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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9 10:39 |
ⓒ 2005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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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장지연이 일제 말기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시를 게재하는 등 친일 행위에 나섰다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에 포함돼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고교용 교과서에 실린 사설과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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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금성출판사 |
| 1905년 <황성신문> 사설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온 위암 장지연(언론인·1864∼1921)이 훗날 친일파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기록될
예정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29일 논란 끝에 장지연을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
포함시켰다.
이전에도 위암 장지연의 변절과 친일 의혹이 수 차례 제기돼 왔지만, 그 친일 행각이 공식 기록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에 따라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장지연 친일 행각' 논란이 다시 불붙으면서 그에 대한 재조명 운동까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 장지연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국가보훈처와 '위암 장지연 기념사업회' 등 민간 단체의 향후 대응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진주경남일보> 주필 장지연, 일장기 아래 천장절 축하시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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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민언련 "장지연 서훈 박탈 요청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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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민언련(공동대표 강창덕, 김애리)은 29일 성명을 내고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 장지연의 친일 혐의를 공식 조사하도록 요청하고, 국가보훈처에 서훈 박탈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경남 마산시 현동 소재 장지연 묘소에 대한 지방문화재 지정(경남도문화재 94호) 취소와 장지연로(路)로 이름 지은
현동∼수정간 도로 이름 개명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경남 민언련 등 지역 시민단체들은 지난 7월 장지연 묘소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자 철회를 줄곧 요구해 왔다. 경남 지역에서는 '신문의 날'이 되면 장지연 묘소를 참배하는 행사도 있었지만 시민단체의 요구로 올해부터
중단된 상태다.
이밖에도 독립기념관은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시일야방성대곡' 발표를 기념하기 위해 준비한 <100주년
기념사설비> 건립을 백지화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언론재단이 연간 4000만원을 지원하는 '장지연상'도 재검토 논란이 일고
있다.
경남 민언련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발표를 계기로 친일인사를 애국지사로 오도하여 국민들을 속인 지방정부는 국민 앞에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며 "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장지연의 무덤과 그를 기리는 도로이름, 행사를 하루빨리 취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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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동안
위암 장지연은 을사늑약을 비난한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등을 통해 일제 말기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으로 꼽혀왔다. 이는 그가 근무하던 신문사
두 곳이 항일을 주장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가 정간 혹은 폐간 당했기 때문이다.
장지연이 사장으로 있던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1905년 11월 20일자)을 실었다가 정간 처분을 당했고, 주필로 일하던 <진주경남일보>는 경술국치일날 매천
황현의 '절명시'(1910년 8월 29일자)를 실었다가 강제 폐간 당했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해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후 장지연에게
'건국훈장공로단장'을 수여했다. 지난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장지연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일제
시기 그의 활동은 중·고교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가르쳐지고 있다. 현재 일반 학교에서 쓰이고 있는 고교용 '한국 근·현대사'(금성출판사)에는
장지연에 대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의 신문은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필봉을 휘둘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민중을
계몽하는데 앞장섰다"며 "<황성신문>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써서 을사조약 체결을 만천하에 알렸다"고 돼
있다.
하지만 '시일야방성대곡' 이후 장지연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가 장지연을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로 꼽은 이유는 바로 이 '그 이후' 행적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지연은 1910년 8월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실었다가 <진주경남일보>가 폐간 당한 뒤부터 친일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돼있다. <진주경남일보>는 폐간 10일
만에 복간됐다.
그뒤 장지연은 이듬해 11월 2일 두 개의 일장기 그림 아래 천장절(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시(漢詩)를
싣는 등 노골적인 친일 면모를 보였다. 당시 이 신문 주필은 장지연이었다. 이밖에도 장지연은 1916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 1면에 일본을 두고 '동양의 패자'라고 추켜세우는 글을 쓰기도 했다.
유치환은 '판단 보류'... 2차
명단 포함 여부 관심
위암 장지연의 친일 행각은 학계에서도 알려져 있던 사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편찬위는 장지연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에 대해 막판까지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지연의 경우 드러난 친일 행위만큼 초기 항일 행적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윤경로 위원장은 이날 KBS 라디오와 인터뷰에서 "장지연씨의 경우 이번에 논란이 좀 있었다"며 "위원회 안에서도 논란이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이번이 1차 발표이고 2차 발표가 있으니 보류를 하자는 게 원칙이었지만, 대체로 알려진 사람들은 넣었다"고
말했다.
