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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읽는 금은(金銀) 이야기

한국작가회의/문학행사공모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8. 11. 12.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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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호 (2008.11.12)


고전에서 읽는 금은(金銀) 이야기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함경도 여러 곳에서는 일찍부터 광산이 개발되었다. 조선말에는 벌써 노천 금광이 폐광이 되어 음산한 분위기를 띠는 곳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안핵사로 함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영흥의 금파촌에 들렀을 때 그곳 금광은 이미 폐광이 되어 있었다. 그가 지은 「금파촌에 들러(過金坡村)」라는 시의 일부를 보면 이러하다.


                    


나는 『한시로 엮은 한국사 기행』(범우사, 1996)과 『한시기행』(이가서, 2005)에서 이 시를 다루면서, 조선후기의 광업의 실태를 문학작품 속에서 찾아보겠다고 생각했다. 광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작고하신 큰 선생님으로부터,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문명과 문화를 이해하려면 은의 생산과 유통 양상을 이해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뒤 자료를 일부 모으기는 했으나 관련 사항을 글로 발표한 적은 없었다.


2. 


그런데 최근 일본 학자가 자국의 근세 문화에 관해 쓴 책을 읽다가 17세기에 이르러 일본의 은 생산량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을 차지함으로써 일본이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내용에 접했다. 게다가 당시에 은을 정련하는 고급 기술은 일본에 없었으나, 16세기 중엽의 조선이 지니고 있던 비밀 기술을 일본의 하카다(博多)를 통해 수입했다고 하는 언급도 있었다. 당시 은 정련법이란, 납을 은광석에 섞어 함께 태워 엉기게 한 것을 다시 쇠 화로에 넣고 재를 넣어 태워서 납은 재 속에 스며들게 하고 은은 위로 뜨게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일본의 은 정련법이 조선에서 몰래 들여온 것이라는 일본 학자의 설에 깜짝 놀라,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 그 사실을 언급한 것이 없는지 문헌을 뒤져보았다. 그러다가 바로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관련 조항이 있었다. 나는 그 내용에서, 오늘날 기업의 고급 기술을 다른 나라에 팔아먹는 일을 개탄하는 ‘시인초화(市人招禍)’의 성어를 뽑아내어, 내가 현재 담당하는 ‘KBS 시사고전’에서 밝힌 바 있다.


정말 『패관잡기』는 역대 상식의 보고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은에 관한 기록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왜인들은 처음에는 납으로 은을 만드는 법을 몰라 연철[납쇠]만 가지고 왔었다. 그런데 중종 말년에 저자의 어떤 사람이 은장이를 데리고 몰래 왜인의 배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가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때부터 왜인이 은냥을 많이 가지고 왔으므로 서울의 은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명나라에 가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은을 가지고 갔으며, 장사치들은 의주로 가지고 가 그곳 사람들에게 팔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와의 사적인 무역을 금했으므로, 사람들이 은을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엄밀하게 수색했다. 그래서 수 년 사이에 옥사가 자주 일어나 매를 맞고 죽은 자도 있고, 멀리 변방으로 이사 간 자도 있으며, 혹은 밖에서 부역을 하다가 도망한 자고 있고, 혹은 몇 달 동안 고문을 당한 자도 생겼다. 이렇게 되자 은을 무역하는 일이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왜인은 은화를 배에 싣고 중국 영파부(寧波府)에 가서 팔기도 하고, 또 복건·절강 사람들이 몰래 일본에 가서 은을 바꾸어 사기도 했다. 이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은이 점점 귀해졌다. 게다가 이 무렵 복건 사람이 총포를 왜인에게 가르쳤으므로 왜인은 이때부터 총포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적은 뒤, 어숙권은“그때 상인이 은 만드는 법을 전하지 않았던들 그 화와 폐단이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겠는가?”라고 한탄하였다.

 

3. 


한편, 상촌 신흠(申欽, 1566-1628)은 『잡록』에서 우리나라 은광의 성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 동방에는 은광이 많기 때문에 고려 말년에 중국이 많이 요구해서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조[조선] 초에 여러 번 중국에 은자 바치는 것을 면제받고자 아뢰어 허락을 얻고 보니 그것을 국화(國貨)로 사용할 수도 없으므로 역대의 임금이 그대로 지켜서 마침내 은 캐는 것을 금하고 법령의 맨 첫머리에 나타내서, 심지어 역관 가운데 명나라 서울에 갈 적에 만약 사사로이 싸 가지고 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어 심지어 죽이기도 했다. 그 후 2백 년이 지나 임진년 왜란 때 중국에서 은을 우리나라에 나누어 주고, 군량과 군상(軍賞)도 모두 은을 썼다. 이러자 은화가 크게 유통하여 중국과의 통상무역 금지법이 폐지되었으므로, 시정에 매매하는 무리들도 오직 은이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부자를 따졌다. 그 뒤로 탁지[호조]의 경비와 중국에 가는 사신이나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이 막대하게 되자 은값이 마구 올라가서 민간에서 매점하는 자가 크게 이익을 보았다. 조정에서의 탐관오리들의 뇌물 거래도 은으로 하게 되어, 관작을 임명받는 것이나 형벌을 면하는 데에도 모두 이것으로 소개를 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도 『성호사설』의 ‘은화’라는 조항에서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아서 은광이 바둑판처럼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다고 말하고, “백성이 사사로 캐는 것은 금하고, 관(官)에서 거두는 세금이 과중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대개 남모르게 숨기게 된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수용하는 은과 옥은 모두 일본 것을 들여오는데, 또 이것은 다 북경 저자로 빠져 가버린다”라고 개탄했다.


4. 


선인들은 금광이나 은광에 관해 적으면서 표면적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개탄했지만, 그들이 남긴 시문은 결제수단으로서 금은이 지닌 경제적 위상과 그것이 실물경제 갖는 관계에 대해 일정한 식견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 자신은 그동안 순문학이나 순수 지식학에만 관심을 두어, 우리 문화의 하부구조와 관련된 자료들에 그다지 흥미를 두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 경제와 우리 경제의 불안한 정세가 나 자신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선인들이 남긴 고전의 세계가, 삶의 현장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을, 종전에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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