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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28일. 오늘은 우리
가족과 저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날입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가 정년을 맞이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1962년에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니
장장 43년만의 일입니다. 1월, 2월이 지나고 3월 새 학년 새 봄이 되어야 비로소 '새 해'인 것 같던 우리 가족의 오랜 '관습'도 이제
과거가 된 듯합니다. 오늘, 이 사연을 한 시민기자의 '사는 이야기'로 써볼까 합니다. 지난 17일에는 아버지의 정년퇴임식이 있었습니다. 설날 연휴 얼마 뒤였지만, 자식들은 하루씩 연가를 내어 아버지 학교엘 갔습니다. 저도 서울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니 교문에 '이산구 교장선생님 정년퇴임을 축하합니다-용봉초등학교'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전주에서 멀지 않지만 논밭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 시골학교입니다. 플래카드 밑으로 종업식을 마친 저학년 학생들이 재잘재잘 하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민학생으로 6년, 평교사로 8년6개월, 교장으로 4년6개월 하지만 아버지와 이 학교와의 인연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실질적인 1회로 이 학교를 다녔으며, 젊었을 때 두 차례에 걸쳐 8년6개월간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퇴임을 앞두고 '수구초심'이라는 말처럼 2000년 9월 이 학교의 14대 교장으로 부임하신 뒤 이번에 퇴임을 맞이한 것입니다.
용봉국민학교가 생기자 다른 학교를 다니던 셋째 큰아버지, 넷째 큰아버지는 3학년과 2학년에, 다섯째이자 막내인 아버지는 1학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실제 나이는 연년생이 아니지만, 아직 나라꼴이 갖춰지기 전이라 그러한 일은 별 이상한 일도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큰아버지들과 아버지는 나란히 이 학교의 4회, 5회, 6회 졸업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는 이 학교가 배출한 '6년짜리 졸업생'의 첫 회가 된 셈입니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닌 저는 아니지만, 둘째 큰아버지의 여섯 아들 모두를 비롯해 친척 일가의 많은 분들이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학교는 아버지의 학교이고, 친척 일가의 학교이고, 마을의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모교 아닌 '부교(父校)'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군복무를 마치고 부임한 전북 진안군 상전국민학교도 저에게 뜻 깊은 곳입니다. 호남 제일의 오지로 꼽히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의 한 산골 마을에 부임한 '총각 선생님'은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수동리 김씨 댁 둘째 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이 연상되는 이야기입니다. 저의 외가가 된 이 마을은, 그러나 몇 년 전 금강 상류를 막은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이 되었고, 제 부모의 사랑이 깃든 상전국민학교도 물 속으로 잠기고 말았습니다. 진안 출신인 한승헌 변호사의 말을 빌면 스쿠버 다이빙을 해서야 가볼 수가 있게 됐습니다. 이어 고향인 용봉국민학교에 교사로 돌아온 것은 1969년 6월이었습니다. 이때 1972년 2월까지 한 번, 다시 1974년 3월부터 1979년 2월까지 또 한 번, 제자이자 후배들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숙직이라도 가면 어머니가 밥 해먹을 쌀을 빨간 라면 봉지에 싸고 노란 고무줄로 묶어서 건네주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긴 여정을 거쳐 1999년 9월 교장으로 승진한 뒤 한 학교에서 1년을 마치고 용봉초등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이 학교를 학생으로 6년, 평교사로 8년6개월, 교장으로서 4년6개월, 모두 합쳐 19년을 다닌 셈입니다. '천오백 건아'라던 학생수는 270명으로 퇴임식은 창 너머 고운 흙빛이 비치는 학교 급식실에서 열렸습니다. 이틀 전 56회 졸업생이 졸업을 했다지만, 이 학교에는 강당이 없었습니다. 식장 가운데에는 이날 종업식을 마친 4학년, 5학년 어린이들이 앉았고, 그 둘레로 학교 교사들과 학부모, 지역 주민, 가족들이 자리했습니다. 오라지 않았지만, 졸업을 마친 6학년 어린이들도 몇몇이 참석했습니다. 8순의 고모도 왔고, 한 학부모가 지역 라디오에 보낸 사연을 채택한 방송사로부터 꽃바구니가 도착하기도 했습니다. 이 학교를 나온 사촌형은 자신이 다닐 때에는 교가 중에 '천오백 건아'라는 가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교생이 15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농촌 학교로서는 상당히 큰 학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취락지구가 많은 학교로 꼽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교생이 270여명입니다. 한 학년이 두 반씩이고, 특수학급을 합쳐 13학급이라고 합니다. 날로 줄어든 학생 수 때문에 '천오백 건아'라는 가사는 '용봉의 건아'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꽃다발과 기념품 증정이 있고 학생, 학부모, 교사 순서로 송사를 읽었습니다. 