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3.1 민속문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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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3.1 민속문화제가 생겨난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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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3.1 민속문화제는 진주에서 열리는 '개천예술제'(1949), 밀양의 '아랑제'(1957) 개최에 자극을 받아 영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민족문화운동이다. 1960년 4.19 학생운동으로 참다운 민주주의에 입각한 새 질서가 형성되고 경제부흥, 문예부흥의 기풍이 일어나 창작활동과 집회 결사의 자유가 요구되는 새로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영산 사람들은 3.1 민속문화제를 창설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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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3.1 민속문화제는 「순수한 문화제로 탈바꿈하자」는 주장과 「3.1 정신의 바탕 위에 문화를 창달하자」는 의견이 맞서면서 성장해 왔다. 이것은 3월 1일이 계절적으로 문화제를 개최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고, 또 3.1절 기념행사로 인해 우리 고장의 주요 민속놀이(영산 줄다리기, 영산 쇠머리대기 등)가 빛을 보지 못한다는 주장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하는 의견들은 결국 특색있는 민속문화제를 발전시키고, 지역의 자랑스런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가운데, 문화발전이 지역발전임을 생각하여 3.1 문화제에 영산인의 자존심을 걸고 발전에 다함께 노력을 기울이자는 쪽으로 모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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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문화제(1961년)는 진주 개천예술제 개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설창수씨와 밀양 문화제 주도자 김도선씨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개최되었다. 제1회 문화제는 주로 문화예술분야를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며, 2회 때부터 영산줄다리기, 씨름, 문호장굿이 등장하고, 제10회(1971) 때부터 5일간의 문화행사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3.1문화제의 중심행사인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가 국가 중요무형문화제 제25호와 제26호로 지정받아(1969년) 문화제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제 참여에 있어서 같은 창녕 군민이면서도 영산을 중심으로 한 창녕의 남부지방의 문화제로 인식하고 창녕읍을 비롯한 북쪽 7개 면에서는 참여율이 낮았다. 그래서 제27회 문화제 때부터는 부회장, 운영위원을 북부지역에서 선출하게 하고 쇠머리대기의 장군을 또한 북부에서 뽑게 함으로써 군민 모두가 참여하는 문화제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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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쇠머리대기, 영산 줄다리기, 문호장굿, 제등 축하 퍼레이드, 불꽃놀이, 봉화놀이, 민속 가장 행렬, 서낭대 싸움, 그네뛰기, 농악대회, 씨름 대회, 널뛰기, 연날리기 대회, 소싸움, 닭싸움, 각종 백일장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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