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젓한 정규직에서 열심이 일하는데도 가구소득이 정부 공식 빈곤기준을 넘지못하는 사람들을 사회학자들은 일하는 빈곤계층이라고 부른다. 미국인의 사회적 상상력 속에는 이들의 자리가 없다. 이 상상 속의 사회에는 일하지 않고 복지 혜택에 기대 사는 게으른 빈곤층, 아니면 기회의 땅에서 열심히 일하여 이른바 미국의 꿈을 성취한 중산층만 산다. 바바라 이렌리치는 이 잊혀진 사회계층의 광범위한 존재에 주목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허상을 깬 사회학자다. 그녀가 최근 <밝음에 눈멀다: 긍정적 사고가 어떻게 미국을 망쳤나> (Bright-sided: How the Relentless Promotion of Positive Thinking Has Undermined America)라는 책을 출간했다. “긍정적 사고” 혹은 “적극적 신앙”은 오늘날 어디서나 흘러넘친다. 책방과 텔레비전에, 수술실과 사원 연수장에, 중역회의실과 대통령 집무실에, 학교와 교회에 비닐봉지만큼 흔하다. “대박 터뜨리세요"나 “주 안에서 승리하세요”가 인사말로 돼버린 한국인 사회에서도 익숙한 현상이다.
그대의 소원을 거듭 긍정하고 시각 영상으로 그려보며 부정적 생각을 물리치라. 낙관과 웃음은 노화방지, 장수, 암 투병의 비결이라고 적극적 사고는 가르친다. 신은 그대가 잘 살기를 원한다. 신과 통하기만 하면 신통하게 모든 게 잘 풀린다. 그대가 소원대로 못사는 까닭은, 생각이 “쪼잔”하기 때문이다. 통크게 생각하고 믿음대로 저질러라. 환경에 지배당하지 말고 환경을 지배하라. 기독교의 본질은 기적이요, 신앙이란 본디 “오바”하기라고 적극적 신앙은 설교한다.
이라크 전쟁은 수주 안에 승리할 것이며, 다우존스 주가지수는 36,000에 곧 이르고, 주택가격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들 했다. 금융붕괴의 위험을 지적했던 분석가들은 부정적 사고라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짖고 쫒겨났다. 부하들은 긍정적 전망을 내세워 상사의 총애를 받고,최고 경영자들은 재앙의 가능성을 머리 속에서 애써 지워버렸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무엇이든 생각하는대로 되는 도깨비 나라다. 이런 믿음이 어떻게 세계를 자기파멸의 길로 끌고 갔는지는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긍정적 사고 혹은 적극적 신앙은 얼른 듣기에 꽤나 그럴싸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부정적인 태도보다는 훨씬 낫지 않는가. 그러나 생명체들이 고유의 살려는 의지를 넘어서, 객관적 현실이 어떠하든 긍정적으로만 봐야한다는 데는 어떤 억지가 느껴진다. 무엇이든 마음먹은대로 되는 것은 어린 아이 특유의 나르시시즘 속에서나 가능하다. 객관 현실이 감당할 수 없이 고통스러우면 어른도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어린아이의 나르시시즘은 자연스런 성장과정의 일부이지만 어른의 그것은 후천성으로 병든 영혼의 증상이다.
이같은 정신적 퇴행이 누구나 때로 경험하는 우울이거나 몇몇 개인에 국한된 것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후천성 나르시시즘이 미디어, 종교, 정치, 경제, 의료 전반에 풍미하면 위험하다. 월스트릿의 투자은행들이 세계 경제를 판돈으로 건 무모한 파생증권 거래에 도취해 있을 때 금융붕괴 가능성을 경고한 스티븐 아이스만이라는 금융분석가는 “헤지펀드병”을 진단했다. 과대망상, 나르시시즘, 유아론(維我論)이그 증상이다. 이 증상이 정치, 군사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 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가.
적극적 믿음을 실천하여 어떤 개인이 부자가 될 수 있다. 안되도 신의 뜻이라니 억울해할 일도 없다. 그러나 적극적 믿음은 나라와 세계를 확실히 파멸로 몰고 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적극적 믿음은 과학자의 경고를 우습게 알고, 현실 인식을 멋대로 조작하며, 사회 전체를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밝은 빛만 보는 눈은 시각장애다. 게다가 적극적 믿음은 자동차 엔진처럼 목적을 향해 돌진할 뿐 목적 자체를 반성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지런하다. 그 부지런함이 세계의 자멸을 재촉한다.
그렇다고 매사에 부정적으로 나가는 것도 맹목적이긴 한 가지이다. 인류가 더불어 추구함직한 공동선에 대한 성찰,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대안 창조, 그리고 어려움에 맞서는 단호한 결의 만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위험한 도박으로부터 세계를 건져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