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어가, 뛰지 말고
서울 용산 삼각지 뒷골목에 '옛집'이라는 허름한 국숫집. 달랑 탁자 4개뿐이다. 주인 할머니는 25년을 한결 같이 연탄불로 진하게 멸치 다시국물을 우려내 그 국물에 국수를 말아냅니다. 10년 넘게 국수값을 2천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지 무한리필입니다.
몇 년 전에 이 집이 SBS TV에 소개된 뒤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연을 말했습니다.
“15년전 저는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고 아내까지 저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용산역 앞을 배회하던 저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구걸했죠. 그러나 가는 음식점마다 저를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잔뜩 독이 올라 식당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국숫집에까지 가게 된 저는 분노에 찬 모습으로 자리부터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나온 국수를 허겁지겁 다 먹어갈 무렵 할머니는 국수 그릇을 나꿔채더니 국물과 국수를 다시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그걸 다 먹고 난 저는 국수값 낼 돈이 없어 냅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가계 문을 뒤따라 나온 할머니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냥 걸어가, 뛰지 말고, 다쳐, 괜찮아!"
도망가던 그 남자는 그 배려 깊은 할머니 말에 그만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 파라과이에서 성공한 그는 한 방송사에 전화를 하면서 이 할머니의 얘기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곱게곱게 자랐지만,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이름조차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분에 넘치게도 대학을 졸업한 남자로부터 끈질긴 중매 요구로 결혼을 했습니다. 건축일 하며 너무도 아내를 사랑했던 남편은 마흔 한 살이 되던 때 4남매를 남기고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어린 4남매를 키우느라 너무도 고생이 극심해서 어느 날 연탄불을 피워놓고 4남매랑 같이 죽을까하고 결심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옆집 아줌마의 권유로 죽으려고 했던 그 연탄불에 멸치로 우려낸 국물로 용산에서 국수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설익고 불어서 별로 맛이 없던 국수를 계속 노력한 끝에 은근히 밤새 끓인 할머니 특유의 다싯물로 국수맛을 내서 새벽부터 국수를 말아 팔았습니다. 컴컴한 새벽에 막노동, 학생, 군인들이 주된 단골이었습니다.
"하나님! 이 국수가 어려운 사람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건강하게 하소서"
라고 아침 눈을 뜨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고작 네 개 테이블로 시작한 국수집이 지금은 조금 넓어져 궁궐 같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하십니다. 그 테이블은 밤이면 이 할머니의 침대가 됩니다.
어느 날 아들이 국수가게에서 일하던 아줌마를 데려다 주러 갔다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가게 문을 잠그고 한 달, 두 달, 무려 넉 달을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문에 이런 쪽지가 붙었습니다.
"박중령입니다. 어제 가게에 갔는데 문이 잠겼더군요. 댁에도 안 계셔서 쪽지 남기고 갑니다. 제발 가게 문 열어주십시오. 어머니 국수 맛있게 먹고, 군대 생활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끓여준 국수 계속 먹고 싶습니다. 어머니 힘내세요. 옛날처럼 웃고 살아요. 가게 문 제발 여세요."
어떤 날은 석 장, 어떤 날은 넉 장, 사람들로부터 편지 쪽지가 계속 붙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내시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쪽지로 힘을 얻은 할머니는 그제사 다시 국수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할머니 가게는 이제 국민의 국수집으로 불리워집니다.
할머니는 오늘도 배려와 사랑의 다싯물을 밤새 우려냅니다.
할머니는 "이 모든 게 다 그 파라과이 사장 덕입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 하다고 이 난리냐"는 말씀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오늘도 모든 게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비결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배려와 연민입니다.
향기 나는 나무는 찍는 도끼에도 향을 묻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