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희망으로 가는 길]걸음걸음에 행복이 있다
나는 15년째 '녹색장롱살인면허' 소유자다. 자동차 면허증은 진즉에 따 놓았으되 여전히 내 손으로 자동차를 운전할 재주는 없다. 면허증을 따고 얼마 안 되어 운전 연수를 받다가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헷갈려 사고를 낸 후 어마뜨거라, 아예 핸들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자동차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북아메리카로 떠날 때 눈물을 머금고 연수를 받아 가긴 했으나, 그 지역에서 흔치 않은 대중교통 요지에 용케 보금자리를 구하면서 익혀 간 기술을 또 다시 흐지부지 잃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핑곗거리는 쌓여서, 운전을 하지 않는(사실은 못 하는)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다. 일단 출퇴근할 필요가 없는 영구 재택근무자이니 자동차가 있어 봤자 주차장 신세일 게 뻔하고, 가끔 하는 외출이란 것이 대부분 술자리 참석이니 굳이 자동차를 갖고 나갈 필요가 없고, 더군다나 길을 가다가도 문득문득 '멍-때리는' 순간이 있으니 내게 운전을 맡기는 건 어린애에게 폭탄을 쥐어 주는 것처럼 위험하다…… 등등.
그런데 구차한 핑계가 아니더라도 사실 자동차를 운전하지 못 하기(않기) 때문에 내가 얻고 누리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나는 늘 걸어 다닌다. 매일 아침 걸어서 산책을 하고, 버스 정류장 두세 개 정도의 거리는 당연히 걷고, 지하철에서도 에스컬레이터보다 계단을 주로 이용한다. 운동의 차원에서 걷기도 하지만 명상의 차원에서, 쑥스럽지만 조금 거창하게 말해 보자면 생태적 삶을 위해서도 걷는다. 자동차를 유지하는 비용을 저축해 여행을 하고, 기부를 하고, 나를 위해 투자한다. 자동차로는 10분이면 가는 거리를 한 시간 동안 걸으며, 나는 수없이 생각을 하고 수많은 계절과 사람을 만난다. 이를테면 자동차 없는 '뚜벅이'의 삶은 문명의 편리를 포기하는 대신 조금 더 자연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이토록 비밀스런 걷기의 즐거움을 정갈한 언어로 표현한 책이 《걷기 예찬》(현대문학)이다. 이 아름다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경험하며 느꼈던 바로 그 자유, 행복, 평화의 감정이 고스란히 책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걷기는 미친 듯한 리듬을 타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질러가는 지름길이요 거리를 유지하기에 알맞은 방식이다.”
“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혼자서 걷는 것은 명상, 자연스러움, 소요의 모색이다.”
《월든》으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 데이비드 소로는 하루에 적어도 네 시간은 걸어야 한다고 했다. 오후까지 볼일 때문에 방 안에만 처박혀 있으면 몸이 녹슬어 버리는 것 같아 괴롭다는 것이다. 걷기에 불편한 특별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이 자연스러운 요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삶의 축복을 외면하고 '자동차가 곧 신발(어딘가로 나서려면 신발처럼 자동차를 타야만 한다는 뜻)'이란 농담을 하거나, '킬 힐(굽 높이가 10센티에 달하도록 아찔하게 높은 하이힐)'을 신고 곡예를 하거나, 걷는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취급하며 비웃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뚜벅이'로 살게 될 '걷기 예찬론자'인 나로서는 걷지 않는(어쩌면 못 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동차를 타고 내 곁을 스쳐 지나는 그들은 아마도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발밑에서 꿈틀대는 지렁이를 밟지 않기 위해 깡충 뛰어오르며, 머리 위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팔을 뻗어 환영하며,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로운지. 그렇게 쌩쌩 빠르게 달려도 어차피 삶의 종착점은 너나 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가소개
책 읽어 주는 여자, 김별아 님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93년 실천문학에 중편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로 등단했다. 소설집 <꿈의 부족>이 있으며, 장편소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개인적 체험>, <축구 전쟁>, <영영이별 영이별>, <미실>, <논개>, <백범>, <열애>,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가족 판타지>(<식구>개정판),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등이 있다. 2005년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한국부패지수↓…인권위 축소·권력층 추문 등 원인 (0) | 2009.11.18 |
---|---|
[좋은님 꽃씨]미장원에 간 부자(父子) (0) | 2009.11.17 |
한국인은 행복하지 않다 (0) | 2009.11.17 |
[사회] 루저? 루저 좋아하네 (0) | 2009.11.15 |
정운찬 국무총리의 뒷발질과 앞발질 (0) | 2009.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