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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밑바닥까지 내려가 써라

박종국에세이/단소리쓴소리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0. 2. 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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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밑바닥까지 내려가 써라

김별아

아들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방학은 어느 때보다 학부모들에게 분주한 시간이다. 사교육 포기 각서를 쓰고 들어간 대안학교인지라 방학을 해도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지 않으니 꼼짝없이 학부모들이 자체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해야 한다. 건축가인 아빠는 '생태건축기행'을 마련하고, 빵집을 하는 엄마는 '쿠키 만들기 교실'을 준비한다. 강제성 없이 오로지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를 생각하는 다른 학부모들의 정열적인 사랑에 수혜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치솟는다.
이를테면 지난 여름방학에 하루 산행을 했던 아들아이가 집에 돌아와서는 “재현이 아빠가 가져온 얼음 수박이 아주 시원했다.”고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한더위에 산행을 하는 아이들을 위해 무거운 수박을 산 정상까지 가져온 고마운 재현이 아빠, 그런데 더 놀랍고도 재밌는 것은 정작 재현이는 그 산행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맡아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학교 내 독서 동아리에서 제안한 '글쓰기 특강'이다. 총4회, 예비 중학생부터 학부모까지, 스무 명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글쓰기 수업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작가'라는 직업을 밝히면 열 중 예닐곱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가끔은 저도 글을 쓰고 싶어요.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 거예요?”
'문학은 내가 목매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지 이십오 년, '작가'라는 이름으로 밥을 벌고 살아온 지 십칠 년째가 되었지만, 허투루 하는 겸양의 말이 아니라 진짜로 나는 나 자신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필패의 싸움'이며, 나는 다만 죽기 전에 단 한 편이라도 진실로 '좋은'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비법' 같은 건 애초에 없다. 정말 글을 잘 쓰는 '비법'이란 게 있다면 나 같이 모자란 깜냥에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나는 쓰는 사람이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서 수업에 대한 부담이 없을 수 없다. 그런 차에 긴장과 불안을 눅일 겸 펼쳐든 《치유의 글쓰기》(홍익출판사)는 글쓰기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어떤 기능을 갖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했다. 저자는 전문 작가가 아니다. 젊은 시절 편두통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50년 동안 일기를 써 온 경험으로, 글쓰기가 바로 '몸-마음-영혼'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받은 경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한다. 지금, 두려워하지 말고, 글을 쓰라고.

“일기를 쓸 때마다 나 자신과 화해하면서 어느 때보다 평화로움을 느낀다. 내 문제가 더 이상 인생을 짓누르지 않는다.”
“새로운 치료법마저 듣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자리를 잡고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온몸이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아내와 사별한 후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칩거해 왔다. 글쓰기를 통해 고독의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었고,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주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지낸다.”

사람들은 대체로 너무 '잘' 쓰고 싶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 또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 성격적 결함, 배신의 상처, 용서가 안 되는 일, 치욕, 공포,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의 '은폐된 비밀'을 들킬까 봐 글을 쓰지 못한다. “시간이 없다.” “쓸 거리가 없다.”등등의 핑계는 오만과 두려움과 게으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글쓰기는 바로 자신의 삶에 진실한 얼굴로 다가서는 일이기에, 시간이 없고 귀찮고 재미없다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는 '비법' 같은 건 모르지만 어떤 글이 좋은 것인지는 안다. 첫 번째 수업에서 자신의 '연대기'를 쓰도록 과제를 내주었을 때, 용감하게 자신의 장애와 상처를 드러낸 학생이 있었다. 그의 글에 담긴 솔직함과 진지함은 어떤 정려한 문체와 탄탄한 구성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진실한 글이야말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진실이야말로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통해 반드시 전염되는 것이므로.

*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김별아의 희망으로 가는 길>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연재해 주신 김별아 님, 글을 읽어 주신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김별아 님의 글은 곧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김별아 님의 산문집, 기대해 주세요!

작가소개

책 읽어 주는 여자, 김별아 님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93년 실천문학에 중편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로 등단했다. 소설집 <꿈의 부족>이 있으며, 장편소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개인적 체험>, <축구 전쟁>, <영영이별 영이별>, <미실>, <논개>, <백범>, <열애>,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가족 판타지>(<식구>개정판),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등이 있다. 2005년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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