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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후숙이 된다면

세상사는얘기/다산함께읽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23. 11. 1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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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후숙이 된다면

 

임 철 순(데일리임팩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나는 감나무를 좋아한다. 어려서 살던 고향 집 마당 끝에는 잎이 넉넉하고 풍성한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그 나무의 그늘은 나만의 호젓한 공간이었다. 악을 무찌르는 정의의 사도가 됐다가, ‘삼국지’의 조자룡이 됐다가, 비운의 사랑에 절망하는 주인공이 됐다가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가는 내 공상을 감나무는 다 지켜보며 응원해 주었다.

도글도글 떨어진 감꽃은 어디론가 영원으로 통하는 꽃처럼 신비해 보이기까지 했다. 잎과 그늘 열매가 다 고마운 감나무 철든 뒤에 안 일이지만, 감나무 잎은 넓고 커서 글씨를 쓰기에 좋은 재료다. 종이가 없어 감잎에 글씨를 쓰며 공부한 옛사람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홍한주(洪翰周·1798∼1868)의 시 ‘유거감회(幽居感懷)’에도 “단풍 숲은 비에 씻겨 취한 듯 붉고/감잎은 가을에 살쪄 글 쓸 만큼 크구나”[楓林雨洗明如醉 枾葉秋肥大可書]라는 말이 나온다.

감잎은 해독작용도 한다. 수주 변영로의 유쾌한 회고록 ‘명정(酩酊) 40년’에는 술에 대취한 수주가 옷을 벗고 주정을 부릴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추태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앞뜰의 감나무를 베게 한 뒤 시체처럼 쓰러진 아들을 감잎으로 수북이 덮어 살려낸 이야기다.

감나무는 이렇게 고마운 존재다. 감나무가 좋은 것은 감이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을에 먹는 홍시, 한겨울에 먹는 곶감은 얼마나 달고 좋은가. 할아버지가 벽장 속에 넣어둔 홍시를 꺼내 먹는 건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다. 가을이 되면 파란 하늘 아래 붉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도 보기 좋고, 높은 나무 꼭대기에 단 하나 까치밥으로 남아 있는 풍경도 아름답다. 내 외갓집에는 단감이 있었다. 나무에서 딴 감을 바로 먹는 게 어린 나는 놀랍고 신기했다. 왜 우리 동네에는 단감이 없을까. 어른들은 왜 이런 나무를 심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내 고향에서 익지 않은 땡감을 먹는 방법은 구정물에 며칠 담가 우리는 수밖에 없었다.

올해에도 나는 예년처럼 감을 잘 먹고 있다. 홍시도 사다가 매일 먹고 있지만, 달포 전쯤 이웃집에서 나눠준 감이 맛있게 익어가는 게 기분 좋고 흐뭇하다. 그걸 얼마 전까지 칼로 깎아 먹곤 했는데, 지금은 손으로 껍질을 슬슬 벗기거나 씻기만 하고 그냥 먹어도 될 정도로 감이 잘 익었다. 그렇게 감을 먹으면서 후숙(後熟)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후숙은 종자가 성숙한 뒤 휴면을 거쳐 발아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생리적 변화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이는 후숙의 의미는 ‘수확한 과실이 먹기에 가장 알맞은 상태가 되기까지의 생리적 변화’다. 말하자면 종자가 시간과 더불어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이 감은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열매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 어떻게 변화가 계속 진행되는 것일까. 감은 여전히 죽지 않은 것이다. 양분의 공급을 받지 못하는데도 단맛과 감칠맛이 높아지니 자연은 역시 신묘한 작용을 한다.

실의와 빈궁 속에서도 올바른 사람

사람도 이렇게 후숙될 수 있을까. 벼슬에서 떨어지거나 명예와 부를 잃고 영락해 실의에 빠지더라도 생명력을 유지하며 제 할 일을 다하고 본연의 모습을 지켜갈 수 있을까. 식물이 후숙하면 먹기 좋은 상태가 되는데, 사람이 후숙하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을 올바르게 살면서 나라와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사람의 참모습을 아는 방법 중 하나로 ‘여씨춘추’는 “빈궁해졌을 때 그가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라.”[賤則觀其所不爲]고 일러준다. ‘맹자’ 진심장(盡心章) 상에는 “선비는 궁해지더라도 의를 잃지 않고 영달하더라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士窮不失義 達不離道]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궁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가 자신의 지조를 지키고, 영달해도 도를 떠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窮不失義故士得己焉 達不離道故民不失望焉]라는 말이 이어진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잘되건 못되건 한결같아서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을 성숙한 인물이 있는가. 못나고 비루한 자들의 추한 행태만 보고 듣다 보니 사람도 후숙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쓴이 / 임 철 순
· 데일리임팩트 주필
·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 저서
『손들지 않는 기자들』열린책들
『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열린책들
『노래도 늙는구나』열린책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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