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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우며 먹는 설렁탕 한 그릇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2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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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제' 열리던 날 '설렁탕'을 맛보다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55]역사를 배우며 먹는 설렁탕 한 그릇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규환(kgh17) 기자   
▲ 선농제에서 초헌관이 절을 올리고 있습니다.
ⓒ2004 김규환

▲ 한 그릇 드십시오.
ⓒ2004 김규환


선농제향 성황리에 재현

풍년 농사를 기원하기 위해 농업신(農業神)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祭)를 올리는 선농제향(先農祭享)이 동대문구 제기동 선농단(先農壇 사적 제 436호)에서 주민과 각계 인사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곡우(穀雨)인 20일 재현됐다.

10시 정각 동대문구청을 출발한 어가행렬을 시작으로 11시부터는 선농제향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초헌관인 홍사립 동대문구청장의 인사말, 정연균 농협중앙회서울시지역본부장, 구의회 의장 등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선농제는 농업신에게 폐백을 드리는 전폐례(奠幣禮)를 시작으로 첫 번째 작(酌)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두 번째로 작(酌)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세 번째 작(酌)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와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신이 내리는 제물(복)을 먹는 의식인 음복수조례(飮輻受 禮),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는 망예례(望 禮)를 끝으로 1시간 동안의 본 행사를 마쳤다.

이어 전통 설렁탕 재연과 참석자들 모두 설렁탕 한 그릇씩을 먹었고 어린이, 주부 백일장의 순서로 진행됐다.

▲ 어가행렬1
ⓒ2004 김규환
선농제 지내고 왕이 논밭을 갈고, 왕비는 선잠제(先蠶祭)를 지내다

1980년대 초반 TV를 켜면 9시 뉴스 첫 화면에 "전두환 대통령은 김포평야에서 농민과 함께 올해 첫 모내기에 참여했습니다"라는 소식을 해마다 보았는데, 이는 현대화된 선농의 한 모습이다.

선농(先農)의 기원을 상고해 보면 "신라(新羅) 때 입춘(立春) 뒤 첫 해일(亥日)에 명활성의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제(先農祭)를 지냈으며, 입하(立夏) 뒤 해일(亥日)에는 신성북문에서 중농(中農)에 제사지내고, 입추(立秋) 뒤 해일(亥日)에는 산원에서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 어가행렬2
ⓒ2004 김규환
또 고려(高麗) 성종 2년(983년) 정월에 "왕이 원구단(園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籍田)을 갈며 신농(神農)에게 제사하고 후직(后稷)을 배향(配享)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농(先農)은 신라(新羅) 때부터 비롯되었으나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을 제향(祭享)한 것은 고려 성종(成宗) 때부터인 것으로 짐작된다.

선농단(先農壇) 친경(親耕)은 조선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4년(1910년) 5월에도 행하였으나, 우리 나라가 일제 치하에 들어가면서부터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79년부터 제기동의 뜻 있는 분들이 선농단친목회(先農壇親睦會)를 구성, 선인들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이 단에서 제를 올리다가 1992년부터는 동대문구에서 맡아 행사를 치르고 있다. 이는 한·중·일 3국 중 유일하게 전통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 어가행렬3-대왕마마 납시오.
ⓒ2004 김규환
한편, 왕이 선농제를 지낸 것과는 별도로 왕비는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해 선잠제(先蠶祭)를 지냈다. 지금의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선잠단지(先蠶壇址)에서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에게 양잠(養蠶)의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전통 제례의식이다.

조선 정종 2년인 1400년부터 매년 3월 초사흘에 행해졌고, 1471년(성종 2년) 선잠단을 다시 쌓은 뒤 1477년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신축하고 왕비가 직접 누에를 쳤다고 한다.

▲ 어가행렬4-왕이 가마에서 내려 걷고 있습니다.
ⓒ2004 김규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선농단에서 소를 잡아 국과 밥, 술을 내리다

선농제를 지내고 나서 국왕을 비롯한 조정중신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함께 친경(親耕) 즉, 친히 밭을 간 뒤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소를 잡아 국말이 밥과 술을 내렸다. 선농단에서 내린 국밥이라 하여 선농단→선농탕→설농탕→설롱탕 또는 설렁탕으로 변한 것이 설렁탕의 어원으로 볼 수 있다.

