담그면 불씨가 꺼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데, 불씨가 모두 꺼지고 난 물을 지붕에 끼얹었습니다. 이것은 화재로부터 미리 예방하는 의미의 풍습이었습니다.

2. 마당 한귀퉁이에 세워 두었던 간짓대를 동쪽의 울에 대고 탁탁 두드리면서 새 쫒는 흉내 "훠이~ 훠이~!" 라고 큰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들짐승이나 새로부터 쌀을 비롯한 곡식을 보호하자는 의미에서였다고 합니다.

3. 키(체)에 오곡밥과 갖은 나물, 그리고 목화씨를 담아 소에게 먼저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소가 제일 먼저 먹는 것이 무엇인가로 한 해의 풍년을 점치기도 하였습니다. 소가 밥을 먼저 먹으면 그해에는 풍년,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 목화씨를 먼저 먹으면 그 해에는 목화농사가 잘 된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4. 정월 대보름 며칠 전에 아버지는 밭에 나가 호박넝쿨, 고춧대, 들깻대, 가지나뭇대를 한 지게 가득 지고 오셨습니다. 이것을 보름날 새벽에 울안에서 태웠지요. 이것들이 타면서 탁탁~! 큰소리를 내었는데 눈을 부비며 나가면 매캐한 연기가 마당 가득 퍼지고 있었습니다. 맵다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우리들을 불러서 불을 지키게 하곤 하셨는데 이것은 울안의 잡귀를 물리치는 처방이었다고 합니다.

5. 지난해 운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은 저고리 동정을 뜯어 달집에 태우거나 옷가지를 달집에 던져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지난해의 좋지 않은 운을 몰아내고 올해는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말하자면 액막이였던 셈이죠.

6. 정월 대보름날 이른 새벽에 보름 음식을 가족들과 나눠먹고 나면 어른들은 풍물패가 되어 동네 모든 집을 돌았습니다. 이때는 물론 어떤 집이든 모두 돌았으며 풍물패는 그 집의 정지나 장독은 물론 이곳 저곳을 큰 풍물소리와 함께 땅마다 야무지게 밟고 다녔습니다. 이것 역시 그 집의 터를 꼭꼭 다지는 의미의 액막이였다고 합니다.

이때 주인은 풍물패나 동네사람들에게 한상 가득 보름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고 쌀 등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모아진 돈은 동네의 '애경사'에 쓰였지요.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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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조리관련 사진 주신 최진연(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2006-02-11 20:14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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