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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서 고향 하늘 바라보니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9. 3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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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구름 걷힌 곳에 내 고향 있었네
한라산에서 고향 하늘 바라보니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강임(kki0421) 기자   
"야! 나, 고향 간다. 넌 안 오니?"
한가위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기 하루 전, 초등학교 동창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인점에서 시댁어른들께 드릴 선물을 고르고 있던 나는 친구의 전화에서 고향이라는 말에 "응? 무슨 고향!"하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그 동창생은 "너 벌써 고향도 잊었어? 네가 옛날에 살았던 동네 말야"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말한다.

그때서야 나는 "응…고향?"하며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고향. 어찌 잊었겠는가? 고향집 앞에는 금강이 흐르고, 뒤로는 고즈넉한 산이 있었다. 그리고 봄이 되면 그 뒷동산은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마을 어귀에는 수양버들나무가 가로수를 이루며 여름철 그늘을 만들어 줬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이런 명절이 다가올 때 한 번도 두고 온 내 고향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뭍에서 섬으로 시집온 지 20년이 지났지만 명절 때 고향을 찾은 때는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갓 시집 와서는 시부모님 마음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친정 가겠다는 말을 못했고, 이제는 그 습성에 젖어버렸다. 아니면 벌써 어쭙잖게도 집안 어른이 되어 버렸는데, 큰살림 맡아 하면서 어찌 친정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내 자신을 가두는 게 맘 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게다.

▲ 윗세오름 뒤에는 고향 마을이...
ⓒ2004 김강임
휴일 아침 TV를 켜니 화면에 고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친다. 와락 '나도 고향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설움으로 다가온다. 명절 때 친정 집 선산에 가서 친정 부모님들께 넙죽 큰절을 올리고 싶지만, 어디 그럴 수 있는 형편인가?

잠시 하던 일을 중단하고 아파트 베란다에 걸쳐 있는 한라산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조금은 서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등산을 결심했다. 추석 연휴를 틈타 객지에서 내려온 대학 2년생인 아들 녀석도 오늘은 고향의 포근함에 푹 빠져 있다.

"엄마, 저 모처럼 집에 왔으니 쉬고 싶은데, 아빠랑 한라산 가면 안돼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아들 녀석도 이제는 꽤 철이 들었는지, 아니면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는지 등산 채비를 한다.

한라산으로 향하는 길은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렸다. 안개를 뚫고 달리는 길이 온통 뿌옇다. 그런데 웬일인지 한라산 영실 입구에 다다르자 안개가 걷히고 가을 햇살이 비친다.

▲ 오백나한이 기다리는 한라산
ⓒ2004 김강임
한라산은 가을의 초입에 들어섰다. 늘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이 오백나한이다. 모양이 각기 다른 돌들의 형상에 오늘도 마음 속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 한라산 계곡도 가을의 초입에 들어가
ⓒ2004 김강임
졸- 졸- 졸-

한라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발길을 멈춘다. 아직은 설익은 낙엽 하나를 뚝-하고 따서 흐르는 계곡에 띄웠더니 어느새 물줄기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간밤에 한라산에는 무척 비가 많이 왔나보다.

해발 1400고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노라니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앞서가던 남편도 아들 녀석도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참다못한 아들 녀석은 저만치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와 내 등을 밀기 시작한다.

"너나 빨라 가거라. 엄만 쉬엄쉬엄 갈 테니."

그래도 그 녀석은 마음이 편치 않는지,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 병풍바위 구름 뒤에도 고향이 있네요.
ⓒ2004 김강임
병풍바위 앞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산을 에워싼 안개는 주위를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안개 속을 헤치고 산을 오르던 사람들도 산에 주저앉아 추석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 양탄자를 깔아 놓은듯
ⓒ2004 김강임
올 가을 단풍은 참 곱겠다. 한라산 계곡은 아직 울긋불긋하지는 않지만 모두 가을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지금 산 아래에서는 고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소리로 떠들썩한데 한라산은 그저 말이 없다. 마치 내 마음처럼 모든 것을 접어두고 있는 것 같다.

▲ 그놈! 성질도 급하군.
ⓒ2004 김강임
병풍바위를 지나 해발 1800고지에 이르니 빨갛게 물든 가을 단풍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저 녀석은 참 성질도 급하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주위 친구들과 함께 옷을 갈아입었으면 좋으련만. 아들 녀석이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고향을 찾은 사람들, 그리고 고향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엉켜 오르내리는 한라산. 산은 언제든지 자연 그대로다. 어느 땐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빨리 가라고 채찍을 가하기도 한다.

▲ 고향의 언덕에도 저 꽃이 피어 있겠지?
ⓒ2004 김강임
벼랑 끝에는 돌부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보라색 꽃들이 천지를 이뤘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의연하게 서 있는 가을꽃들이 청초해 보인다.

구름을 머리에 이고 산에 오르니, 그 위에는 가을 햇빛이 우리를 기다린다, 선작지왓에서 바라본 윗세오름은 고향마을 뒷동산 같았다. 고즈넉이 자리잡은 오름을 보니 동산에서 뛰어 놀던 어린시절 친구들이 생각난다. 이제는 까마득히 이름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동산 아래에는 늘 연기가 자욱했다. 지금 한라산에 하얗게 피어나는 저 안개처럼 말이다.

▲ 컵 라면에 김밥 그리고 캔 맥주 한 컵
ⓒ2004 김강임
윗세오름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계절을 지키는 까마귀들이다. 가지고 간 김밥을 풀어놓자 슬금슬금 다가온다. 오늘은 아들 녀석이 동행해 컵 라면을 3개 주문했다. 남편은 캔 맥주 주둥이를 툭- 하고 따더니 아들 녀석에게 맥주 한잔을 건넨다. 이제 대학교 2학년이니 맥주 한 컵쯤은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컵라면에 김밥, 캔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우리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남편과 아들은 자신들의 고향 정취에 푹 빠져 있을테지만, 나는 자꾸만 정상의 뒤편, 구름이 걷히는 고향 마을을 바라봤으니 말이다.

이산가족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고 가면 금방 갈 수 있는 곳인데도 왜 이렇게 친정 부모님 성묘 한번 제대로 가지 못했을까? 그러나 누가 알랴. 내가 내 고향을 헤아리는 심정을.

▲ 구름속에 가려진 오백나한이
ⓒ2004 김강임
그것도 순간. 찢어진 구름이 윗세오름을 덮어버리자 윗세오름 뒤로 피어오른 고향마을은 금세 하얀 구름으로 뒤덮였다. 내 고향의 그림자 함께.

▲ 저 구름 걷힌 곳이 내 고향?
ⓒ2004 김강임
정상에 피어오른 구름은 하산하는 내 뒤를 쫓더니 오름과 오름을 에워싸고 있다. 하산 길에 보이는 풍경은 오름과 오름이 어깨를 겨룬다. 희미하게 보이는 제주의 마을 풍경이 마치 두고 온 내 고향 마을처럼 정겹다.

2004/09/26 오후 9:21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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