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집 마당에 고향 나무 심고 싶어"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5. 8. 10:11

본문

728x90
"집 마당에 고향 나무 심고 싶어"
4살 많은 조카의 고향 방문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도수(khjm117) 기자   
"삼촌, 나 향자야. 잘 지냈어. 이번에 고향에 한번 내려 가려고. 어버이 날도 돌아오고 해서 아버지가 보고 싶어 산소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삼촌 이번 주말에 진뫼에 올라 오는지 궁금해서 전화 했어. 엄마랑 동생들이랑 함께 내려 가려고…."

"향자 조카가 진뫼에 온다는데 만사 제치고 가야지. 나도 조카가 겁나게 보고 싶고만그려."

서울 사는 큰집 조카가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 온다고 전화가 왔다. 어버이날이 돌아오고 하니 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었나 보다. 조카는 나보다 나이가 네 살 더 많은 내게는 누님 같은 조카다.

두만이 형님에 대한 기억

▲ 징검다리를 건너는 조카와 아이들
ⓒ2004 김도수
아버지 5형제가 진뫼마을에 터를 잡고 옹기종기 모여 살던 66년, 집안 맏형이던 두만이 형님은 6남매와 큰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아홉 식구가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기위해 형님은 불볕 더위에 아스팔트 일그러지는 모습들을 보며 힘든 도시생활을 견디며 살았으리라.

집안 종손(宗孫)인 두만이 형님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시제 날이면 어김없이 축문을 들고 진뫼마을 선산에 찾아와 '유세차…' 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던 어느 해, 형님은 후두암이 걸려 불편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시제 날 고향에 내려 오셨다. 성대를 제거해 말을 못하던 형님은 선산에서 시제를 지내고 우리 집 안방에서 형제들과 음식을 나눠먹었다. 형님이 달력을 한 장 뜯어서 뒷면에 글씨를 써가며 형제들과 대화하던 모습이 고향 땅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섬진강 작은 강변 마을에서 태어나 논두렁 밭두렁에 청춘을 불사르다 회색 빛 도시의 꿈을 안고 자식새끼들 올망졸망 앞세우고 서울로 떠나가기 며칠 전, 막걸리 몇 통 개를 받아 놓고서 헤어져야 하는 마을 사람들과 장구를 치며 마당에서 함께 부르던 '두만강 푸른물에 노 젖는 뱃사공…' 이별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자식들아! 내 죽거든 고향 진뫼 산밭 골 선산에 묻어다오."

6∙25 때 낙동강 전투에서 비오 듯 쏟아지는 총탄도 피해서 살아 고향에 돌아왔건만 나이 들어 힘든 병마 싸우던 형님은 그렇게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기고 꽃 상여를 타고 고향에 돌아왔다. 형님이 누워서 고향 땅을 밟자 사십 중반을 넘어선 조카의 울부짖는 소리가 졸졸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잠시 멈추게 했다.

"아버지! 여기가 진뫼요, 고향 땅이란 말이에요.
아버지! 말 한마디만 하고 떠나가세요, 네.
아버지! 아버지!
고향에 오니 아버지가 더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 여기가 진뫼요. 진뫼.”


"도수 삼촌, 그늘이 없어서 지금 내려가려고 하니 선산에 올라오지마. 오늘 아버지랑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었는데 햇볕이 너무 쨍쨍 내려 쬐니 애들이 뜨겁다고 빨리 마을로 내려가자고 난리야. ”

“그려, 집에서 기다릴랑게 글먼 얼릉 내려와.”

약속한 시간보다 진뫼마을에 늦게 도착한 내게 선산에 올라오지 말라는 조카의 전화다. 시집간 여자들이 부모님이 살고 있지 않는 고향마을에 온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여간 쉽지 않는 일이다. 결혼한 조카도 마찬가지였다. 조카는 아버지가 4년 전 돌아가시며 고향마을 뒷산에 잠들어 계시자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울 때면 자꾸 진뫼마을이 눈 앞에 왔다 갔다 어른거려 늘 오고 싶단다.

조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진뫼마을을 떠나갔다. 서울로 이사간 조카는 중∙고등학교 방학 때가 되면 예쁜 교복을 입고 고향에 찾아왔다. 사회 초년시절까지 명절 때가 되면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삼촌들과 함께 가끔 고향에 찾아오던 조카는 그 뒤로 발걸음이 뚝 끊겼다.

조카는 많은 삼촌들 중에서 나와 내 바로 위의 형을 무지 아껴주고 예뻐해 주었다. 아무리 촌수가 삼촌이었지만 나이가 많으니 우리들에겐 누나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조카가 고향에 내려오면 우리들은 손목 때리기 민화투를 치기도 하고, 앞 산에 올라가 마을을 바라보며 '야호' 큰 소리로 외쳐보기도 하고, 마을 앞에 있는 텃논에서 함께 공 빼앗기 놀이도 하고, 한번도 서울에 가보지 못한 우리들에게 서울 풍경을 이야기 해주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조카는 그 때마다 꼭 '고향초'를 불렀다.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었네.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고….’