(사)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는 이번 발표에 대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조심스게 반응하고 있다. 사업회 관계자는
29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당장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며 "12명의 임원진들이 모여 논의를 해봐야 견해를 밝힐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1차 수록 예정자 명단에는 통영 출신 문학가인 유치환씨도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지만 보류됐다.
그러나 이번 발표에서는 빠지더라도 추가 자료 확보 여부에 따라 내년 2차 발표에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유치환 제외는 2003년 작가회의와 실천문학, 민족문학작가회의가 1차 발표한 친일 인사 명단에 따라 결정됐다"며 "결코
(친일인명사전 수록) 판단에서 완전히 보류되거나 제외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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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9 15:01 |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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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2명, 장관 21명, 시장·도지사 9명, 합참의장 4명, 육군참모총장 7명, 공군참모총장 4명, 검찰총장
4명, 대법원장 3명, 대법관 10명.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 중 관료, 경찰, 군인, 판·검사 출신 인사들의 해방 후
주요 공직 역임 내역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가 29일 오전 발표한 이 명단에는
고등문관 이상 관료 1166명, 경찰 521명, 위관급 이상 장교 216명, 판·검사 201명이 포함돼 있다. 줄잡아 2000여명이
넘는다.
고위직 장악한 친일 인사, 역사의 고비 때마다 등장
이들은 해방 뒤에도 과거 경력을 살려 요직을
차지했다. 관료 출신들은 해방 후에도 행정 요직으로 나아갔고, 경찰·군·법조계 출신도 각각 일제 때 활동했던 분야를
장악했다.
이들은 단순히 고위직을 역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해방공간에서의 테러 기도(친일경찰 노덕술), 백범 김구 암살(친일경찰
출신 군인 전봉덕), 이승만 장기집권의 길을 연 1952년 부산정치파동(만주군 출신 원용덕), 4.19(판사 출신 홍진기),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민복기) 등 현대사의 고비 지점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뒤로 돌리는 데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친일경찰의 기술은 해방 후 한국 경찰에게 그대로 이식됐고 한국 군대 또한 일본군의 폭력적인 병영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부문별로 살펴보면 일제 관료 출신들 중 상당수가 행정부의 장관직을 역임했다. 내무(1명), 재무(2명),
농림(2명), 건설(1명), 보건사회(1명), 체신(2명) 등 부문도 골고루였다.
주요 인사는 내무부·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현석호(일제 때 화순군수), 건설부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직을 맡았던 전예용(일제 때 광주군수), 농림부 장관이었던 임문환(일제 때 용인군수)
등이 있다.
'고문기술자' 고등경찰 약진... 일제 검열관이 국사편찬위원장 맡기도
경찰의 경우 행정
영역보다 더 극적이다. 일제 식민통치의 최선봉에 서 있던 이들은 해방 후에도 대부분 경찰 자리를 유지했고 특히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고등계 형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고등경찰 출신 중 가장 대표적인 인사는 노덕술이다. '악질 친일 경찰'의 대명사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5년 8월 당시 평남 보안과장이던 노덕술은 제헌국회의 소장파 의원들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가 적발되는 등 해방 후에도 못된 짓을 서슴치 않았다.
노덕술은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그를 매우 아낀 이승만 대통령이 "공이 많은 노덕술을 처벌하지 말라"고 말하며 반민특위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 같은 해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노덕술은 다시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아울러 반민특위에서 사형이 구형됐던 김덕기(평북 경찰부 고등과장 역임,
독립운동가 오동진 체포)와 김태석(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역임, 독립운동가 강우규 체포)도 특위 해체로 인해 부활했다.
전봉덕처럼
일제 때 경찰이었다가 해방 후 군으로 옮긴 경우도 있다. 평북 보안과장 등을 맡았던 전봉덕은 해방 후 육사 1기로 임관한 뒤 1949년 6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언론·출판물을 제멋대로 가위질했던 검열관 출신 경찰이던 김성균은 특이하게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역사학계에서 '해방공간(1945~1948)을 살아간 민중의 최대 불만은 친일 경찰의 존속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친일경찰은 요직을 장악한 뒤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을 가로막는 장애물 노릇을 했다.
