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수기]내 동생 준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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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구나. 내일은 나 어디 좀 다녀오마.” “네.”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어머니가 어디에 다녀오신다기에 '네'라고 대답했냐고 아내가 물었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내가 잠든 뒤 나는 장롱 뒤에서 소주병을 꺼냈다. 이 추운 날 어머니는 어디에 가시는가. 아버지에게는 우리집에 간다고 하시겠지. 그리고 떡을 찌고 닭을 삶아 들고 동두천 어느 거리를 오갈 것이다.
술잔을 비우니 또 울컥 미군 부대가 많은 송탄에서 보낸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그 즈음 아버지는 사기죄로 교도소에 들어가 계셨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혼자 보따리 옷장사를 하셨는데, 어느 날부턴가 어머니의 배가 불러왔다. 몇 달이 지나서 어머니는 시골 할머니와 이웃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출산을 하게 되었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방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터져 나오고 동시에 할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오며 “아이고 망측해라, 이런 집안 망할 일이…” 하고 통곡하셨다. 방으로 뛰어들어가 보니 피부색이 검고 머리는 곱슬인 사내아이가 누워 있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캄캄한 밤에 나와 아기를 데리고 송탄을 떠나 사람이 뜸한 어느 시골로 내려가셨다. 어머니가 준길이라고 부르는 아기를 나는 너무도 싫어했다. 준길이만 보면 학교에 가기도 싫었고, 죽이고 싶은 마음만 자꾸 생겼다. 준길이를 남몰래 기르는 어머니도 미웠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셋이서 오순도순 사는 것인데, 그 가운데 낀 준길이야말로 괴물이었다.
내 나이 아홉 살 때였던가. 어머니가 집 근처에 친구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나는 불만이 쌓여 갔다. 하루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문득 준길이를 불타는 아궁이에 집어 넣자는 생각에 방에서 아기를 안고 나오다가 그만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날 나는 준길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온 어머니에게 부지깽이로 심하게 맞았다.
그 뒤 준길이는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느 날 밤 어떻게 수소문했는지 아버지가 찾아오신 것이다. 낫을 든 아버지는 잠자고 있던 다섯 살바기 준길이를 내리치셨다. 그때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밀어 내치시지 않았다면 준길이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이웃집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에 집에 가보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밥을 드시고 계셨다. 어머니는 준길이는 죽어서 산에 갖다 묻었으니 이제 준길이 얘기는 절대 꺼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듬해부터 어머니는 연말 즈음에 아버지가 공장에서 24시간 작업하는 날이면 외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온다며 집을 나가셨다. 그때 나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얘길 듣고 준길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의 먼 친척이 동두천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는데, 그 집에 맡겨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리 집안의 치부가 드러난 것이 부끄럽기만 했다.
내가 다시 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준길이 소식을 물어본 것은 결혼한 뒤의 일이다. 자식을 기르다 보니, 세상일에 대한 연민이 내 가슴에 자꾸 스며들어서일까. 내 동생 준길이가 너무 불쌍했다. 생각해 보면 결코 준길이 잘못이 아닌데… 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사람 대우 받으며 잘살 수 있었을 텐데…. 어느 날 밤 나는 준길이 생각을 하며 처음으로 울었다.
결국 나는 동두천에서 과일가게를 한다는 준길이를 찾아갔다. 스물여덟 살 청년이 된 준길이는 나를 첫눈에 알아보았다. 준길이가 다섯 살 적에 헤어졌는데도 준길이는 우두커니 선 채 나를 쳐다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준길이에게 다가가 힘껏 안았다. “내가 형이다”라고 했더니 한참을 울먹거리다가 “알아요” 하고 대답하는 준길이. 가게 문을 닫고 우리는 술집으로 갔다. 내 일생 처음으로 커다란 덩치의 흑인 청년과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준길이는 나에게 너무나 공손했고 코로 흘러 나오는 속울음을 닦아 내기에 바빴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준길이는 당연히 한국말을 잘 했지만 글자는 모른다고 했다. “왜 글자 공부를 안 했느냐?”고 물으니 창피한 듯 웃기만 했다. 준길이는 일 년에 한 번 어머니가 찾아올 때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준길이에게 옷이라도 벗어 주고 싶었지만 대신 목도리를 풀어 목에 걸어 주었다. “네 형수가 너 주려고 뜬 거야. 너무 추워서 내가 두르고 있었다. 이젠 네 거야.” 준길이는 목도리를 자꾸 만져 보고 냄새를 맡기도 했다. 앞으로 종종 찾아오겠다고 하자 준길이는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형이 최고”라고 했다.
준길이에게 다녀온 다음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준길이를 만났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는 처음엔 무척 놀라더니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하며 흐느끼셨다.
그 뒤부터 어머니는 해마다 준길이에게 갈 때면 나에게만 그 사실을 알렸다. 아직은 아버지도, 내 아내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도 먼 훗날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피붙이 아들을 찾아가 떡을 먹여 주는 어머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
필자 : 김성진님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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