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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발톱꽃이 핀 화단과 할아버지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5. 9.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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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발톱꽃이 핀 화단과 할아버지
삶의 작은 떨림을 느끼는 순간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이주환(zooh) 기자   
▲ 아름다운 매발톱꽃
ⓒ2004 이주환
우리 집에는 작은 화단이 있다. 요즘 화단에는 매발톱꽃이 예쁘다. 며칠 전 서울대 앞 화원에서 사와서 옮겨 심었는데 너무 싱싱하다. 색깔은 분홍과 연노랑이 함께 어울려 있고 꽃받침은 매발톱처럼 날카로우면서 우아하다.

봄이 되면 제일 먼저 갈색 순을 밀어내며 땅껍질을 뚫고 올라오는 것이 둥굴레이다. 둥굴레 꽃은 작은 종처럼 생겼는데, 땡땡땡 울리던 학교 종소리가 들릴 것 같다. 우리 집 화단에서 가장 잘 자란다.

무성한 원추리 포기 사이로 참마가 슬며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 옆에는 큰꿩의비름이 자리잡고 있고 그 앞으로 하늘나리가 벌써 한 자나 넘게 자랐다.

▲ 종소리가 들릴 듯한 둥굴레꽃
ⓒ2004 이주환
이 작은 화단은 한 평 정도이지만 한 켠에는 장모님이 심은 상추와 부추가 자라고 있어 때때로 바로 뜯은 풋성귀로 음식을 해먹는다. 3년 전 이사 왔을 때, 이곳은 버려진 채 개망초가 무성했고 잡초가 가득했다. 썩은 나무판자와 버려진 플라스틱 상자가 뒹굴고 있었다. 그러던 곳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꾸었더니 이제는 제법 볼 만하다.

요즘 야간 업무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일을 나간다. 식구들이 모두 학교로 직장으로 가고 난 조용한 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화단의 꽃을 둘러본다. 며칠 전 옮겨심은 패랭이, 데이지, 팬지는 기운을 차리고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개미들이 꽃송이마다 헤집고 다닌다. 햇볕이 바로 앞 축대와 화단 사이를 비춘다. 10 미터가 넘는 축대에는 담쟁이가 무성하게 뻗어있다.

환하고 고요한 적막이 가득하다. 바람이 매발톱꽃을 흔들며 지날 때, 축대 위 아카시아 나무에서 까치가 울어댄다. 회사에서 한참 일하고 있었을 오전 11시, 그 때는 이러한 고요한 풍경이나 여유로운 시간을 생각하지 못했다. 문득 낮 시간에 이런 시간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내게는 새롭다.

▲ 담쟁이 축대
ⓒ2004 이주환
이 때는 차를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인사동에서 구입한 몽중차를 마신다. 입안에 구수한 차향이 번진다. 창밖에 눈길을 보낸다. 밝은 햇살이 가득하여 눈부시다. 추사선생이 일흔 때 쓴 글씨 중에는 '소창다명(小窓多明) 사아구좌(使我久坐)'라는 글이 있다.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지금 나의 심정이 그러하다.

참으로 처음 느끼는 고요하며 낯선 시간이다. 이런 시간이면 갑자기 마음이 들뜬다. 오늘따라 화단에서 느끼는 감정이 각별하다. 이런 감정은 생활의 활력임에 틀림없다. 나에게는 이러한 감정의 여기상태, 가르다란 떨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시인학교에서 만난 할아버지

1992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충남 만리포 해수욕장 근처의 한 초등학교에서 해변시인학교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다. 당시 황금찬 시인이 교장 선생님이었고 박목월 시인의 사모님 유익순 여사가 참가했었다. 그 분은 단아하고 고우신 분이었다. 시인과 참가한 학생들은 4박 5일간 함께 시를 낭송하고 시극을 연출하고 백일장을 열기도 했다.

교실 마루바닥에 모기장을 치고 담요에 누워 있는데 바로 곁에 할아버지 한 분이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혹시 몸이 불편하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일어나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 여보게 젊은이, 자네 지진을 알지, 큰 지진이 나면 그 후 여진이 있지 않은가"
" 나는 오늘 한 편의 시를 썼다네"
" 그 감흥으로 내가 잠 들 수 없어, 지진 후 여진처럼 그 감정이 나를 흔들어"


당시 나는 너무 놀랐다. 거의 칠순이 다 된 할아버지가 한 편의 시를 쓰고 나서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저렇게 잠들지 못하다니, 그 분이 늦은 나이에 보여주는 삶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그 후 나의 삶이 건조해지면 문득 그 분을 생각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나와 상관없다는 이유로 주위에 무관심해 진다. 그냥 지나친다. 삶이 건조해진다. 그러다 가끔 이러한 처연한 한 송이 꽃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그리고 그것을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볼 때 잊
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마 내가 최근에 잘 한 일 중에 하나는 화단에 꽃을 심은 일일 것이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매발톱꽃, 패랭이, 팬지, 데이지를 심었다. 땅을 팠더니 애벌레가 나왔다. 1년 동안 '토롱이'(우리집에서 끼우는 토끼 애칭) 배설물이 삭아서 땅이 기름지다. 그 때 옮겨 심은 꽃들이 나에게 이렇게 작은 기쁨을 선사한다. 잠시 잃었던 마음의 여유와 잔잔한 떨림을 전해준다.

작은 화단과 건너편 축대사이에 5월의 햇살이 가득하여 눈부신 날이다. 비록 남들이 잠든 밤 시간 일을 나가지만 이렇게 낮 시간의 고요를 선물로 받은 셈이다.

▲ 매발톱꽃이 핀 작은 화단
ⓒ2004 이주환

2004/05/07 오전 11:07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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