조카는 예쁜 눈을 지그시 감으며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댔다. 입가에는 노래를, 마음 속에는 떠나간 고향 마을을 그리며 물감으로 형형색색 색칠을 하고 있었다.

4살 위 조카와 함께 간 면회

▲ 강변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조카
ⓒ2004 김도수
70년 후반, 내 바로 위의 형이 경기도 문산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글 눈도 어둡고 차멀미가 심하게 나니 니가 내 대신 형한테 면회를 다녀오라"며 쌀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마침 그 때 결혼식을 올리는 친척 형님의 부조금을 지참해 결혼식에 참석한 나는 조카에게 "서울까지 왔으니 형에게 면회를 가려고 한다”니 조카는 시간을 낼 테니 함께 가자며 부대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눈 내린 겨울, 빌딩숲에 가려 응달진 도로들은 빙판길이 되어 나를 비틀거리게 했다. 시내 버스를 타고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우린 문산행 버스에 올랐고 문산읍에서 다시 택시를 갈아타고 철책 선이 바라다 보이는 굽이진 비포장 길을 달리고 있었다.

눈은 하염없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방한모를 깊이 눌러 쓴 군인들은 싸리비를 들고 도로가에 나와 눈을 치우고 있었다. 바퀴에 체인을 감은 택시는 '찌걱 찌걱' 소리를 내며 탄현면 어느 산골짜기에 있는 부대 앞에 우리들을 내려 놓고 있었다.

면회를 신청해 놓고 난 우린 부대 정문 앞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조카와 나는 연탄불 위에 올려 놓은 찜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호빵 몇 개를 사먹으며 형이 부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초년병 시절이었던 형은 어렵게 외출이 허락되어 씩씩하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버스를 탄 우리들은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버스에 올라와 검문을 하는 무서운 헌병의 눈초리를 뒤로하고 문산읍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형과 우린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방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옛 이야기도 나누고 자리를 옮겨가며 술도 거나하게 한잔 마셨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조카와 나는 번갈아 가며 돈을 냈고 둘은 얇게 지니고 있던 지갑이 서서히 비어가고 있었다.

시골에서 겨우 왕복차비와 면회할 여비만을 마련해 올라온 나는 가벼워진 지갑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형은 비어가는 내 지갑을 알고나 있다는 듯 저녁을 일찍 먹고 버스를 타고 부대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조카는 택시를 타고 가라며 형을 붙들었고 우린 함께 술 한잔 더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귀대시간이 다가오자 우린 택시를 기다렸는데 조카는 형 호주머니에 돈 3만원을 집어넣어주고 있었다. 형은 돈을 안 받으려고 호주머니에서 돈을 다시 꺼내 조카에게 주려 하는데 택시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조카는 열린 택시 문 안으로 재빨리 돈을 던졌고 택시는 출발했다. 나는 형에게 용돈을 주고 돌아오기는커녕 서울로 나갈 차비와 고향으로 내려갈 열차표를 걱정하고 있었다.

용산역에 도착한 우린 전라선 완행열차 시간을 알아보고 있었다. 모든 역마다 쉬며 밤새도록 달려가는 완행열차는 밤 11시 조금 넘어 한대가 있었는데 내 수중에는 동전 몇 닢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돈이 없어 매표소 창구 앞에 다가 서지 못하고 있던 나는 창피했지만 조카에게 차비가 모자란다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조카도 돈이 없었던지 핸드백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카는 내게 남은 돈을 모두 달라고 하더니 조카 지갑 속에 든 돈을 탈탈 털어내 차비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지갑 한쪽에 들어있던 버스 토큰을 세고 있었다.

▲ 강이 좋아요
ⓒ2004 김도수
고향 진뫼마을 방향으로는 열차가 다니지 않고 열차를 타면 임실역에서 내려 다시 완행버스를 갈아타야 하니 돈이 없는 나로서는 누님이 살고 있는 남원으로 가기로 하고 남원역까지 요금을 알아보았다. 조카는 부족한 돈은 토큰을 팔아 마련해 주려고 자신이 집에 갈 토큰 하나만을 남겨둔 채 지나가는 행인들을 상대로 토큰을 팔기 시작했다.

예쁜 핸드백을 어깨에 둘러맨 조카는 창피를 무릅쓰고 지나가는 아저씨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며 토큰을 팔고 있었다. 토큰 팔기에 성공한 조카는 그 돈을 보태서 남원행 완행열차 표를 사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조카가 시내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완행 열차를 타고 다음 날 새벽 남원 역에 도착했다. 조카는 그 뒤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편지 속에는 토큰을 팔아 차표를 구해준 그 날밤, 붐비는 시내버스를 탔는데 그만 발을 잘못 디뎌 아저씨 구두를 밟아버렸단다. 조카는 미안해서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하니 아저씨 왈, "아가씨가 내 구두를 밟았으니 죄송한 만큼 돈으로 계산해서 주시오” 하더란다.

달랑 손에 쥔 토큰 하나를 기사님께 주고 난 조카는 빈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며 자꾸 웃음이 나와 고개를 돌려 피식 거리며 웃었단다.

'나 지금 십 원짜리 하나도 없는 빈손이라오'하면서 말이다.