일본군 경력은
참모총장·합참의장·국방장관 가는 디딤돌
군을 장악한 것도 일본 육사 및 만주군관학교 출신 등 일본군·만주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국방부 장관 역임자도 5명(행정관료 출신인 현석호가 국방부 장관을 지낸 것까지 포함하면 총 6명)이나 된다.
만주군
헌병 대위 출신인 정일권은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을 거쳐 박정희 정권 때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간도특설대에서 활약한
백선엽(만주군관학교 출신)도 육군참조총장·합참의장을 지냈다.
초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정렬(일본 육사 출신)도 국방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역임했고 한국군 '군번 1번'인 이형근(일본 육사 출신)도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을 지냈다.
만주에서의 '독립군
토벌'로 악명높던 김석범(만주군관학교 출신)도 해방 후 해군중장으로 예편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도 관여했을 뿐 아니라 초대 헌병사령관을
역임한 원용덕도 만주군 중좌 출신이다.
한국군을 장악한 일본군·만주군 출신에게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은 자연스런 진급
코스였던 셈이다.
4.19 발포 당시 홍진기 내무장관, 사형->특사->언론계 투신
법조 부문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홍진기, 민복기 등 5명이 일제 때부터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법무부 장관을 맡았다. 검찰총장, 대법원장, 대법관 등
법조계를 좌지우지하는 자리 역임자 중에서 친일 인사로 분류된 이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인물은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의 부친인 홍진기다. 일제 때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하고 전주지법 판사를 지낸 홍진기는 이승만 정권 말기에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학생과 시민에게 총을 발사한 4.19 혁명 당시 내무부 장관도 바로 홍진기다.
발포 명령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이후 징역 9개월형으로 감경됐던 홍진기는 5.16 쿠데타 후 다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된 뒤 특사로 풀려난 홍진기는 이병철 전 삼성회장과 사돈을 맺고 언론계에 투신했다. 생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사후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대법원 판사, 검찰총장, 대법원장, 법무부 장관을 모두 역임한 민복기(일제 때 경성지법 판사)도
주목할 만하다.
민복기는 법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64년 8월 제 1차 인혁당 사건이 일어난 뒤 서울지검 검사들이 "아무런
증거도, 혐의도 찾을 수 없어 양심상 기소할 수 없다"고 나서자 힘으로 이들을 눌렀다. 그는 "상명하복의 검찰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고, 법조계의 독립성은 박정희 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한편 연구소와
편찬위가 이날 "1차명단이 친일 인사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향후 추가될 예정"이라고 밝힌 데서도 드러나듯 친일 인사들이 각 부문의
요직을 장악해 온 실태는 이날 발표된 범위보다 더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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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9 15:21 |
ⓒ 2005 OhmyNews |
친일인명사전편찬위는 29일 3090명에 이르는 친일인명사전 1차 수록 예정자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는 이 중 직위가 아주 높거나 잘 알려진 주요인물에 한해 명단과 함께 약력을 공개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가
공개한 친일행적과 약력 전문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
【수작자】
(1)
을사오적 *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 1905 을사조약 때 내각총리대신, 1910 한일합방 공로로 훈1등 백작 1921 중추원
