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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는 어떻게 해서 냉각이 잘 되었을까

한국작가회의/오마이뉴스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8. 12. 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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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는 어떻게 해서 냉각이 잘 되었을까
[답사] 현풍 석빙고를 찾아서
  박종국 (jongkuk600)
  
▲ 현풍 석빙고 17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전하는 현풍 석빙고는 아직도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당시 고을마다 얼음곳간을 둔 것이 아니었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현풍현(玄風縣)에 석빙고를 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 박종국
현풍석빙고

 

창녕, 영산석빙고에 이어 현풍석빙고를 찾았다. 언뜻 보니 출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뒤돌아가 보니 능선을 향하여 돌아앉아 남향하고 있다. 입구에는 옹벽을 쌓았다. 바깥바람을 막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 출입구는 능선 쪽인 남쪽에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입구가 자물쇠로 잠겨 있어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외형적으로 보아 축조 방법이나 시설 등은 경주·안동·창녕 등 조선 후기의 석빙고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런데 연전에 답사했을 때보다 석빙고 전체가 깔끔하게 잘 단장되어 있었다.

 

  
▲ 현풍 석빙고 옹벽 현풍 석빙고는 능선을 향하여 돌아앉아 남향하고 있다. 입구에는 옹벽을 쌓았다. 바깥바람을 막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
ⓒ 박종국
옹벽

 

안내 자료에 따르면 현풍의 석빙고는 빙실 길이 9m, 너비 5m, 높이 6m로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는 무지개형인 홍예(虹霓)를 틀어 구성한 석빙고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고, 여름에 얼음이 녹지 않도록 통풍과 배수가 고려되어 있다. 17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전하는 이 석빙고는, 아직도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당시 고을마다 얼음곳간을 둔 것이 아니었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현풍현(玄風縣)에 석빙고를 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현풍 석빙고

 

이 석빙고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1년 11월 석빙고 주위의 보수 작업 때 '숭정기원후2경술11월'이라 쓰인 건성비가 발견됨으로써 1630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경주 석빙고(1733)와 안동 석빙고(1737∼40)·창녕(1742) 석빙고 보다 100여년 이상 앞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석빙고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석빙고는 아직도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신라나 고려 때 만든 빙고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경주 석빙고와 안동 석빙고, 영산 석빙고, 창녕 석빙고,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는 모두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 현풍 석빙고 출입구 능선을 따라 옹벽을 설치한 옹벽. 출입구는 굳게 잠겨 있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 박종국
옹벽

 

석빙고의 원리는 무엇일까? 매번 석빙고를 만날 때마다 생각해 보는 의구심이다. 겨울 얼음 저장 이후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도 얼음은 정말 녹지 않았을까. 물론 녹기는 했지만 미미한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찬 기운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석빙고의 원리는 무엇일까?

 

그 원리는 절묘한 천장 구조에 있다. 대개 석빙고의 화강암 천장은 1∼2m의 간격을 두고 4,5개의 아치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각각의 아치형 천장 사이는 움푹 들어간 빈 공간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바로 비밀의 핵심이다. 내부의 더운 공기를 가두어 밖으로 빼내는 일종의 에어포켓인 셈이다. 얼음을 저장하고 나면 내부 공기는 미세하지만 조금씩 더워진다. 여름에 얼음을 꺼내기 위해 수시로 문을 열어야 하니 더욱 그러하다. 더운 공기는 위로 뜨고. 이 더운 공기는 뜨는 순간 에어포켓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에어포켓 위쪽의 환기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했으니 그 완벽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내부 온도는 초여름에도 0°도 안팎에 머물렀다.

 

  
▲ 현풍 석빙고 배기구 석빙고 위쪽에 두 개의 배기구가 있다.
ⓒ 박종국
석빙고

 

그 비결은 이것만이 아니다. 얼음에 치명적인 습기와 물을 제거하기 위한 바닥 배수로, 빗물 침수를 막기 위한 석회와 진흙 방수층, 얼음과 벽 천장 사이에 채워 넣는 밀짚 왕겨 톱밥 등의 단열재, 햇빛을 흐트러뜨려 열전달을 방해하는 외부의 잔디를 덮었다.

 

그러나 이 완벽함도 겨울 날씨가 추워야만 석빙고는 제 구실을 했다.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으면 석빙고는 무용지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그래서 겨울 날씨가 포근할 때면 추위를 기원하는 기한제(祈寒祭)를 올리곤 했다.

 

예전에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위치로 보아 현풍이나 창녕, 영산 석빙고 주변은 하천이 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두꺼운 얼음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이들 석빙고는 한강을 끼고 있는 동빙고와 서빙고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다.

 

석빙고에 필요한 얼음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얼음의 채취와 보관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떤 때는 겨울이 춥지 않아 채취가 불가능하였고, 때로는 보관상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많은 얼음을 겨울에 채취하여 봄부터 사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겨울에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실록에는 빙부(氷夫)가 동상에 걸리거나 물에 빠졌기 때문에 의원을 보내 치료케 하고 음식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석빙고에 보관된 얼음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얼음의 용도가 반드시 음식 저장 등의 실용적인 측면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함으로 여름철에 극성 하는 양기를 억제하여 자연의 조화를 회복시켜 보겠다는 동양철학적인 발상도 큰 몫을 했다고 한다.

 

  
▲ 현풍 석빙고 앞부분 눈 오는 날 아이들이 미끄럼을 탄 흔적이 역력하게 나 있다.
ⓒ 박종국
미끄럼

 

그런데 석빙고는 왜 이렇게 냉각이 잘 되었을까. 그 비결은 석빙고 출입문 옆에 세로로 붙어 있는 날개벽 덕분이다. 겨울 찬바람은 이 날개벽에 부딪히면서 소용돌이로 변하고 그로 인해 더욱 빠르고 힘차게 내부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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