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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오마이뉴스]43년 교직을 떠나는 아버지의 수구초심

박종국교육이야기/함께하는교육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3. 2.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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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교직 떠나는 아버지의 수구초심
  이수강(sugang2) 기자
2005년 2월28일. 오늘은 우리 가족과 저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날입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가 정년을 맞이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1962년에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니 장장 43년만의 일입니다. 1월, 2월이 지나고 3월 새 학년 새 봄이 되어야 비로소 '새 해'인 것 같던 우리 가족의 오랜 '관습'도 이제 과거가 된 듯합니다. 오늘, 이 사연을 한 시민기자의 '사는 이야기'로 써볼까 합니다.

지난 17일에는 아버지의 정년퇴임식이 있었습니다. 설날 연휴 얼마 뒤였지만, 자식들은 하루씩 연가를 내어 아버지 학교엘 갔습니다. 저도 서울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니 교문에 '이산구 교장선생님 정년퇴임을 축하합니다-용봉초등학교'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전주에서 멀지 않지만 논밭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 시골학교입니다. 플래카드 밑으로 종업식을 마친 저학년 학생들이 재잘재잘 하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 전북 완주군 용봉초등학교 전경. 전주 인근이지만 전형적인 농촌 학교 풍경입니다.
ⓒ2005 이수강
용봉초등학교는 저와도 인연이 깊은 학교입니다. 학교가 소재한 곳이 '전북 완주군 봉동읍 구만리 470-1번지'인데, 저의 본적이 '봉동읍 구만리 620번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큰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며 고향을 지키고 있고, 그 옆으로는 팔순의 고모가 살고 있습니다. 명절 때마다 마을 어귀의 이 학교를 늘 지나치곤 했습니다.

국민학생으로 6년, 평교사로 8년6개월, 교장으로 4년6개월

하지만 아버지와 이 학교와의 인연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실질적인 1회로 이 학교를 다녔으며, 젊었을 때 두 차례에 걸쳐 8년6개월간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퇴임을 앞두고 '수구초심'이라는 말처럼 2000년 9월 이 학교의 14대 교장으로 부임하신 뒤 이번에 퇴임을 맞이한 것입니다.

▲ 아버지의 초임교사 시절 사진
ⓒ2005 이수강
이번 설날과 퇴임식 때 고향에 가서 아버지에 대해 '취재'를 조금 했습니다. 이 학교가 세워진 것은 1949년이라고 합니다. 졸업년도를 '88년도'(단기 4288년=1955년)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가까운 데 정식 학교가 없었는데, 새로 '용봉국민학교'가 개교하면서 주변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옮겨왔다고 합니다. 용봉국민학교라는 이름은 '용진면(龍進面)'과 '봉동읍(鳳東邑)'의 첫 자를 따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용과 봉황의 학교라니, 시골의 학교 이름치고는 참으로 거창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구만리'라는 말도 그렇죠. 앞날이 구만리 같은 마을.

용봉국민학교가 생기자 다른 학교를 다니던 셋째 큰아버지, 넷째 큰아버지는 3학년과 2학년에, 다섯째이자 막내인 아버지는 1학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실제 나이는 연년생이 아니지만, 아직 나라꼴이 갖춰지기 전이라 그러한 일은 별 이상한 일도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큰아버지들과 아버지는 나란히 이 학교의 4회, 5회, 6회 졸업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는 이 학교가 배출한 '6년짜리 졸업생'의 첫 회가 된 셈입니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닌 저는 아니지만, 둘째 큰아버지의 여섯 아들 모두를 비롯해 친척 일가의 많은 분들이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학교는 아버지의 학교이고, 친척 일가의 학교이고, 마을의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모교 아닌 '부교(父校)'라고 할까요.

▲ 아버지가 두 차례 용봉국민학교 재임 시기 중간에 부임했던 완주군 화산면 춘산국민학교. 이 학교 관사에 살았을 때 저를 낳았다고 합니다(1972년). 사진은 제 누나와, 누나의 친구입니다. 지금은 폐교가 됐다고 합니다.
ⓒ2005 이수강
이후 아버지는 전주북중과 전주사범학교를 거쳐 1962년, 약관의 나이에 진안군 안천국민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았습니다. 초임 교사 시절 월급으로 1년 적금을 넣어 송아지 한 마리를 사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군복무를 마치고 부임한 전북 진안군 상전국민학교도 저에게 뜻 깊은 곳입니다. 호남 제일의 오지로 꼽히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의 한 산골 마을에 부임한 '총각 선생님'은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수동리 김씨 댁 둘째 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이 연상되는 이야기입니다. 저의 외가가 된 이 마을은, 그러나 몇 년 전 금강 상류를 막은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이 되었고, 제 부모의 사랑이 깃든 상전국민학교도 물 속으로 잠기고 말았습니다. 진안 출신인 한승헌 변호사의 말을 빌면 스쿠버 다이빙을 해서야 가볼 수가 있게 됐습니다.