6학년 한바다반의 이현희 학생은 송사에서 "지난 10월 서울·강화도로 현장체험학습을 갔을 때 차 안에서 퀴즈문제를 내주시고 잘 맞힌 친구들에게 상품도 주셨죠?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맛있는 귤도 사주셨고요. 늦게나마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준비된 원고를 잠시 멈추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말은 평소에 하던 훈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선생님은 퇴임사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고, 여러분과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그러자 학생들이 이 말 뜻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각 담임 선생님이 엄한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교단에 선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은 숙연하고 코끝이 찡했습니다. 이제 저러한 모습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랬고, 평생 저렇게 교단에 섰을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못하고서 아버지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모습만 봐왔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막상 교직을 떠나려 하니 헤아릴 수 없는 아쉬움이 가슴에 스며듭니다"라며 "용봉초등학교는 저의 어린 시절의 꿈을 가꾼 배움터였고, 젊은 교단 교사 시절 십년 가까이 이곳에서 보냈으며, 다시 교직 생활의 마무리를 이곳에서 함으로써 이 학교는 저의 전 생애를 통하여 잊지 못할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교직의 길을 마무리하면서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한 아름 안고 남은 삶을 뜻 깊게 보내려고 합니다"라며 학생들에게 "먼 곳에서나마 여러분의 성장을 지켜보고 성공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제 건강보험증에 아버지가... 깨끗한 보험증으로 남기를 퇴임식을 마치고 교장실에서 담소를 나누는데, 노크도 없이 한 여학생이 문을 열고는 꼬깃꼬깃 접힌 편지를 건네주고 또르르 달음질을 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학생 이름을 부르며 "편지 봉투도 없냐?"고 웃었습니다. 인근의 식당에서 뒤풀이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준비해간 떡을 참석자들에게 돌렸습니다. 식당 아주머니는 "이제 동창회장으로 오세요"라고 웃으며 환송을 했습니다. 학교신문인 '용봉어린이신문'에 '일문일답'이 실려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를 그만두시면 무엇을 하실 건가요"라고 6학년 김시온 학생이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은 많아요. 우선, 사회에 나가서 자유롭게 자원 봉사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글을 잘 모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계시면 이 분들을 위하여 글을 읽고 쓸 줄 알도록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하려고 하고, 기회가 되면 문화재나 유적지 같은 우리 고장의 관광 안내도 하고 싶습니다. 또 영어 공부를 좀더 해서 더 늙기 전에 세계 배낭여행이라도 하려고 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오는 3월부터는 이제 새로운 학생을 받는 대신, 평생교육원의 영어와 한자 수업을 받기 위해 등록을 했다고 합니다. 일전에 사위가 사드린 디지털 카메라에 취미를 붙여, 집에 컴퓨터와 고속인터넷망도 갖췄다고 합니다. 이제 퇴임을 하지만, 아버지는 행복한 분이기도 합니다. 지금 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 같은 '40년 근속'을 했고, 다사다난하지 않을 리 없지만 그래도 대과없이 정년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혈압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몸도 건강한 편입니다. 이 아들이 정년 전에 장가를 들지 못해 흰머리를 늘게 하긴 했지만요. 사회적으로도 '젊은 퇴직자'들이 사회에서 경험을 살리며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거리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요새 '폐경'(閉經)이란 말 대신 '완경(完經)'이란 말을 쓰듯이, '정년(停年)'이라는 말보다는 '완업(完業)'과 같은 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도 싶습니다. 3월1일에는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제 건강보험증에 아버지, 어머니를 부양가족으로 올리는 일입니다. 이제 제가 부양가족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가 저의 부양가족이 됩니다. 새로 나올 건강보험증에 아버지 어머니 이름으로 병원 출입 기록이 안 적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리고 여유로운 마음과 몸으로 제2의 인생을 잘 가꾸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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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8 오전 8:04 ⓒ 2005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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