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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읽기]노란손수건

세상사는얘기/박종국잎새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7. 9. 1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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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손수건>



윌리는 한 떼의 젊은이들로 들썩이는 오버하우젠 행 버스를 타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밝은 색 셔츠와 올이 풀린 청바지를 입고, 즐겁게 떠들어대며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아마도 오버하우젠을 지나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알트슈타트로 피크닉을 가는 모양이었다.

윌리도 4년 전에는 식구들과 그곳으로 자주 소풍을 가곤 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윌리와 그의 아내 엘자는 손을 잡고 천천히 산보를 즐기곤 했던 것이다. 사람이란 아름다운 일들을 더 잘 기억하는 법일까, 윌리는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수첩 속에는 엘자와 아이들이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이 들어 있었다. 수수한 외모, 그러나 맑고 따뜻한 눈을 가진 엘자는 어떻게 변했을까. 어린 아이들은 이제 자전거를 잡아 주지 않아도 좋을 만큼 컸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아빠를 기억하고 있을까.

윌리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오버하우젠으로 가는 이 길은 여전히 나무가 울창하구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상념에 몸을 맡긴 채 윌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살짝 치며 말을 걸었다.

"아저씨는 어디로 가세요?"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하나로 묶은 소녀였다.

"저희들은 지금 알트슈타트로 소풍 가는 길이에요. 그곳에서 오늘까지 맥주 축제가 열리거든요. 아저씨도 그리로 가시는 길이세요?"

소녀의 티 없는 모습에 윌리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미소였다.

"나도 그곳을 잘 알고 있어요. 해마다 이맘때면 굉장한 맥주 축제가 열리곤 했죠. 하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오버하우젠까지 간다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에게 가더니 커다란 보온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뜨거운 커피 좀 드시겠어요?"

소녀는 윌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보온병 뚜껑에 향기 좋은 커피를 한잔 가득 따랐다.

"한번 마셔보세요. 출발하기 전에 끓여온 커피에요. 아직 뜨겁죠?"

윌리는 소녀가 권하는 커피를 받아마셨다.

"아저씨는 여행에서 돌아오시는 길인 것 같네요."

아마도 먼지 덮인 그의 구두와 커다란 가방을 보고 하는 말인 듯싶었다. 잠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윌리는 천천히, 그러나 아주 고통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죠. 4년 동안의 긴 여행 말입니다. 나는…, 저기…, 북부의 형무소에 있었지요. 그리고 이제야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랍니다."

"가족은 있으신가요?"

소녀가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소."

"모른다구요?"

소녀가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글쎄요…. 감옥에 있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했었지요."

잠시 말을 멈춘 채 길게 숨을 몰아쉬던 윌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오랫동안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말입니다. 만일 견디기 어렵거나, 아이들이 귀찮게 자꾸 물어보면, 또 너무 고생스럽거든 나는 괜찮다구요. 새 남자를 얻어도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했지요. 내 아내 엘자는 아주 좋은 여자였어요. 훌륭한 여자였죠. 나에게 편지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더니 정말 편지를 하지 않더군요.3년 반 동안…."

윌리는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통의 무게를 견디려는 듯이 보였다.

소녀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래요."

윌리는 부끄러운 듯이 말을 이었다.

"지난 주, 가석방이 확실해졌을 때, 아내에게 다시 편지를 썼죠. 우리는 오버하우젠의 레벤호프에 살고 있었어요. 그곳으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떡갈나무가 한 그루 있지요.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썼어요. 만일 나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으면, 그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 놓으라구요. 만일 손수건이 없으면 나는 그냥 지나갈 테니까…."

"어쩌면!"

소녀가 놀라운 듯 소리치며 다른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윌리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얼른 오버하우젠이 가까워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윌리의 아내와 아이들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정말 떡갈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걸려 있을까 궁금한 듯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버스는 오버하우젠으로 들어가는 초입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곧 레벤호프를 지나게 될 터였다. 사람들은 모두 창가로 자리를 옮겨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윌리의 지난 세월만큼이나 고통스럽고 긴장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윌리는 더 이상 창 밖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미리 실망에 대비하기 위해 마음을 모질게 먹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윽고 버스는 레벤호프로 들어섰다. 순간, 젊은이들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기쁨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윌리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춤을 추었다. 윌리는 떡갈나무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떡갈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스무 장, 서른 장, 아니 수백 장이나 되는 손수건이 걸려 있었다. 떡갈나무 전체가 윌리를 환영하는 커다란 노란 깃발처럼 보였다.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후 1973년 돈(Dawn)이라는 그룹이 부른[Tie A Yellow Libb on Round The Ole Oak Tree]라는 노래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하면서 모두가 기억하는 따뜻한 이야기로 자리 잡게 되었답니다.]



[또 다른 이야기]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플로리다 주의 포트 라우더데일 해변으로 가는

버스는 언제나 붐볐습니다. 승객의 대부분이 휴가를 즐기러 가는 젊은 남녀이거나 가족인 그 버스의 맨 앞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옆에는 아까부터 그를 지켜보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허름한 옷에 무표정한 얼굴, 나이조차 짐작하기 힘든 그는 마치 돌부처 같았습니다. 버스가 워싱턴 교외의 휴게소에 멈춰 섰을 때 승객들은 너나없이 차에서 내려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바빴지만 돌부처 같은 남자만은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퇴역병사?'

'아냐, 배를 타던 선장?'

호기심에 가득 찬 여자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그는 한참 뒤에야 침묵을 깨고 괴로운 표정으로 사연을 틀어 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빙고. 4년을 형무소에서 보내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석방이 결정되는 날 아내에게 편지를 썼소. 만일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면 마을 어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 두라고.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난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론지 가 버리는거요."


사연을 알게 된 승객들은 그의 집이 있는 마을이 다가오자 하나 둘 창가 자리에 붙어 커다란 참나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남자의 얼굴은 지독한 긴장감으로 굳어갔고, 차 안엔 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앗! 저기 봐요. 저기…. "


그때 승객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커다란 참나무가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던 것입니다.


나무 아래엔 하루도 그를 잊어 본적이 없는 그의 아내가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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