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다산이 귀양살이를 하지 않았다면_박석무

한국작가회의/문학행사공모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6. 21. 12:12

본문

728x90

 

 

 

 

다산이 귀양살이를 하지 않았다면
  글쓴이 : 박석무     날짜 : 2008-10-20 09:21    

다산의 저서들을 뒤적이고 다산의 논리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순간들마다 하나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다산 같은 천재학자가 귀양살이라는 18년의 공백이 없이 제대로 벼슬살이에 충실하여 경세제민의 경륜을 폈다면 당시의 나라는 어떻게 되었고, 그래도 나라는 망하여 식민지로 전락되었을까라는 의문입니다. 필자가 다산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많은 지인들이 또 언제나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산의 벼슬길이 순탄하여 영의정 정도의 고관이 되어 임금을 설득하여 자신이 품은 국가개혁의 마스터플랜을 제대로 실현하여 실사구시적 논리와 실용주의 원칙으로 국가개혁을 완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의 시대나 세상은 도저히 그렇게 개혁을 완수할 여건이나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으니, 차라리 귀양살이에서 미래를 위한 저술작업에 몰두하였음이 차라리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문을 명확하게 풀어주는 글이 두 편 있으니 다산의 중형(仲兄)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귀양 살며 다산의 대저인 『주역사전(周易四箋)』과 『매씨서평(梅氏書平)』이라는 책의 서문으로 써준 글입니다. 『주역』과 『서경』에 대한 경학연구서에 높은 수준의 경학자 정약전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여 책의 수준과 다산의 학문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극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문왕은 구금되어 주역을 연구하였고 공자는 액운을 만나 춘추라는 책을 저작하였다”라는 말을 전제하고, “약용이 편안하게 부자로 살았거나 존귀하고 영화롭게 살았다면 결코 이런 책은 저술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여 문왕과 공자가 불행과 액을 만나 주역과 춘추의 경(經)을 저작했듯이 다산의 귀양살이가 그러한 명저를 탄생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약용이 뜻을 이룰 수 있어 충성심과 지혜를 다 바쳐 공업(功業)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당(唐)의 요숭(姚崇)이나 송경(宋璟)같은 명재상이나 송나라의 한기(韓琦)·부필(富弼) 같은 재상의 업적을 더 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요송한부야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다”라며 학문적 업적이야 쉽지 않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문왕이나 공자의 학문을 멀리서 이어가고 잃어진 실마리를 찾아내 미친 학문을 가로막는 일이야 정말로 어려운 일인데, 정약용이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정승 몇 명과 비교나 될 일인가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래서 “약용이 뜻을 얻을 수 없었음은 자신의 행운이자 우리 학계의 다행만이 아니었다”라고 결론을 맺어 학술사에 위대한 공을 세웠음이 바로 그의 불행한 유배살이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박석무 드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