고문, 부의장 1920 후작 승급 *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 1904 한일의정서 협정 조인 1905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1910 훈1등 백작 매국공채 10만원 중추원 고문 *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 1894 충청감사로 농민군 진압, 을사조약·합방 조약
체결시 참여, 경학원 대제학 1910 자작 훈1등 매국공채 10만원, 중추원 고문 *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 1905 을사조약
조인, 합방 주역, 아들 이창훈이 습작, 형 근호 동생 근상 합방후 자작. 중추원 고문 * 권중현(權重顯, 농상공부대신) : 1904
러일전쟁 때 일본군 위문, 농상공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1910 훈1등 자작 매국공채 5만원, 중추원·조선사편수회
고문
(2) 정미칠적 * 이완용(내각총리대신) : 을사오적 참조 * 송병준(宋秉畯, 농상공부대신) : 일진회
조직, 1910 훈1등 자작과 매국공채 10만원, 아들 종헌 습작. 중추원 고문, 경기도 참사 1920 백작으로 승급, 사위 구연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 * 이병무(李秉武, 군부대신) : 1884 무과 급제 1896 일본 육사 졸업 1907 군부대신, 정미7적 1910 자작
매국공채 5만원 * 이재곤(李載崑, 학부대신) : 자작. 은사금 5만원. 1910-20.5 중추원 고문 * 임선준(任善準, 내부대신)
: 자작. 은사금 5만원. 1910-19 중추원 고문 * 조중응(趙重應, 법부대신) : 민비 시해 가담. 고종 퇴위 강요. 1909 친일지
<법정신문> 발간. 자작. 1910-19 중추원고문, 1916 대정친목회 및 한성부민회 회장 일훈 1등 대욱장 *
고영희(高永喜, 탁지부대신) : 1907 이완용내각의 탁지부·법부 대신, 정미7적. 1910 훈1등 자작 매국공채 10만원, 고희경
습작(1920 백작으로 승급)
(3) 경술국적 * 이완용(내각총리대신) : 을사오적 참조 *
윤덕영(尹德榮, 시종원경) : 1908 시종원경, 1910 자작, 1917 순종에게 일본 왕실 참배 종용, 1925 중추원 고문, 1940
중추원 부의장 * 민병석(閔丙奭, 궁내부대신) : 1906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겸 내부대신 1909 이토 조문사절 1910 훈1등 자작
매국공채 10만원 1911 이왕직 장관 1939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의 처내종. * 고영희(탁지부대신) : 정미칠적 참조 *
박제순(내부대신) : 을사오적 참조 * 이병무(친위부장관) : 정미칠적 참조 * 조민희(趙民熙, 승녕부 총관) : 1885 문과 급제
후 평안도관찰사, 주일공사. 1910 훈1등 자작 매국공채 5만원, 1919 중추원 고문. 이완용의 처남. * 조중응(趙重應,
농상공부대신) : 정미칠적 참조
(4)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귀족이 된 왕실 종친들 * 이재완(李載完) : 고종의 종형, 즉
흥완군 최응(最應)의 아들로 대원군의 조카. 1899 궁내부대신 1905 보빙대사로 을사조약 감사 사절단 1910 훈1등 후작, 매국공채
33만6천원 * 이재각(李載覺) :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손으로 완평군 승응(昇應)의 자. 1905 특명대사로 러일전쟁 승전 축하
1910 훈1등 후작, 매국공채 16만8천원. 1935년 사망 * 이지용(李址鎔) : 고종의 종질. 을사오적 참조. *
이기용(李埼鎔) :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완림군의 자, 증조부가 곧 남연군. 1910 자작 매국공채 3만원 1937 조선국방협회와 동요회 발기인
1945 칙선 귀족원 의원 * 이해창(李海昌) : 한성판윤 1907 종1품 1910 후작과 매국공채 16만8천원. 1945 사망 *
이해승(李海昇) : 1910 후작. 매국공채 16만8천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5) 친일에 앞장선 순종의
외척 * 윤택영(尹澤榮) : 해풍부원군, 순종의 장인. 1899 시강원 시종관 1910 후작 매국공채 50만4천원, 1927 파산
선고로 실작 * 윤덕영(尹德榮) :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형. 처 김복완은 애국금차회 회장. 1908 시종원경 1910 자작 1917
순종에게 일본 왕실 참배 종용 1925 중추원 고문 1940 중추원 부의장
【중추원】
* 고원훈(高元勳) 경북 전북. 1926 경북 참여관, 1932 전북 지사,
1940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0 중추원 참의 * 김갑순(金甲淳, 창씨명 金井甲淳) : 충남. 1910 아산군수, 1920
총남도평의원, 1921-29 중추원 참의. 1941 흥아보국단 충남도위원, 임전보국단 이사 * 선우순(鮮于筍) : 서울. 1920
대동동지회 회장. 1921 이후 13년간 중추원 참의. 내선일체론 주창. 동생 선우갑(鮮于甲)은 밀정. * 이범익(李範益, 창씨명
淸原範益): 1929 강원지사, 1937 중추원 참의. 동척 감사. 만주국 대부. 해방후 시베리아 압송 * 박두영 : 일본육사 15기.