고향나무를 마당에 심고 싶다는 조카

▲ 강변에 모여 추억의 사진을 한 장 찍고...
ⓒ2004 김도수
쌀까지 씻어서 서울에서 준비해온 점심을 질부(姪婦)가 부엌에서 준비하는 동안 조카들은 "삼촌, 이 마루 집 지을 때 만든 그 마루 인가? 참 좋네"하며 손으로 살살 문질러 본다.

조카들은 사라진 고향 집 마루를 떠올리며 대신 우리 집 마루를 문질러 보고 있었을 것이다. 조카들은 연둣빛 잎사귀를 내 밀며 푸르름을 한껏 뽐내고 있는 앞산을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 먹는 점심밥이 끝내준다며 막걸리 잔을 연거푸 비워댄다.

"고향 바람은 정말 시원하기만 하단말여. 자주 내려와야 하는데….”

조카들은 점심을 먹고 나서 큰방을 빙 둘러보며 "이렇게 좁은 방에서 전에 어떻게 그 많은 식구들이 잠자며 살았나 몰라. 그 때는 큰방이 무지 컸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보니 진짜로 좁고만…."

오랜만에 큰방 뒷문을 열어보고 싶다는 조카들은 뒷마루에 서서 고목이 되었지만 아직도 윤기 나는 잎사귀를 피워 올리는 뒷산 느티나무를 한참 바라보고 서 있다.

70이 넘은 형수님은 고향에 오니 너무 좋은지 취나물과 고사리를 꺾으러 다니느라 점심도 잊은 채 산에서 내려 오지 않고 있었다. 형수님은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야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오셔서 부리나케 점심 한 숟가락을 뜨더니 다시 '지땅'에 쑥이 많다며 낫을 들고 나가신다.

고향 땅 어느 곳에 무엇이 자라는지 훤히 꿰뚫고 계시는 형수님은 눈 주면 눈 주는 곳마다 다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고향 땅 마력에 빠진 형수님을 누가 붙들랴. 짧은 시간에 고향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어하는 형수님을 누가 말리랴.

점심을 먹고 난 조카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강변으로 나가 징검다리에 앉아서 옛 추억을 더듬기도 하고, 강 건너 묵정 밭에 핀 들꽃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봄바람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싱그러운 고향의 풀 내음을 맡으며 산책을 하고 있다.

▲ 고향 집 장독대 돌나물
ⓒ2004 김도수
아이들은 신발을 벗어 들고 껑충껑충 뛰면서 징검다리를 건너보기도 하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물에 들어가 돌 밑에 뭐가 사나 돌들을 뒤집어 보기도 하고, 징검다리 중간쯤에 놓여진 큰 돌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기도 한다.

강변에 핀 자운영 꽃들을 바라보던 조카는 동생들과 아이들을 불러서 기념 사진을 찍고 내 곁에 다가오더니 “도수 삼촌, 작년에 나 아파트에서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거든. 우리 집 정원에 진뫼에서 자란 나무 한 그루를 캐다 심고 싶어. 아름다운 내 고향과 뒷산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그 나무를 바라보며 살려고….”

지금은 나무에 싹이 돋아 이식하면 죽을 것 같아 나무를 캐줄 수 없었던 나는 대신 우리 집 장독대에서 자라고 있는 돌나물을 뿌리째 뜯어 한 봉지 듬뿍 싸주었다.

"돌나물은 번식력이 강해서 위쪽은 잘라서 나물로 무쳐 먹고 나머지는 정원 한켠에 뿌려두면 잘 자랄 거야. 내년 봄이면 진뫼에서 가지고 온 돌나물들이 조카 집 정원 한켠을 푸르게 덮고 있을 것이네. 엄마 집에 놀러 오면 돌나물 무쳐드리면 고향 내음이 물씬 풍겨서 아주 좋아 할 것여.”

“내년 봄이면 푸르게 돋아나는 돌나물들을 바라보면 고향 생각이 절로 나겠구만. 정원에 앉아서 푸르게 돋아나는 돌나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남편은 또 내게 고향타령이냐고 하겠지. 작년 여름에 강원도 어느 산골마을로 휴가를 갔는데 물도 맑고 경치도 좋다고 남편이 하도 하길래 ‘진뫼보다 못하고만’ 했더니 ‘당신은 그렇게도 고향마을이 좋은가. 진뫼 거기도 다른 마을과 별로 다르지 않는 평범한 마을이던데 뭐.’ 그래서 내가 ‘대한민국 어디를 가봐도 산과 강과 마을이 그렇게 잘 어울려 있는 마을은 아마 진뫼마을 뿐일 것여’ 했지.”

고향 진뫼에서 자란 나무를 캐서 집에다 심고 싶다는 조카는 짧은 봄 날 하루를 고향 마을에서 보내며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뒷산에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가 자꾸 눈 앞에 아른거리는지 차에 오르면서도 조카는 선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서울로 옮기고 있었다.

▲ 봄이 오는 진뫼마을 풍경
ⓒ 김도수
이 글은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 '사람과 삶' 코너에도 함께 송고한 글입니다

2004/05/06 오후 11:44
ⓒ 2004 Ohmynews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