이어 고향인 용봉국민학교에 교사로 돌아온 것은 1969년 6월이었습니다. 이때 1972년 2월까지 한 번, 다시 1974년 3월부터 1979년 2월까지 또 한 번, 제자이자 후배들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숙직이라도 가면 어머니가 밥 해먹을 쌀을 빨간 라면 봉지에 싸고 노란 고무줄로 묶어서 건네주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긴 여정을 거쳐 1999년 9월 교장으로 승진한 뒤 한 학교에서 1년을 마치고 용봉초등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이 학교를 학생으로 6년, 평교사로 8년6개월, 교장으로서 4년6개월, 모두 합쳐 19년을 다닌 셈입니다.

'천오백 건아'라던 학생수는 270명으로

퇴임식은 창 너머 고운 흙빛이 비치는 학교 급식실에서 열렸습니다. 이틀 전 56회 졸업생이 졸업을 했다지만, 이 학교에는 강당이 없었습니다. 식장 가운데에는 이날 종업식을 마친 4학년, 5학년 어린이들이 앉았고, 그 둘레로 학교 교사들과 학부모, 지역 주민, 가족들이 자리했습니다. 오라지 않았지만, 졸업을 마친 6학년 어린이들도 몇몇이 참석했습니다. 8순의 고모도 왔고, 한 학부모가 지역 라디오에 보낸 사연을 채택한 방송사로부터 꽃바구니가 도착하기도 했습니다.

이 학교를 나온 사촌형은 자신이 다닐 때에는 교가 중에 '천오백 건아'라는 가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교생이 15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농촌 학교로서는 상당히 큰 학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취락지구가 많은 학교로 꼽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교생이 270여명입니다. 한 학년이 두 반씩이고, 특수학급을 합쳐 13학급이라고 합니다. 날로 줄어든 학생 수 때문에 '천오백 건아'라는 가사는 '용봉의 건아'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꽃다발과 기념품 증정이 있고 학생, 학부모, 교사 순서로 송사를 읽었습니다. 6학년 한바다반의 이현희 학생은 송사에서 "지난 10월 서울·강화도로 현장체험학습을 갔을 때 차 안에서 퀴즈문제를 내주시고 잘 맞힌 친구들에게 상품도 주셨죠?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맛있는 귤도 사주셨고요. 늦게나마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 아버지가 70년대 용봉국민학교에 재임하던 시절. 갑자기 찍은 사진인지 슬리퍼를 신었습니다.
ⓒ2005 이수강
아버지의 퇴임사 순서가 왔습니다. 퇴임사를 시작하는데 여전히 어린이들이 웅성웅성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나 어린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이겠지요. 아버지는 "4학년!"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4학년 학생들이 동시에 "예!" 했습니다. 또 "5학년!" 하자 "예!"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병아리들 소리 같아서 조금 웃음이 나왔습니다. 자리에 함께 있던 어른들도 조금 웃었던 것 같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였을까요.

아버지는 준비된 원고를 잠시 멈추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말은 평소에 하던 훈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선생님은 퇴임사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고, 여러분과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그러자 학생들이 이 말 뜻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각 담임 선생님이 엄한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교단에 선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은 숙연하고 코끝이 찡했습니다. 이제 저러한 모습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랬고, 평생 저렇게 교단에 섰을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못하고서 아버지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모습만 봐왔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막상 교직을 떠나려 하니 헤아릴 수 없는 아쉬움이 가슴에 스며듭니다"라며 "용봉초등학교는 저의 어린 시절의 꿈을 가꾼 배움터였고, 젊은 교단 교사 시절 십년 가까이 이곳에서 보냈으며, 다시 교직 생활의 마무리를 이곳에서 함으로써 이 학교는 저의 전 생애를 통하여 잊지 못할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교직의 길을 마무리하면서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한 아름 안고 남은 삶을 뜻 깊게 보내려고 합니다"라며 학생들에게 "먼 곳에서나마 여러분의 성장을 지켜보고 성공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제 건강보험증에 아버지가... 깨끗한 보험증으로 남기를

퇴임식을 마치고 교장실에서 담소를 나누는데, 노크도 없이 한 여학생이 문을 열고는 꼬깃꼬깃 접힌 편지를 건네주고 또르르 달음질을 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학생 이름을 부르며 "편지 봉투도 없냐?"고 웃었습니다. 인근의 식당에서 뒤풀이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준비해간 떡을 참석자들에게 돌렸습니다. 식당 아주머니는 "이제 동창회장으로 오세요"라고 웃으며 환송을 했습니다.