1932 민생단 단장. 1937-45 참의. * 장직상(張稷相) : 대구,서울. 1924 대구상업회의소 회두, 1930 중추원 참의,
1940 임전보국단 이사장택상의 장형, 아버지가 왕산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에게 피살됨 * 현준호(玄俊鎬) : 광주,서울. 1925 호남은행
대표취체역, 1930 중추원 참의, 1938 총독부시국대책조사위원.
【제국의회】
* 박영효(朴泳孝) : 1910 후작, 1911 조선귀족회장, 1921
조선인산업대회 회장, 1939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편수회 고문, 정2위 훈1등 훈장 * 박춘금 : 1921년 노동상애회 조직
1932,1940 일본중의원 의원. 1945 대의당 당수.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 대회 개최
【관료】
1) 황국신민화의 선봉에 선 친일 관료 * 김대우(金大羽)
: 1928 박천군수, 1936 총독부사회교과장, 1940 경남참여관, 1943전북군수, 1945 경북지사. * 이각종(李覺鍾) :
1919 김포군수, 1938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1941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황국신민의 서사 작성.
【경찰】
(1) 일제 경찰간부 *홍순봉: 초산 경찰서장 경부, 만주국
행정참사관. 해방후 6대 치안국장, 헌병학교장
(2) 고등계 경찰 * 김덕기(金悳基) : 평북 경찰부 주임,
고등과장. 1942 평북 참여관 겸 산업부장 1943 평남 참여관 농상공부장관, 독립운동가 오동진선생 등 체포, 반민특위에서 사형
구형. * 김태석(金泰錫, 金村泰錫) : 1923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장 1938 경남도 참여관 겸 사업부장 1944 중추원 참의.
강우규선생 체포, 반민특위에서 사형 구형. *노덕술(盧德述, 창씨명 松浦鴻): 1934 평남경찰부 보안과장 1937 경기도경 경부 1945
평남 보안과장, 제1경부 총감부관방장. 사상관계를 다루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 고문. 1949 반민특위 체포. 1950 헌병 중령. 419혁명 후
민의원 선거에 출마. * 전봉덕(田鳳德, 창씨명 田中鳳德) : 1939 일본 고등문관 시험 합격. 1941 평북 보안과장. 1943년
경기도경찰부 수송보안과장. 해방 당시 경시 재직. 1948 육사1기 입학 그해 육군소령으로 입관. 김구 암살사건시 안두희 보호. 1950년 예편
국무총리 비서실장. * 하판락(河判洛, 창씨명 河本正夫) : 1936 사천경찰서 형사. 1937 부산수상경찰서에서 독립운동가와 사상범
체포. 1943 경남경찰부 고등경찰과 순사부장. 1946 경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 1949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무혐의 처분 석방.
1956 경남도의원 선거에 출마.
【검열관】
*김성균(金聲均)
-경무국 도서과 촉탁, 도서과 속 영화검열실 검열관, <반도문학의 회고(조선 41.1)>, 해방후
국사편찬위원장.
【군장교】
*김석범(金錫範) : 1937
만주군관 5기 졸업. 1940 일본육사 5기 졸업. 만주에서 악질적으로 독립군 토벌. 1946 해군중위 임관. 1949 해군통제부 작전부장.
1960 해군중장 예편. *윤상필(尹相弼, 창씨명 伊原相弼) : 육사 27기, 관동군사령부 참모부 제3과(조선인 전담) 기병소좌,
만주협화회 본부이사, 시베리아 압송 *홍사익(洪思翊) : 일본육사 26기. 일본군 중장. 필리핀 포로수용소장, 동경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됨. *어담(魚潭, 창씨명 西川潭一) : 1899 일본육사 11기 졸업. 1906 조선주둔군 사령부 육군소장. 1934-43 중추원
참의. 지원병제 환영담화. 배영동지회 상담역. 임전보국단 발기인. *원용덕(元容德) : 군의 특임. 1933 만주군 육군 군의관(대위).
만주군 중좌. 1946 국방경비대 초대 사령관. 여수순천사건 진압. 1953 헌병 초대 총사령관. *김석원(金錫源) : 1915 일본육사
27기 졸업. 1917 일본군 소위 임관. 1931 만주사변때 공을 세워 포상금 700원 받음. 평양병사부 과장(대좌)를 하다 해방 맞음.
