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 포부를 크게 갖는 것은 좋지만 큰 일을 하는 데는 반드시 작은 일을 소흘히 하게 됩니다. 큰 것보다는 내 주위의 작은 것들을 챙기고 아끼는 것이 좋은 생각이 아닐까요. 우리 음악 역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대에서 부르고 듣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음악을 배우고 즐기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입니다.”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교수를 이제껏 우리 사회에서 특별하게 여기게 된 데는 바로 그의 이런 평범한 생각이 바탕이 되었는지 모른다.
학생시절에 그는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게 뛰어난 인물이 되겠다든지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큰일을 하겠다든지 하는 거창한 꿈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평범하고 조촐하게 살고 싶어 했다.
사람의 일생은 어쩌면 아주 하찮은 우연에 의해 운명지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병기 교수가 가야금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닐 적에 같은 반 친구의 '가야금을 배워보자'는 권유로 시작하게 된 가야금. 그 가야금의 첫 만남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야금이란 것이 국사책에나 나오는 것인 줄 알던 내가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정말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정말 반갑고 그리운 사람을 만났을 때 말없이 부둥켜 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과 같은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가야금과의 떨리는 만남이 있은 지 4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 그의 곁엔 변함없이 가야금이 있다.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을 때도 그랬고, 대학을 졸업하고 극장, 화학공장, 출판사 등을 경영했을 때도 하루라도 그의 손에서 가야금이 떠난 적은 없었다.
그의 이러한 '국악 외길'의 인생은 많은 사람들이 가야금이란 이미 삼국시대에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던 때에서 '94년을 '국악의 해'라 이름짓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만장일치로 '94년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에 뽑히게 된 것이다. 사실 그 이전에도 국악계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이기심이었다고 황병기 교수는 말했다.
“저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가야금을 계속하게 된 것도 그렇고…. 가야금 연습도 해야 하고, 작곡도 해야 하고, 학생들도 가르쳐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고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집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그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밤 가야금을 뜯으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지 않았다면, 가야금 외에 다른 것에 한 눈을 팔았다면 지금 우리가 「비단길」「심향무」「국화 옆에서 」같은 아름다운 가야금 창작곡을 어찌 들을 수 있었겠는가. 또 우리의 가야금 소리가 저렇게 신비하고 애절한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가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선뜻 맡게 된 데는 그의 고집 뒤에 숨어 있는 우리 음악을 생활음악으로 자리잡게 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국악의 해는 국악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악과 국민들을 자주 만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올해는 아마도 더 많은 국악 공연과 국악 보급이 이루어져 우리 국악의 멋과 흥이 국민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국악에 대해 먼저 마음을 여는 일이다.
“음악은 자주 들어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음악도 자꾸 접하다 보면 저절로 좋아질 것입니다. 우선 우리 것을 좋아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여는 일이 귀를 여는 일보다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그는 우리 것만을 절대적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몸이 건강하려면 편식을 삼가야 하듯 음악 역시 우리 음악, 서양음악 할 것 없이 폭넓게 들어야 우리의 것을 더욱 가깝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황병기교수의 올 한해는 무척 바쁘다. 일년에 꼭 한두 번은 했던 연주 계획과 창작활동도 미뤄 놓은 상태이다. 올 한해는 국악의 해답게 조직위원장으로서의 맡은 바 일에 열심일 각오인 것이다.
이미 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 음악회와 12월 서울의 송년 통일 음악회의 실무를 맡으면서 남북의 음악전통이 한 뿌리임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 황병기 교수는 올해 남북한 국악교류를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
이화여대에 처음 국악과가 창설되어 교수로 초청되었을 때 그는 망설였다. 그것은 음악을 전적으로 선택하는 것과 그저 취미로 남겨두는 것의 갈림길이었다. 그 때 그는 법대 재학 시절에 알게 된 국립 국악원의 여학생이 해준 말을 떠올리고 주저없이 음악을 택했다.
“황병기 씨는 지금 법대에 다니지만 꼭 예술가가 될거예요. 황병기 씨의 눈은 이 세상을 보고 있지 않고 멀리 별 쪽을 보고 있거든요.”
이제 그의 음악은 '자신만이 좋아서 하는' 음악이 아니다. 그가 들려주는 가야금 소리가 알게 모르게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쪽 어딘가에 있는 별을 쳐다보게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필자 : 김선경님 기자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4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