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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독재권력의 귀환? 틀렸다

박종국에세이/시사만평펌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1. 1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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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독재권력의 귀환? 틀렸다
[정문순 칼럼] 개혁 정부에도 존재했던 '용산', 역사는 연속된다
 
정문순

용산참사 대책위원회에서 제작한 관련 영상물을 보게 되었다. 방송사에서 보도용으로 찍은 화면과 관련자 인터뷰를 모아 만든 영상이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비현실적인 장면이 가슴을 짓눌렀다. 사건 당일 망루에서 불길이 시커멓게 치솟자 건물 바깥에서 “저 안에 사람이 있다”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지옥불이 이보다 처참할까. 어버이날을 맞아, 화마에 희생돼 냉동고 속 얼음장 몸으로 누워 있는 부친에게 보내는 아들의 편지가 낭독될 때는 끝내 눈물이 솟았다.  

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게 얼마만인가. 영화 <워낭소리>에서 늙은 소가 죽을 때 가족의 죽음을 대하듯 하는 할머니의 대사가 눈물샘을 자극한 것이 가장 최근 일이다. 나 혼자만 운 것은 아니었던지 함께 영상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슬퍼서 힘들었다고 말했다. 가진 자의 욕심을 대변하는 정권의 폭압적 태도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무리 중 연배가 윗줄임을 의식하여 잘난 척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독재정권의 말기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백주대낮에 멀쩡한 사람이 죽어가는 일을 내 생애 다시 겪을 줄 몰랐습니다. 너무 참혹해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앞으로는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 지난 1월 20일 서울시 용산구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용산참사'에선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CBS노컷뉴스


말은 ‘예쁘게’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내가 정말 불편했던 건 백주대낮에 멀쩡한 사람이 죽어가는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세력의 귀환이 아니라, 선악이 선명히 대비되는 단조로운 현실을 접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답이 분명히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숨이 막힌다. 그 명백한 이분법의 세계를 목도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선과 악이 등을 맞대고 있는 상황은 둘 중 하나는 옳거나 나쁘다 외에 생각거리를 주는 것은 없었다. 

영상을 다 보고도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을 정도로 질려버렸지만, 예의상 마음에 그다지 없는 말을 입에 올린 것이 목에 걸렸다. 이 영상은 한 시대의 야만과 폭력을 기록하는 증언자로서는 가치가 있지만 작품의 미학을 따지면 빵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차라리 <워낭소리>처럼 논쟁을 일으킬 만한 영상이라면 나는 할 말이 무궁무진했을 것이다. 악당 역할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선과 악으로 세상을 쪼개어 보도록 만드는 데 톡톡히 기여한 이명박 정권이 증오스러웠다. 결국 남는 건 미움과 분노밖에 없었다.

지난 시대, 독재정권의 악과 싸우면서 사람들의 심성도 그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을 따라 피폐해진 것도 사실이다. 시인 정희성은 80년대에 악과 싸우는 시만 쓰다 보니 자신의 시에도 성냄과 분노만 남았다고 훗날 자책해야 했다. 선악과 편을 가르는 데 사람들의 사고가 익숙하다보니 어느 쪽에도 귀속하기 힘든 것들은 소외되어야 했다. 목숨이 걸린 일 앞에서 당장 급해 보이지 않은 사안들은 나중으로 밀리거나 시시한 것으로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독재정권과 싸우는 절박한 시국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권리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수자의 발언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라도 획득된 후에야 울림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 독재 정권의 귀환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소수자의 목소리를 솎아내어 걸음을 떼기 이전으로 되돌려 놓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귀환했다고 보는 것이 얼마나 정확한 평가인지는 의문이다. 양극화는 오히려 독재정권 치하에서 생소한 개념이었으며, 부의 불공정한 분배나 가진 자의 독점욕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된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철거민이 망루에서 농성한다고 살인 진압한 정권을 악의 편으로 호명하는 것은 쉽지만 그 악의 뿌리는 역사가 길다. 정치권력이 가진 자의 욕망을 대변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이명박 정부 이후 비로소 시작된 일도 아니다. 용산 참사의 직접적 원인이 된 뉴타운 건설 사업은 이명박 정권이 아니었어도 추진되었을 일이다. 다만 차이는 있을 것이다.  
 

▲ (자료사진)     ©청와대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면 인화 물질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만들어놓고 망루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이 목숨권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빈 손으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 그들이 과연 생존권도 지켜낼 수 있었을까. 가족과 단란하게 보금자리를 꾸리거나 생계 터전이 될 한 뼘 터전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을까. 경찰이 용역들의 횡포를 수수방관하거나, 농성자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보상 없는 철거가 행해진 것은 참여정부 때도 똑같았다. 도심 재개발을 둘러싼 건설업체-땅 주인-용역회사의 끈끈한 삼각 편대는 예나 지금이나 난공불락의 기반 위에 서 있다. 정치권력이 가진 자들의 대리 권력이 되기를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독재는 결코 귀환한 것이 아니다. 어설프고 불철저한 개혁 정권도 가진 자들의 탐욕을 어쩌지 못했고 철옹성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토건족을 대변하기 위해 전 국토를 벌집 쑤시듯 유린하는 데 골몰하는 건 이명박 정부가 처음이 아니다. 전국의 강바닥을 뒤집어엎는 발상이 이명박 정부에 와서 처음으로 독창적으로 구상된 것은 아니다. 이전 정권에서 부동산 정책을 주무른 이들도 모두 땅을 사랑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실패한 개혁 정부에서 배태되었다는 점에서 앞 정권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서울 땅부자를 대변하는 악마는 어디 갔다가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탈 없이 건재해왔을 뿐이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느날 악마 같은 정권이 불현듯 등장하여 못된 일을 저지른다고 보는 것은, 소위 개혁 정부 시절에도 균열이 가지 않았던 가진 자들의 독점적 이익과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권력의 횡포를 외면하거나 방관한 자신에게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행위가 아닐까. 나쁜 정권을 악마라고 딱지 붙인다고 하여 중동무이로 끝난 개혁 정권이 무죄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선과 악이 본질상 별개가 아니듯 두 정권의 성공과 실패는 사실상 한 몸이다.

* 필자는 <대자보> 편집위원이며, 문학평론가입니다.
 

기사입력: 2009/11/13 [20:14]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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