매일신보 혈서지원 확인. 육사 8기 특별반을 거쳐 대령 임관. 1956 소장 예편. 성남중고등학교장으로 교육사업에 전념.
【종 교】
*백낙준(白樂濬) : 1941 미영타도 좌담회 참석.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활동. 1944 경성대학 법문학 부장. 1951 문교부 장관. 1957 연세대 초대 총장. *정인과(鄭仁果, 창씨명
德川仁果) : 1925 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 1939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결성. 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9
반민특위 체포. *정춘수(鄭春洙, 창씨명 禾谷春洙) : 1938 흥업구락부사건시 전향성명서 발표. 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4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1949 반민특위 체포. * 이회광(李晦光) : 불교계 이완용. 1912 조선선교양종각본산 주지회의원
원장. 1915 불교진흥회 조직. 1919 일본 임제종과 합병 획책. * 권상로(權相老, 창씨명 安東相老) : 1937년 '선각자로서'라는
시국강연. 1940 국민총력연맹 참사. 1943 <임정의 조선불교> 간행. 해방후 불교대학 학장. 1962 문화훈장
서훈. *이종욱(李鍾郁, 창씨명 廣田鍾郁) : 1937 총본산건설위원회 31본산주지대표. 1940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불교회
비행기 헌납 주동. 1977 건국훈장 국민장 서훈. *노기남(盧基南) : 1939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 이사. 1940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 이사장. 1943 전선종교단체협의회 천주교회 대표위원. 해방후 이승만을 도와 단정 수립. *남상철(南相喆) : 1942
총력연맹 천주교연맹 이사장으로서 징병 독려 강연. 1944 보도특별정신 대강연. *최린(崔麟, 창씨명 佳山麟) : 33인의
한사람으로써 변절. 천도교를 분열시켜 자치운동 도모. 1934 중추원 칙임참의. 1937 매일신보 사장 취임. 1940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 조선임전보국단 회장. 1945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1949 반민특위에 체포. 한국전쟁때 납북. * 이종린(李鍾麟, 창씨명
瑞原鍾麟) : 1939 국민정신총동원 천도교연맹 이사장. 흥아보국단 경기도 위원. 1941 국민총력연맹 평의원. *박완(朴浣, 창씨명
鶴川浣) : 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정신총동원 천도교연맹 이사. *정만조(鄭萬朝) : 1929 경학원 대제학. 1930 명륜학원 총재 겸
강사. 대동사문회 발기인. 1934 시중회 평의원. *어윤적(魚允迪) : 1919 대동사문회 대표. 1922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1927 경기도 참여관. 1933 동민회 평의원.
【문
학】
*이광수(李光洙, 창씨명 香山光郞) : 1922 민족개조론 발표. 1939 조선문인협회 회장. 1942
대동아문학자대회 참석. 수많은 친일 글을 남김. 1949 반민특위에 체포. *김동환(金東煥, 창씨명 白山靑樹) : 1929 월간 삼천리
창간. 1941 지원병보급 혈전대강연회 연사로 참석. 1941. 임정대책협의회 발족 주도.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이란 전쟁독려 시
씀(1943.11.6). 1949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공민권 정지 처벌 받음. *모윤숙(毛允淑) : 1940 조선문인협회 문예대강연회에서
친일 강연. 1941 조선교화단체 연합회 간부. 1942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간사. 해방후 단정 수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예술원상, 국문훈장
모란장, 삼일문화상을 받음. *최재서(崔載瑞, 창씨명 石田耕造) : 1941년 친일잡지 <국민문학> 주간. 1943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대동아의식에 눈뜨며, 받들어 모시는 문학 등의 글에서 천황숭배를 주장. *유진오(兪鎭午) 1939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1941 총력연맹 문화부위원 1942.43 대동아문학자대회조선대표 1945 조선언론보국회 평위원. 해방후 제헌국회헌법 기초위원. 고려대 총장.