학교신문인 '용봉어린이신문'에 '일문일답'이 실려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를 그만두시면 무엇을 하실 건가요"라고 6학년 김시온 학생이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은 많아요. 우선, 사회에 나가서 자유롭게 자원 봉사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글을 잘 모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계시면 이 분들을 위하여 글을 읽고 쓸 줄 알도록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하려고 하고, 기회가 되면 문화재나 유적지 같은 우리 고장의 관광 안내도 하고 싶습니다. 또 영어 공부를 좀더 해서 더 늙기 전에 세계 배낭여행이라도 하려고 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오는 3월부터는 이제 새로운 학생을 받는 대신, 평생교육원의 영어와 한자 수업을 받기 위해 등록을 했다고 합니다. 일전에 사위가 사드린 디지털 카메라에 취미를 붙여, 집에 컴퓨터와 고속인터넷망도 갖췄다고 합니다.

이제 퇴임을 하지만, 아버지는 행복한 분이기도 합니다. 지금 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 같은 '40년 근속'을 했고, 다사다난하지 않을 리 없지만 그래도 대과없이 정년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혈압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몸도 건강한 편입니다. 이 아들이 정년 전에 장가를 들지 못해 흰머리를 늘게 하긴 했지만요. 사회적으로도 '젊은 퇴직자'들이 사회에서 경험을 살리며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거리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요새 '폐경'(閉經)이란 말 대신 '완경(完經)'이란 말을 쓰듯이, '정년(停年)'이라는 말보다는 '완업(完業)'과 같은 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도 싶습니다.

3월1일에는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제 건강보험증에 아버지, 어머니를 부양가족으로 올리는 일입니다. 이제 제가 부양가족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가 저의 부양가족이 됩니다. 새로 나올 건강보험증에 아버지 어머니 이름으로 병원 출입 기록이 안 적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리고 여유로운 마음과 몸으로 제2의 인생을 잘 가꾸길 바랍니다.

▲ 아버지의 정년퇴임을 축하합니다.
ⓒ2005 이수강

반 다이크의 시 '무명교사 예찬론'

저는 아버지 퇴임사에 이어 '가족 대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한 식순이 예정돼 있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하기에 앞서 PC방에서 시 하나를 출력했습니다. 반 다이크라는 시인이 쓴 '무명교사 예찬론'이 그것입니다. 예전에 아버지의 교원수첩에서 이 시가 인쇄돼 있는 것을 본 적이 기억나서였습니다. 교사들은 모두 알고 있을 시입니다. 그러나 막상 가족 인사를 하려니, 아들이 아버지 퇴임식에서 이러한 시를 읽는 게 너무 외람된 것 같아, 프린트본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보다 더 무명인 교사들도 떠올랐고요. 대신 이 글에서, 아버지 뿐 아니라,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드는 이름 높은 교육학자"가 아닌 수많은 무명의 교사들을 생각하면서 그 시를 읽어볼까 합니다.

무명교사 예찬론

나는 헌신적으로 일하는 무명의 교사를 예찬하노라. 전쟁에서 승자로 이름을 날리는 것은 위대한 장군이지만 전투에서 실제로 승리를 가져오는 이는 무명의 병사로다.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드는 것은 이름 높은 교육학자이지만 젊은이를 올바르게 이끄는 이는 무명의 교사로다.

그가 사는 곳은 어둡고 그늘진 곳이며 어려운 일로 가득차 있다. 그를 위하여 불러주는 나팔 없고 그를 태우고자 기다리는 황금마차 없으며 금빛 찬란한 훈장을 그의 가슴에 달아주지도 않는다. 그는 묵묵히 어둠의 전선을 지키며 무지와 몽매의 참호를 향하여 돌진하며 젊은이를 해치는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자 하루도 쉬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도다.

무명의 교사는 잠자고 있는 영혼을 일깨우며 게으른 자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열심히 하는 자를 격려하며 방황하는 자에게 나아갈 길을 찾아준다.

