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가 뉴욕에 후학을 양성해 한국의 전통춤을 심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뉴욕을 방문 중이다. 어머니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춤사위에 대한 양질의 유전자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일가(一家)를 이뤄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임 단장은 한국 전통 무용계의 중진으로 ‘승무’와 ‘살풀이춤’ ‘한량무’의 명인이다. 환갑을 맞이하는 55년 춤꾼 임이조 단장의 춤 인생을 들여다본다.
어머니는 무용가였다.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다니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 후 무용의 길을 접었다. 어느 날 꿈을 꿨는데 호랑나비가 훠이훠이 날아와 온몸에 붙어서 떼어내면 또 달라붙더란다. 그리고 임이조(61)를 낳았다. 그야말로 영락없는 ‘춤꾼’의 태몽이었다. 딸을 낳으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전수하리라 마음먹었는데 그만 아들이었다. 그리고 호랑나비 태몽은 자연스레 잊혀졌다.
어머니는 종종 어린 아들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 다녔다. 아들은 네 살 무렵 음악만 나오면 여지없이 춤을 췄다. 춤을 추지 못하도록 말려도 소용없어 어머니는 아들이 여섯 살 되던 해 전통춤 대신 발레를 배우게 했다.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춤으로 달랬다. 사람들은 후일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하는 그의 춤사위에서 ‘한(恨)’을 읽고 갔다. 그는 일찍이 이모에게 맡겨져 자랐다. 상처입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만 혹독한 고생 덕분에 사람 좀 됐다고 너털웃음을 짓는 그에게선 ‘육화(肉化)된 긍정의 힘’이 묻어난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조교이자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이다. 마흔 이전엔 예술가로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로 결혼은 언감생심이었다. 스승인 이매방 선생이 결혼을 부추겼고 그때 소개받은 여자가 지금의 아내이다. 아내는 그의 춤꾼 인생에 있어서 ‘원군’이나 다름없다. 슬하의 두 자녀 모두 예술고등학교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춤꾼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무용’에 눈을 뜬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 무렵. 그가 가장 존경해마지 않는 이매방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당진의 공연장에서 전통춤을 전직(?) 발레리나답게 화려한 몸동작으로 무대를 휘저었다. 누구와 견주더라도 무대를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불타오르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스승의 ‘절제’와 ‘여백’이 묻어나는 ‘승무’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왔다. 가슴이 저려오고 혼을 빼앗겼다. 아니 부끄러웠다. 그 길로 스승의 문하생이 돼 30년간 배우고 익혔다. 직선적이고 대쪽 같은 성격을 지닌 선생님의 숱한 질타를 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스승의 가없는 사랑이라 여긴다.
그의 반세기가 넘는 춤의 세월 안에서 잊을 수 없는 공연 중 일어난 일화 한 토막. 1981년 문화예술인의 모임인 ‘종로패’의 발표회에 특별출연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소리꾼 김소희, 오정숙 선생 등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흥타령을 하자 객석에서 구성진 추임새가 절로 터져 나왔다. 춤꾼과 관객, 무대가 삼위일체가 돼 함께 호흡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태에서 도포를 입고 부채를 어깨에 걸고 무대로 나오니 객석에서는 ‘저놈 봐라, 저런 잡놈을 봤나!’라며 추임새를 넣는데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설 정도로 신명이 절로 났다. 용이 구름을 타고 놀듯, 천사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듯 경계가 없는 무아지경이었다. 춤꾼과 연주자, 관객이 하나가 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의 춤에선 한과 흥이 함께 묻어난다는 평을 듣는다. 종국에 기쁨과 슬픔은 경계가 없는 것으로 한이 있어야 기쁨도 있다는 그는 슬픔을 삭히면 때론 기쁨이 된다고 되뇌었다. 또 예술에 대한 철학과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휴머니즘이라는 속옷에 예술이란 겉옷을 입혀야만 진정한 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재외동포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발전 방안을 묻는 질문에 임 단장은 “재외동포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의 톤을 높인 뒤 “한국의 문화와 전통이 재외동포들에게까지 계승ㆍ발전되기 위해서는 동포사회 자체적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동포들이 하는 거 봐서 잘 하면 지원하겠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며 끝을 맺었다.
<뉴욕일보 양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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