*주요한(朱燿翰, 창씨명 松村紘一) : 1934 조선일보 전무이사. 1937 흥사단사건시 전향성명 발표. 1943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장. 1945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해방후 민주당 민의원, 4.19후 부흥부, 상공부 장관을 지냈고 1979 사망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음 악】
*이종태(李鍾泰, 창씨명 鈴木貴一郞) :
1937 매일신보 주최 애국가요의 밤에 '총후' 작곡, 북지위문단원으로 활약. 후생악단 전무이사. *현제명(玄濟明) : 1937 조선문예회
회원. 1938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 1944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조선음악협회 이사. 해방이후 미군정장관을 명예회장으로
한 고려교향악단 창설, 서울대 예술학부 음악학부장이 됨 *홍난파(洪蘭坡, 창씨명 森川潤) : 1939 홍난파 지휘로 애국가곡집 공연이
방송됨. 1940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지나사변과 음악'에서 성전 독려. 1941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박시춘 : 1943년
'조선지원병 실시 기념음반' 중에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및 '목단강 편지'를 작곡. *남인수 : 조선군 보도국 제작 '그대와
나(내선일체 주제가)'와 '혈서 지원' '이천오백만 감격' 등의 친일 노래를 부름. *김기수(金琪洙·光山哲三, 국악 작곡)-1940년
11월 9일 일본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봉축연회에서 이왕직 아악부가 연주한 '황화만년지곡' 작곡. 이 곡은 이능화의 1939년 한문시에 곡을
붙여 일본기원 2600년 기념 공모 당선작, 국내 최초로 오선보로 작곡된 국악 창작.
【미
술】
*김경승(金景承) : 1939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졸업. 1943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전람회에서
'여명' '제4반' 입선. 해방후 충무공 이순신상(1953), 안중근상(1959) 등 조각 *김은호(金殷鎬, 鶴山殷鎬) : 1937 이후
선전(鮮展) 참여작가. 1941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 1937 애국금차회 활동을 그린 '금차봉납도'를 미나미 총독에게
증정. *김기창(金基昶) : 1940 '선전' 추천작가. 1942 반도총후미술전 추천작가. 1943년 매일신보의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와
1944년작 '총후병사'는 화필보국(畵筆輔國)의 증거. *이상범(李象範) : 1942-44 반도총후미술전 일본화부 심사위원. 1944
모던일본사가 친일작가를 위해 제정한 제5회 조선예술상 수상. 1940 조선남화연맹전, 애국백인일수 전람회 등 국방헌금 마련 미술전에 빠짐없이
참여. 해방후 홍익대 미대 교수, 문화훈장 대통령상(1962), 삼일문화상(1963) 수상.
【공연예술】
* 유치진(柳致眞) : 1941 친일단체 현대극장 대표 1942 이용구를
찬양한 장막희곡 [북진대] 발표. '원칙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조광 1941.6) 기고. *이서구(이서구, 창씨명 牧山瑞求, 필명
이고범, 남궁춘) : 조선연극협회 회장. 41년 근로문화인부대. 41년 9월 1원 채권 봉사대. 45년 8월3일 문인보국회 극문학부회장.
평론 '금후의 국민극(매일신보 41.10.21)' <곡산영감>(1막,일어극) 연출. *조명암(본명 조영출, 필명 이가실) :
1943 부여신궁어조영 문화인봉사대. 친일가요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처>, <혈서지원>,
<2천5백만의 감격> 등 작사. <승리에의 길>(이동연극예능대회 작, 1944) 각본 씀. *안종화(安鍾和, 창씨명
安田辰雄) : 조선영화협회 회장, 황도학회 발기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 위원, 친일연극, <개화촌> 연출.
전환쇄신의 시 영화의 국가사명(매일신보 1941년 10월 27일-29일). *안석영(安夕影, 창씨명 安田榮) : <지원병>
각색·감독, <조선에 온 포로> 감독, 황도학회 발기인, 근로문화인부대 활동,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조선영화인협회 상무이사,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 위원. 징병을 찬양하는 잡지의 표지를 그림. *허영(許泳, 창씨명 日夏英太郞) <너와 나> 각본·감독,
극단 청춘좌 단원 <그대와 나를 말하는 좌담회(<삼천리> 13권 9호)>, <좌담회 조선영화의 전모를
말한다>(<영화평론> 1941년 7월)> *문예봉(文藝峰, 창씨명 林丁元) <군용열차>
<지원병> <집 없는 천사> <너와 나> <젊은 모습> <조선해협> <태양의
아이들> <사랑과 맹세>에서 주연 여배우로 출연,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연기과 사원.