지식은 책에서 배울 수 있으되 지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오직 인간적이고 헌신적인 교사를 만남으로써 얻을 수 있으리라. 무명의 교사는 학문하는 즐거움을 젊은이에게 전해주며 가장 값진 정신적 보물을 젊은이에게 나누어 준다. 무지와 몽매의 삶을 밝히기 위해 그가 켜는 수많은 촛불 그 빛은 훗날 그에게 되돌아와 그를 기쁘게 하나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받는 진정한 보상이로다.

무명의 교사보다 더 예찬 받을 이 이 세상에 과연 누가 있으랴. 그는 하는 일에 비추어 보면 임금으로 대접받아 마땅함에도 모든 사람을 위한 봉사자요 머슴으로 그 일생을 살아가는 성자와도 같도다.(박철홍 역)


'용봉어린이신문' 2월12일자에 실린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

다음은 '용봉어린이신문' 2월12일자에 실린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의 전문입니다.

- 교장 선생님은 젊어 보이셔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젊어 보이시나요? (6-2 오보람 외)
"간혹 다른 사람으로부터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는데 실은 내가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다니니까 젊어 보일 것입니다. 실망했나요?"

- 다시 교장 선생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6-1 박지원)
"꿈과 사랑이 넘치는 즐거운 학교를 만드는 것이지요.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고 선생님은 꿈과 사랑을 심어주는 곳이 학교 아닙니까? 음악실에서는 아름다운 합창 소리가 울려 퍼지고, 미술실에서는 아름다운 꿈을 그리고, 운동장에서는 활기차게 운동을 하는 등 저마다 특기를 살리는 많은 활동이 교내에서 이루어지는 좀 더 즐거운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나는 그런 좋은 환경을 만들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 우리 학교 학생들의 장점과 단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6-1 이한솔)
"우리 학교 학생들은 매우 착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인사성이 바르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 등 장점이 많지요. 굳이 단점을 말한다면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의 주장이나 의견을 조리 있게 이야기한다거나, 패기 차게 운동하는 모습이 좀 부족하다고 할까요?"

- 교직 생활하시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학생 있다면? (6-1 이한솔)
"내가 산골학교에서 총각 선생님으로 3학년을 담임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어린이날 행사를 강당에서 학예회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 반 황의전이라는 학생이 '돌아가신 어머님께'라는 편지를 써서 읽는 순서였습니다. 그 어린 학생이 쓴 글을 읽는데 그 글의 내용이 얼마나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하던지 읽는 학생도 울고 듣던 학생과 선생님 모두가 한없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습니다. 40년이 넘었어도 전혀 잊히지 않습니다. 그 학생은 이제 커서 경찰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 교직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실 때는 언제인가요? (6-1 윤상근)
"선생님은 항상 자기의 제자가 잘 되는 것을 보고 가장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제자가 커서 성공했다고 편지나 전화를 주었을 때, 또 길거리에서 반갑게 인사할 때 보람을 느끼죠."

-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마음에 드는 행동과 정말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은 어떤 것인가요? (6-1 황은혜)
"어린이는 어린이다울 때, 예의 바를 때, 순수할 때에 마음에 들고,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려고 하고 속과 겉이 다른 행동을 할 때 괜히 미워지더라고요."

- 교장 선생님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6-1 이민준)
"내가 교단에 섰다가 중간에 군대에 입대하게 됐는데, 선생님이 입대한다고 도로 양쪽에 전교생이 나와서 환송하기 위하여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버스가 왔는데 우리 반 학생이 버스에 올라타고 내리지 않은 학생이 있는가 하면, 버스를 못 가게 길을 막고는 엉엉 울어댔는데 나도 같이 울었지요. 그 동안 손님을 실은 버스가 못 가고 한 5분 동안 실랑이를 벌였을 때."

- 선생님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요? (2-2 김미리내)
"선생님은 그렇게 힘든 일은 없지만, 간혹 문제성이 있는 어린이가 문제를 여기저기에서 일으키고 다닐 때."

- 우리 학교를 그만 두시면 무엇을 하실 건가요? (6-1 김시온)
"하고 싶은 일은 많아요. 우선, 사회에 나가서 자유롭게 자원 봉사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글을 잘 모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계시면 이 분들을 위하여 글을 읽고 쓸 줄 알도록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하려고 하고, 기회가 되면 문화재나 유적지 같은 우리 고장의 관광 안내도 하고 싶습니다. 또 영어 공부를 좀더 해서 더 늙기 전에 세계 배낭여행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 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셔요?(6-2 우태산)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말에 말에게 물을 먹이려면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가 21세기를 지배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듯이 자주적인 학습태도가 중요한데 자주적인 학습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들도록 해야 합니다."

2005/02/28 오전 8:04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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