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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비만이 없습니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2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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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비만이 없습니다
<포토에세이> 비 온 뒤의 풍경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민수(dach) 기자   
▲ 오이풀
ⓒ2004 김민수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릇이 있다고 합니다. '욕망의 그릇'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이 그릇을 가득 채우려고 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이들도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비우고 비워도 늘 충만한 그릇이 있다고 합니다. '나눔의 그릇'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이 그릇은 비울수록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까지도 함께 풍성해진다고 합니다.

비가 한번 오면 좋겠다

봄 가뭄에 작은 텃밭에 심은 채소들도 시름시름합니다. 싹을 틔운 지가 언젠데 자라는 것이 영 시원치가 않았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어도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해 애를 태웠는데 마침 단비가 흠뻑 내렸습니다. 역시 자연이 내려주는 비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단비가 내리고 나니 새싹들이 쑥쑥 올라옵니다. 모종을 냈던 고추, 가지, 호박, 물외(오이), 토마토도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싹만 틔웠지 자라기를 멈춘 듯하던 땅콩, 옥수수도 껑충 자라나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폅니다.

'단비야,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맙다.'

비가 참 잘 와 주었다며 동네 어르신들도 모두들 좋아하십니다. 들녘의 고사리들도 쑥쑥 올라왔을 것이라며 아내가 들녘행을 재촉합니다. 나는 고사리보다도 들꽃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직도 단비를 머금고 있는 촉촉한 들녘으로 향합니다.

▲ 찔레
ⓒ2004 김민수
비 온 뒤의 풍경은 깨끗합니다. 오이풀과 찔레 이파리에 송글송글 보석 같은 물방울들이 맺혀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이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이풀과 찔레의 몸 속에 있던 물이 배출되어 생긴 현상입니다.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흔하지 않은 풍경,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아, 자연은 필요한 만큼만 지니고 있구나.'

그동안 아무리 가뭄에 목이 말랐어도 단비에 온몸을 축이고 나니 필요한 것 외에는 소유하지 않고 비우는 모습을 봅니다. 비우니 그것이 보석이 되어 영롱하게 빛납니다. 비운다는 것은 나눈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지 않으니 자연에는 비만이 없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만족하니 자연에는 헛된 것에 대한 집착이 없습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은 종종 자신들이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자꾸만 쌓아두려 하고, 그 쌓아둔 것에 따라 그 사람을 저울질합니다.

헛된 것에 대한 집착. 결국 그것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내가 아픈 것보다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이들에게까지 줍니다. 이 세상에는 버림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비우고 털어 버림으로써 충만해지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헛된 것은 없거나 놓아버리면 안 될 것처럼 우리를 이렇게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놓아버린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 안될 것 같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그것을 놓아버림으로써 어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헛된 것을 놓아버리는 일이 처음에는 아픔 같았는데 그보다 더 큰 행복을 얻었다고 합니다.

'욕망의 그릇'과 '비우는 그릇' 이 둘 중에서 택하라면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비우는 그릇'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의 그릇에는 '욕망의 찌꺼기'같은 것들이 남아있어서 온전히 비우는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의 찌꺼기 같은 것들을 하나 둘 벗겨내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들꽃들을 바라보노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바라보노라면 욕망의 찌꺼기 같은 것들이 하나 둘 벗겨져 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자연 앞에 서 있는 시간은 늘 특별한 시간이요, 행복한 시간입니다.

너른 들판에서 고사리를 꺾던 아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딨어?"

그제서야 젖은 땅 때문에 무릎이 축축해졌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을지라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어쩌면 그 자리의 그 풍경은 신이 나에게만 특별히 내려주신 선물인지도 모르니까요.
김민수 기자는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책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리지 않는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www.freechal.com/gangdoll을 방문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2004/04/20 오전 8:48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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