【교육학술】
*고광만(高光萬, 창씨명 高峰啓光) : 조선총독부 시학관(학무국),
충주공립중학교 교장. 해방후 문교장관, 부산대 총장. *김활란(金活蘭, 창씨명 天城活蘭) : 1941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5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2 '징병제와 우리의 각오'(신시대 1942.12). 해방후 이화여대 총장. *이능화(李能和) :
1922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1925-40 조선사편수회 위원.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에 지도적 역할. *장덕수(張德秀) :
1939 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장. 1941 조선임전보국단 간부. 1945 국민의용대 총사령부 간부. 1944 '입영학병에 부탁' '관민일치
총궐기' 발표. 1945 국민문학 5월호에 [징병의 감격을 말함] 논문 씀. *최남선(崔南善) : 1928 조선사편수회 위원 1938
충추원 참의.1938 만주 만몽일보 고문. 1939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1949 반민특위 체포. 1950. 서울시편찬위원회
고문. *황신덕(黃信德) : 1940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위원. 40년 이후 중앙여중고 설립자 겸 교장(~1961). 1942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간부. 1946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 삼일여성동지회 부회장 역임.
【언
론】
* 박희도(朴熙道) : 친일잡지 동양지광사 사장.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참사. 배영동지회 평의원. 시중회
발기인. * 서춘(徐椿, 창씨명 大川慈種) : 1933-1937 조선일보 편집국장 겸 주필. 1938 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총력연맹
위원. 1940 매일신보 주필. 친일잡지 『태양』창간. 2.8독립선언 유공자로 있다가 1996년 서훈 박탈. *김한경(金漢卿) :
동양지광사 사원, 국민문화연구소39전무, 시국대응사상보국연맹간사38, 대화숙, '동양문화와 일본정신(<동양지광> 39.2월호)',
'청년의 성격과 그의 연성에 대하여(<동양지광> 43년 9월호)', '공동운명에의 결합과 그 환원론(<삼천리>
40.3월)', '일본정신의 정화?(<조광>, 1940년 12월호)' *김환(金丸) :국민신보(일진회 기관지) 기자, 이등박문
장례식 참가, 1910년대 매일신보 주임, 시사신문(국민협회 기관지) 편집주임, 시사평론, 민중신문(1930) 주필, 국민협회
간부. *노성석(盧聖錫) 신시대사부사장, 문인협회 간부로 부여신궁출역(1941), 총독부주최 언론계인사 간담회(1941)
참가 *이창수(李昌洙) 매일신보 통신부장(1938,39,40,41), 조사부장(1942),논설위원(1943), 언론보국회 평의원. '이
시련을 극복하라(<조광> 1944년 8월호)', '제국해군의 위용 (<조광> 1942년 2월)'
【전쟁협력】
* 김연수(金秊洙) : 1924 삼양사 설립. 1939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45 중추원 참의. * 문명기(文明埼, 창씨명 文明琦一郞) : 1935
문명기호라는 비행기 헌납 1943 헌함운동을 제창하고 동광 3개 기부. 1943 황도선양회 회장. * 박승직(朴承稷, 창씨명 三木承稷) :
1919 조선경제회 이사. 1938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상담역. 1940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 박흥식(朴興植) :
1938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및 배영동지회 상담역. 1941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4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 1945 대화동맹
심의원. * 방응모(方應謨) : 1933 조선일보 사장. 1935 조광 창간. 1937 애국금차회 활동. 1938 전선순회 시국강연반에서
활동,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1941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3 출진학도 격려대회 주최. *
신태악(辛泰嶽) : 서울. 1936 조선변호사회 부회장 1941 임전보국단 이사 *현영섭(玄永燮, 창씨명 天野道夫) : 1937 녹기연맹의
일본문화연구소 근무. 1938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주사. 1940 황도학회 이사.
【친일단체】
* 민원식(閔元植) : 서울. 1910 친일단체인 진보당. 정우회 조직
1920 국민협회 회장. 참장권 청원운동 주동자. 중추원 부찬의참정권 운동, 피살 * 이용구(李容九) : 서울. 1904 통합일진회 조직
을사조약 강요 앞장, 1907 고종폐위 강요 의병토벌대인 자위대 조직, 1909 합방성명서 발표 1912 훈2등 서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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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9 1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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