설렁탕은 대형 가마솥에 쇠머리, 사골, 도가니, 뼈, 사태, 양지머리, 내장 등을 재료로 10여 시간 푹 끓이면 살코기와 뼈에서 뽀얀 국물이 우러나온다. 혹자는 그 빛깔을 보고 설농탕(雪濃湯)이라고도 한다. 살코기와 내장을 오래 끓인 곰국과 다른 독특한 풍미가 나며, 사골곰탕보다도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큰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끓이다가 뼈를 넣는다. 국이 끓어올라 거품이 위에 뜰 때마다 자주 걷어내고 누린내가 가시도록 생강, 대파, 마늘도 넣는다. 끓는 국에 고기류를 넣어 국물이 뽀얗게 될 때까지 함께 끓인 후, 뼈는 건져내고 살과 내장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다시 넣는다. 고기가 손으로 뜯어질 때까지 푹 마저 끓인다.

▲ 선농제1-전통행사에는 악(樂)과 무(舞)가 빠지지 않는답니다.
ⓒ2004 김규환
뚝배기에 설렁탕을 담고 밥과 소금, 고춧가루, 후춧가루, 다진 파, 다진 마늘을 따로 곁들여 먹는 사람 식성에 따라 간을 맞춰 먹게 한다. 설렁설렁, 술렁술렁한 국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떠먹는 그 맛은 여느 고깃국과 비교할 수 없다. 이때 삶은 쇠머리, 소의 혀를 말하는 우설(牛舌) 등을 따로 건져 편육으로 썰어 내오면 술안주로도 그만이다.

설렁탕은 초기에는 막 끓여 먹는 농사 음식이었다. 그러나 선농제가 폐지된 이후, 차츰 고급음식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봉희설렁탕'을 자주 드나들며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 설렁탕 한 그릇 드시죠
ⓒ2004 김규환
농사음식이었던 설렁탕 먹기 위해 세자는 전날부터 와서 준비했다

중농사회였던 당시에 선농제를 모시기 위해서는 전날부터 만반의 준비로 바빴다. 왕세자는 관군을 대동하고 미리 와서 준비를 완료하고 다음날 아침 왕을 맞이했다.

도성 동쪽 문인 흥인지문(현재의 동대문)을 통과해 10리 길인 한성부 전농리(典農里 현재 동대문구 전농동) 일대에 진을 치는데, 여기에서 동명(洞名)이 유래한다. 당일 왕과 문무백관이 도착하면 예조(禮曺) 주관아래 제를 올리고 왕이 소로 직접 논밭을 갈았다.

뒤로는 배봉산이, 앞으로는 전농리가 있고, 남쪽으로 논(畓)이 십리(十里)에 걸친 넓은 들 답십리(畓十里)가 있었다. 동원된 숫자는 무척 많았다. 최소 400-500명이 궁궐에서 나왔고, 선발된 농민까지 합하면 1000명이 넘는 인원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시에 함께 밥을 먹었다.

농경사회에서 소의 존재는 사람 몫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것인 만큼 잡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이날만은 미리 소를 잡아 농민을 위로했다. 오래 끓이거나 궁중에서 먹던 대로 맛과 정성을 기울이기 힘든 날이라 대충 토막내서 솥에 끓여 바지런히 뜨고, 백김치에 소금으로 간만 해 서민에서부터 왕까지 함께 먹었던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다.

▲ 동네사람 다 나와서 설렁탕을 먹고 있습니다.
ⓒ2004 김규환
설렁탕이 맛있는 계절입니다. 다소 지치신분들 설렁탕 한 그릇 드시죠. 참고로 봉희설렁탕은 6호선 새절역(은평구 신사동)에 있습니다.

선농단을 찾으시려거든 신설동-안암동로터리에서 우회전하여 종암초등학교로 진입하는 방법과 신설동-제기동-용두사거리에서 좌회전 하고, 청량리-제기동-두산타워 앞에서 골목으로 진입하면 됩니다. 선농단길을 찾으세요.

2004/04/20 오후 3:31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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