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땡볕이 주차장 마당 위로 뜨겁게 쏟아지고 있었다. 거무죽죽한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화사한 파란색의 드레스를 입은 삼십대의 아름다운 여자가 금빛 플루트로 '아베마리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뜨거워지는 공기를 타고 인근으로 퍼져 나간다. 잠시 사이에 그 여인의 이마에서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관객도 없는 상태에서 다음 출연자가 나왔다. 옥색 두루마기에 갓을 쓴 오십대 남자가 나와 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르면서 학춤을 추기 시작했다. 열심히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을 보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주차장 모퉁이의 단풍나무 뒤로 두 노인이 스며들듯 다가와 남이 자신들의 모습을 볼까 두려워하며 한오백년을 열창하는 옥색 두루마기의 남자를 보고 있다. 허름한 비둘기색 점퍼를 입은 한 노인은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발가락도 없는지 목발을 짚고 있었다.
이어서 지열이 뿜어 나오는 아스팔트 위에 비닐로 만든 휴대용 돗자리가 깔고 그 위로 한복에 가야금을 든 세 명의 여자들이 나와 앉는다. 그들은 깊은 산속 폭포수가 떨어지듯 가야금을 타면서 구성진 가락을 뽑아 내기 시작했다.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한과 정서가 담긴 소리가 퍼져 나가면서 주차장 구석으로 소리 없이 한떼의 노인들이 살며시 접근하고 있었다. 고동색 한복 치마저고리를 통일해서 입은 할머니들이 소리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 그늘 저 그늘에 숨듯이 가서 몰래 구경한다. 어떤 이는 코가 떨어진 자리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흉칙했다. 그 뒤로 남자 노인들이 다가와 여기저기 소리 없이 앉았다. 말기 암환자 모양으로 머리털 없는 사람이며 눈이 빠져 달아난 사람 등 여러 가지 모습이었다. 어떤 노인은 손가락 흔적만 있는 사이로 간신히 담배를 끼워 피우고 있었다.
1997년 오월의 마지막 일요일, 나는 안양의 나환자촌인 나자로 마을에 갔던 것이다. 평소에 안면이 있는 아나운서 한 분이 몇몇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봉사 활동을 다니는 현장이었다. 그들 중에는 밤무대에서 일하는 무명 가수도 있었고 예전에 플루트를 분 현역 중령 부인도 있었다. 또 호텔에서 힘들게 일하는 소리꾼들도 있었다. 학춤을 추는 아버지, 가야금을 하는 엄마, 그리고 제일 막내로는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모두 함께 온 가족도 있었다. 아나운서 출신의 E씨에 의해 우연히 연결된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조그만 재주로 세상에 봉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찾아가는 곳의 사람들에게 조금의 부담도 주지 않기 위해 심지어 물 한잔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타고 갈 봉고차 한 대와 공연할 장소만 있으면 그만이다. 점차 소리가 흥겹게 고조되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플루트로 연주하던 파란 드레스의 아가씨가 구석으로 다가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아주머니의 양손을 덥썩 잡고 그를 끌어 낸다. 그는 몹시 수줍어하면서 플루트 연주자가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이 고마워 어쩔 줄 모르며 따라 나섰다. 옥색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 입고 학춤을 추던 오십대 남자가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이 문드러진 사람을 안고 아스팔트 무대의 중앙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둘이서 얼싸 안고 춤을 춘다.
그 다음으로 가야금 병창을 하던 여인들이 나환자들을 데리러 가고 그렇게 하나 둘 무대 아닌 무대로 끌고 나가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었다. 이어서 구석에 숨어 가장 수줍어하던 남자 노인도 앞으로 나가라고 등을 떠밀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모두 무대로 나가 출연진들과 손에 손을 잡고 한바탕 춤사위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맨 뒤에 숨어 수줍어하던 노인은 한중앙에서 하늘을 향해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항상 문둥이라고 피해 다니던 버릇이 유전처럼 가슴속에 심겨 있던 나환자 노인들의 마음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나는 뜨겁게 울려 퍼지는 대중음악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랑의 영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속에서 흘러 나오는 생명수를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짧았던 위로 공연이 끝났다. 출연진이 마당 한구석에 세워 놓았던 봉고차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누구 한 사람 물 한잔 가져다 주는 사람이 없었다.
공연 후 그들은 자기들이 낸 자장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운 채 각자 제 갈 길로 가기에 바빴다. 그중 가야금 병창을 하던 한 여인과 얘기를 나누었다. 명인들에게서 그리고 대학에서 이십 년 간 소리만을 공부해 온 사십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워커힐 가야금 식당에서 하루에 두 차례씩 공연한다고 했다.
“내가 가진 재주로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게 제일 행복합니다. 돈을 받고 출연할 경우 이 정도면 꼼짝 못하고 집에 가서 드러누워야 해요. 그런데 봉사 활동을 한 날은 다시 공연을 나가도 몸이 끄떡 없거든요.”
그녀는 나이답지 않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부지런히 전철역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워커힐에서 오후 공연이 두 차례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차고 남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통 위에서 하는 것임을 다시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